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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6일 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18-22 ‘개혁 신앙인’) 20.8.16.

21세기의 특성 중 하나가 가정 상실시대라고 한다. 즉 가옥(House)은 있지만 가정(Home)이 점점 사라졌다는 것이다. 60년 전 저만해도 할아버지 방에서 가정교육을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어른인지 모르는 자식들이 많다. 형제도 없이 혼자 독불장군으로 자라다가 결혼도 안 한다. 심지어 결혼을 해도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래서 ‘졸혼’(卒婚)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것인데, 이혼하지 않고 혼인관계는 계속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서로 각자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부부 삶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보험금을 노리고 부인이나 부모까지도 살해해버린다. 문제의 심각성은 무엇인가? 껍데기는 있는데 알맹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삶도 껍데기만 괜찮고 알맹이가 없다면 이것은 처참한 사기극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학장이었던 모건 박사가 결혼한 신혼집을 공개하였더니 많은 방문객들이 축하일색이더란다. 그럴 때 부모님께서도 축하차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신 후에 아들에게 한 마디 하였다. “집이 크고 참 좋구나!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께 속한 부부인지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인지 감을 잡을 수 없구나...” 하나님을 믿는 향기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들 모건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신혼집을 생각해보았더니 아버지의 지적이 옳았다. 두 부부는 당장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분위기로 집안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삶을 통하여 검증된다(아니다, 전혀 불가능하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가정이라면 소장품이나 집안장식에서 차별난다. 집안분위기가 신앙고백과 상관없다면 알맹이를 상실한 이론믿음삶이기 쉽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실내장식에 둘 것은 두고 치울 것은 치우게 되는데, 치울 것은 껍데기이고 둘 것은 알맹이인 것이다. 우리자신의 가정 분위기는 어떤가? 어떤 집은 달마도 그림을 걸어두고 비싼 것이라서 그냥 두고 있다는 교인도 있다.

오늘 설교본문도 알맹이 문제라는 것을 심각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합니까?”(18)라고 물었지만 사실은 비난이었다. 금식을 소홀히 하는 것을 보면, 금식에 충실할수록 당연히 비난하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 비난을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9-20).

유대인들이 생각한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의 표현, 범죄에 대해서 철저히 회개함, 위기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 동안 꼬박 금식하는 것을 아예 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런데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낙타의 가죽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면서 굉장히 금욕적인 삶으로 하나님심판을 대비하여 회개시켜 거룩함을 회복하는 운동을 철저히 벌렸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세례와 금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금식자체보다 알맹이였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사 58:6-9).

복음에 정통하지 못하면 종교적 껍데기를 자랑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계 3:1-3. 알맹이가 없는 신앙 삶의 겉모습을 지적한 것임).

구역예배 때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어떤 집인가?”라는 토의를 하게 되었단다. “침실에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 “황토 벽돌집” “오두막이라도 내 이름으로 등기된 집”... 그런데 어떤 집사님이 말했다. “요즘 들어서 절실해지는데 아빠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요.”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사님은 사춘기를 겪는 아들과 살아가는 과부였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 그러면 다시 한 번 자문자답해 보자.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어떤 집인가?” 아빠엄마 자식들이 있고, 서로 배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간다면 알맹이가 꽉 찬 가정 아닌가요? 아멘!!!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경건신앙을 익히게 되었다.”라고 고백하였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와 예배, 말씀에 순종하려는 설교듣기를 아버지에게 시청각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설교본문으로 돌아와서 우리 예수님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고 저와 여러분의 정답을 챙기자.

1) 금식(20)

예수님은 무조건 금식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아이들 용어로 ‘타이밍’) 유대의 결혼관습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에 당도하면 기다리던 손님들이 신랑신부와 함께 잔치를 즐기는 게 결혼식이었다. 그렇다면 결혼식 때 함께 식사를 즐기는 것은 필수과정 이었다. 그 식사는 깊은 밤까지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진행되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상당히 가난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온 동네가 한 판 잘 먹는 잔치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정한 금식일과 결혼식이 겹치면 금식보다 잔치를 선택했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풍속을 다 알고 대답하기를,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혼인집에 도착하였다면 아무리 금식일과 겹칠지라도 바리새인들도 잔치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자. 하나님나라의 성민으로 사느라고 회개금식을 철저히 하는데, 혼인잔치처럼 예수님을 신랑삼고 함께 잔치한다면 금식보다 당연히 옳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나 심지어 세례요한이 벌이고 있는 회개 금식운동은 예수님의 잔치에 동참하는 것으로 교체할 때(χρόνος<크로노스 계절> 아닌 καιρός<카이로스 하나님의 언약성취 시간>)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혼인집 손님들이었다면 신랑을 기다리느라고 금식하면서 그것을 경건한 회개라고 고집 부렸을 것인지 아니면 신랑 예수님이 당도하셨으니 함께 잔치를 즐겨야 했는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은 금식을 할 것.’(20).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화목제물로 죽으심을 두고 하신 것이다. 신랑 예수님이 로마병정에게 십자가에 못 박힐 그때는 잔치가 아니라 금식이 옳다는 것이다. 아멘.

2) 생베(21)

이 말씀은 탄력성이 핵심 가르침이다. ‘생베조각’은 당길 때 당겨지고 늘어날 때 늘어나 찢어지지 않는데, 낡은 옷은 탄력부족으로 당기면 찢어지고 또 늘이면 터져버린다. 그런데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세례요한의 금식운동도 명백히 낡은 옷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1:11-13을 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예언의미 중심으로 보면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라는 것이다.

요한의 회개운동은 천국실현 준비과정인데 이것은 성취할 약속과 예언의 시대종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성취의 시대를 시작하신 것이다. 구원역사의 새로운 시작이니까 이 성취시대에 사는 사람은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을 그만큼 더 크게 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약을 예고하던 시대에서 보면 요한이 가장 위대한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새로운 장이라는 경계선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생베와 낡은 옷의 비유로 설명하신 것인데, 세례 요한은 유대교라는 ‘헌 옷’ ‘헌 시대’이며, 예수님은 ‘생베’ ‘새 시대’라는 거였다.

싸늘한 어느 늦가을 오후 연못에서, 개구리 3마리가 나뭇잎에 올라와 쉬고 있었다. 한 참 후에 그 중 한 마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아이 추워. 난 땅 속으로 들어갈 거다!” 다른 개구리들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나뭇잎에는 개구리가 몇 마리 남았나요?” “2마리요!” 질문을 받은 아이들이 대부분 자신 있게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답은 틀렸다. 나뭇잎 위에는 개구리가 여전히 3마리 남아 있었다. 왜 그럴까? ‘들어갈 거다’라는 ‘결심’과 진실로 들어가는 ‘실천’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개구리는 ‘들어갈 거다’라고 결심만 했을 뿐이다. 그 개구리가 진실로 땅속으로 들어갈지, 머리를 긁다가 다시 앉아버릴지 더 두고 봐야했다. 그렇다. 교인들도 자주 그렇다. ‘들어갈 거다’라고 큰소리만 치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새 시기(καιρός 카이로스)를 알아보고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3) 새 부대(22)

‘새 부대’는 탄력성이 왕성한 그릇을 가리킨다. 그때는 유리병보다 양 가죽부대에 포도주를 담아 발효시켰는데, 탄력성이 좋은 새 가죽부대라야 포도주가 발효할 때 팽창해도 견디어냈는데, 낡은 가죽부대는 신축성 부족으로 그 발효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니 새 포도주를 쏟아버림으로 낭패였다는 것이다. 새 포도주를 잘 보존하는 그릇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왜 예수는 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유대교나 요한은 언약과 예언 시대에 속했는데 이것은 헌 가죽부대에 해당한 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언약성취를 시작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새 포도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베나 새 부대라야 예수님께서 실현해 주는 하나님 나라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신앙태도, 반응, 신앙 삶, 신앙관을 가리킨다. 아멘.

미국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란다. “내가 결혼한 내 남편은 어디 갔는가?” 결혼할 때 자기를 배려해 주고, 위로해 주는 그 좋은 사내였는데, 결혼 후 몇 해 되니까 그 남편이 많이 변해버렸다. 아내를 무시하고, 가정을 등한히 하고... 그래서 결혼할 때 내 남편감은 어디 갔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남편도 해당된다. “내가 결혼한 내 아내는 어디로 갔는가?” 시대를 퇴보하거나 멈추지도 말고 발전적으로 반응하면서 개혁하는 삶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을 거울삼아 저와 여러분을 비춰보고 깨달음을 결행하자.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καιρός 카이로스)를 따라가는 신앙삶을 사는 게 순종이라는 거다. 성경지식도, 신앙관도, 금식도, 삶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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