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9일 설교
“예수님이 찾는 사람!” (막 2:13-17 ‘예수님께 쓸데 있는 자’) 20.8.9.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898~1993) 목사는 세계적으로 20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적극적 사고의 능력’<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의 저자이며, 가이드포스트(guidepost) 발행인으로 유명한 분이다. ‘100만인의 설교자’라고 칭찬을 받았고, 얼마나 듣기 좋은 설교를 하는지, 그의 설교집은 불티나게 팔려서 너도나도 읽었다. 그런데 그분은 특이하게 설교를 하는데 ‘죄’라는 말을 일부러 회피했단다. 그래서 교인들이 긍정적인 설교반응을 하고 많은 지지를 하였다고 한다.
현대인들의 심리에 적중했던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과 달리 미국 시카고 헤몬드에서 목회하셨던 젝 카일 목사님은 특이하게도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셨단다. 젝 카일 목사님은 주일설교 때마다 사람들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러한 설교를 싫어하던 한 청년이 목사님을 향해 권총을 쏴버렸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가서 장로님들이 “목사님, 이제 설교 중에 죄를 그만 지적하십시오.”라고 강권했더니 젝 카일 목사님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는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강대상을 방탄유리로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또 한 번 권총으로 저격당했지만 젝 카일 목사님은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단다. 왜 그랬을까? 젝 카일 목사님이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개인과 가정과 사회에서 죄를 줄어들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학교로 부흥되더란다.
현대인들은 죄를 위장시켜놓고 위선을 떨면서 성공설교나 위로해 주는 설교를 들으려고 한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그 교회를 떠나 옮길 교인들이 없다? 적다. 많다! 죄인들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려고 할 때 대부분 싫어한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20-21). 그렇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실토하는 그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고쳐보려고 노력한다. 죄가 얼마나 큰 비극을 일으키게 되는 날을 아니까 죄인인 자신을 그대로 남겨두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십자가 화목제물을 찾아 무릎을 꿇고 고백하여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암세포는 옥도정기만 바르면 치료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도려내거나, 방사선으로 태우거나, 생명세포까지 죽이는 항암제주사를 집중적으로 주입시킬 때 암이 고쳐진다.
오늘 설교본문도 우리 예수님께서 죄를 드러내놓은 후에 자인함을 통하여 전인구원을 이루시는 그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14-15).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가’에서 몰려드는 ‘큰 무리’에게 천국을 가르치시더니, 세관으로 찾아가서 세관원 레위를 12제자 중 한 명으로 선발하시고 곧바로 레위 집에서 세관직원들과 죄인들까지 함께 잔치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을 깨우치실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부요한 잔치의 비유로 자주 설명하셨다. 이러한 잔치비유는 천국구원을 하나의 그림으로 쉽게 그릴 수 있게 함으로 천국백성 됨을 보다 빨리 알아차리게 하려는 예수님의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언약하실 때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바리새인일수록 순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당시에 멸시천대를 당하던 죄인들과 세리들이 당돌하게 동참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동참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언하시고 그 증거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를 정식으로 실행하셨다(15 ‘앉았으니’ κατακειμαι 카타케이마이 기대어 누어 식사하는 자세. ≠ 잠깐 요기, 주막에서 ‘주모, 국밥 한 사발’). 이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전용방법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예수님께 붙인 별명을 붙였다(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가지인데 식탐하는 자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아주 고약하게 모욕주기, 얼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함!)
그렇지만 이 별명을 예수께서 명 정당화시켜버렸다(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예수님은 병든 자를 불러서 그들을 치유하여 온전한 구원을 실현시키신다는 것임. 병자와 죄인을 동일시하심(5절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죄 용서 선언’이 중풍병자를 치유함인 것을 보여준 것임.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세리들이나 죄인들, 병자들을 천국백성으로 삼으실 때 죄용서나 병고침을 각각 적합할 뿐 마찬가지 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임).
예수님이 세리 삭개오를 구원하실 때를 보자 (눅 19장). 삭개오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격하였지만 궁금해서 직접 예수님을 보려고 안달 났어도 사람들 틈에 낄 수도 없었다. 자기 민족에게 하도 강제세금을 물려서 악질로 다 소문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보았던 것이고, 그러한 삭개오가 자기 집에서 회개하며 결단하는 것을 보았던 예수님께서 삭개오에 가장 적합한 전인구원을 선포하시고 진정한 천국백성으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전인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신앙생활의 답을 함께 챙기자.
1) 앉아 있는(14)
‘앉아 있는’ καθημενον 카쎄메논 = καθημαι 카쎄마이 현재분사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NIV-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를 그 당시에 레위는 자신의 근무공간 박스에서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모든 것을 버리고’(눅 5:28 καταλιπων παντα 카탈리폰 판타 : καταλειπω 카탈레이포 neglect, forsake, depart from. 레위의 중심상태<가치판단>를 보게 함. 생업 및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에서 가치비중을 미련 없이 옮겼음). 그는 지금까지 떳떳하지 못한 세리라는 직업을 고집하고, 온갖 멸시와 모욕을 견뎌내면서 오직 돈만 벌고 벌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의 인생가치를 더 이상 재물에 두지 않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24절, 26절, 28절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하나님께서 내버렸다고 강조했는데, 인간이 등을 돌리고 바득바득 우기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자기고집에 빠지니까 하나님께서도 아무리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셔도 ‘그러면 한 번 잘해보라’하시고 방치하시고 포기해 버리셨다는 것이다. 명심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따름(15)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 이러라.’ 레위처럼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그러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한 것인데, 세리나 죄인들로 그 당시 완전히 밑바닥으로 밀려나 무시당하던 인생 밑바닥 천민들이 예수님께 동참하였다는 것이다.
복음서 4권을 천천히 확인하면서 읽어보면 우리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빈센트 필 목사님의 설교처럼 죄를 그대로 덮어두고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설교를 통해 성경지식으로 교양수준을 높이려는 신사쟁이들이 있었고, 또 영혼구원부터 해결하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눈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서, 지금도 그 고백은 여전히 사실이라고 시인하는 사람들이다. 이 같은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증언해 놓았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죄를 건들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을 ‘은혜스럽다’ ‘긍정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대로 말하면 그 교회의 믿음양심이 병 들었다는 징조이다. 교인수나 헌금액수로 덮어갈 일이 아니다. 신호등을 어긴 죄는 벌금내면 끝난다. 절도죄는 감옥살이로 해결된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죄는 회개하고 심판대에서 통과되어야 끝난다. 심판대에서 변호인은 예수님뿐이시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아멘.
3) 서기관들(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레위 집에서 베풀어진 잔치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어 ‘파라쉬’(פרשׁ 파라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분리주의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절대금기사항 중에 하나가 세리들과 죄인들의 잔치에 합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자진해서 왔으니 토픽뉴스감이다. 그런데 그토록 어렵게 잔치에 참석한 후에 기껏 한다는 게 시비였다! 오늘날도 예배가, 기도가, 봉사가 예수님을 만남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비하는 꼴로 구경하는 성경 지식장이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0.5.-1758.3.22.)는 미국 청교도 신앙을 물려받은 위대한 신학자요 ‘대각성운동’으로 알려진 미국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킨 설교자였단다. 그는 이런 사실을 책에 써 놓았다. 자신이 주일예배 때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잡힌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촛불 옆에서 원고지를 들고 읽기만 하였는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통회했다고. 1700년대 그 설교를 하던 날, 그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하도 많은 죄를 저지르면서 살아갔기에 통회했다고 보는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그 밤에 십자가에 못 박고 싶어서 통회했을 텐데, 현대교회는 어떠한가? 아니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죄에 대한 그러한 고충보다 오히려 여유만만하지 않나요? 어서 죄사함을 받고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심판 때 받을 상을 준비하고 싶어 조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선 성도와 모순된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시비나 거는 서기관들과 오십보백보라는 것이다. 자주 생각나길 축복!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이 나 자신에게 보여준 그 믿음눈금을 다시 확인하자. 우리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니까,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동참하고, 영접잔치를 벌이고... 하는데, 웬 영접잔치를 하느냐고 시비를 거는 성경지식장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떠한지 점검해보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