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5일 설교
“놀램으로 끝낼 것인가?” (막 1:21-28 ‘귀신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20.7.5.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2015년 6월 2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 서초사옥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감염과 확산을 막지 못해 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쳐드렸다. 책임을 통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철저히 조사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방지 약속까지 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술수라기보다 진정성이 느껴졌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5년 후 지난 5월 6일 이재용 부회장은 “승계문제와 관련해 많은 질책을 받았는데, 이제는 이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또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여론은 자발적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이었다.
2014년 ‘땅콩 회항’ 사태로 대한항공도 두 번 사과를 하게 됐다. 첫 사과문은 “잘못은 사무장이 한 것이며,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은 당연한 지적을 하였다.”라고 책임회피성 변명을 하다가 빗발치는 비난에 몰렸고, 두 번째 사과문을 통해 “큰 상처를 드렸다. 그 어떤 사죄의 말씀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라고 불을 꺾으려하였지만, ‘고개만 숙였을 뿐 명확히 무슨 잘못을 사과하는지 모르겠다는 여론이었다.
정보는 갈수록 투명하게 밝혀지기 때문에 잘못을 가리기가 쉽지 않는 현실인지라, ‘사과회견’도 자주 생긴다.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빚은 야구선수 강정호 사과회견,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여직원 성추행 혐의 사과회견, 이만희 신천지 총회장은 지난 3월 2일 경기도 가평군 신천지 평화의 궁전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사과기자회견을 할 때 엎드려 절을 두 번이나 하였지만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라고 사과했다가 빈축만 샀지요. 이런 사과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공감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충분히 사과를 해도 상대는 받아주지 안는다. 왜 그런가? 전문가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과는 시작조차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쿨하게 사과하라’의 저자 김호는 “사과의 핵심은 ‘I’m sorry’(지금 나는 미안하다)가 아니라 ‘I was wrong’(이미 나는 틀렸다)라고 시인하라고 제안한다. “사과는 사과할 시기를 놓치지 말고, 또 책임인정을 하여야 피해를 어떻게 복구할 것이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 집착하여 사과문을 듣기 좋게 쓰는 쪽으로 머리만 굴리면 실패한 사과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자발적인 진정성과 책임성을 철저하게 확인하시는 우리 예수님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27-28). 지금 우리가 함께 읽어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동네 회당에서, 귀신들린 병자를 완치시켜주신 일에 대한 바로 그 반응이다. 그 현장을 제대로 목격할 수 있도록 핵심을 조금 설명하겠다(가버나움 : 갈릴리 호수의 북쪽인데 어업중심지였고, 세관과 로마병영이 있을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고, 회당<συναγωγη 쉬나고게> :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드리고, 성경낭독과 강해를 듣고 또 교육과 재판하는 장소. 안식일 회당이라면 주로 예배였다. 서기관 :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율법을 연구하고 계승시키는 학자였다).
그런데 우리가 설교본문을 마가가 보여주는 대로 보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신 이유가 귀신추방보다 가르침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21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주목적은 말씀을 가르침이었는데, 갑자기 귀신이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23 ‘이르되’ λεγων 레곤, 현재분사 = 반복진행<24절. 말을 계속함>.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치시다가 귀신을 쫓아버린 것임!). 곰곰이 생각하여 보자. 그 회당에서 예수님만 성경을 가르치신 게 아니다. 거기서 계속 서기관들도 말씀을 가르쳐왔다. 하지만 서기관들이 설교할 때 귀신들린 사람이 여전히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23 ‘있어’ ἦν 미완료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설명해도, 귀신은 아무렇지 않게 예배를 드렸는데, 예수님이 설교를 하니까 귀신들이 발광했다<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그렇다면 귀신들이 평안히 예배드리는 설교가 있음을 마가는 증언한 셈인데 안타깝지만 율법학자였던 서기관들의 설교가 그랬다는 것임!). 그렇다면 오늘날 귀신을 가만두는 설교(겉모습만 있고 속 내용이, 신앙고백이 죽은)를 심각하게 점검해 보자.
“천재 같은 너만 있으면 돼!” 독보적인 능력을 칭찬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 말은 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는 풍부할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 성공을 이루지 않거나 무조건 하향식 명령체제에 능숙한 바로 그 독재일 수 있기에 아주 위험하다. “너 없으니까 전혀 일이 안 된다.”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그 공동체에서 정말 필요하고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동체 전체가 그 한 사람으로 지탱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건전하고 건강한 공동체는 못 된다. “시키는 대로 역시 잘하지!” 칭찬일 수 있다. 상관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이 마치 기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잘하는 게’ 관료주의 전통에 길들여져서, 개혁적인 생각은 발상도 안하고 변화를 무서워하는 사람일 수 있다. 참신한 일꾼은 창의력과 개혁을 발휘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공동체와 성취를 나누며 즐기는 것이다. 새 시대의 필요와 변화를 잘 판단하고 이루어가는 사람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다. 그 올바른 그리스도인을 우리 예수님이 시작하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오늘 설교본문에서 예수님을 좀 더 세밀히 살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챙기자.
1) 권위(22)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이 말씀은 우리 예수님의 설교 차이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우선 ‘놀라니’(εκπλησσω 에크플레소 blast 돌풍이 부는 것, 폭발. ‘they were completely astonished’-Amf-). ‘이는’(γαρ 가르 because, 이유: 예수님의 가르침! ‘권위’= εξουσια 엨수시아 힘<power, ability>이 넘쳐남. ≠ 서기관들). = 눅 4:21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πεπληρωται 페플레로타이 완료 수동태 πληροω 플레로오 fill up, influence fully, to bring to an end. accomplish. 설교본문의 언약이!).
죠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하여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작별인사를 했단다. “내 아들 죠지야, 하나님의 축복과 어머니의 기도가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다.” 일국의 대권을 등에 짊어지려고 할 때, 어머니의 마지막 이 확신 넘치는 충고는 아들 워싱턴에게 그때까지 녹아있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신앙심을 한 덩어리로 뭉쳐주는 지남철이더란다.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로 꼽는 하나님의 사람들 모세나, 사무엘, 세례요한 대 애국자, 장군 그리고 등등 우리가 선망하는 수많은 신앙인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 위대한 신앙심을 살려주는 은인들이 계셨다. 그렇다면 워싱턴의 어머니와 워싱턴처럼 최상의 설교와 끌어당기는 아멘으로 신앙생활을 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설교권위요 차이점이었기 때문이다. 아멘.
2) 꾸짖어(23-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우리 예수님은 두 마디 ‘잠잠하고’ ‘나오라’는 말을 ‘꾸짖어’(επιτιμαω 에피티마오 상대의 기를 꺾어 제압함) 하셨던 것이다. ‘나오라’는 분리, 떠남, 헤어짐, 쫓겨남이요, ‘잠잠하고’(φιμοω 피모오 muzzle 주둥이에 재갈을 물림. silent).
그런데 귀신이 한 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나사렛 예수여’ ‘멸하러’ ‘하나님의 거룩한 자’였다. 이 세 가지는 예수님에 대한 핵심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은 단 0.1%허락하시지 않고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귀신하고 나누는 대화는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마가복음 5장에는 귀신들린 미친놈을 소개하여 놓았는데, 밤낮 무덤사이로 돌아다니면서 돌로 자기 몸을 해치기도 해서, 쇠사슬로 묶어놓으면 끊어버릴 정도였단다. 그 미친놈이 예수님을 보더니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13절에 “몰사하거늘” 달려왔고, 절하였으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하면서 간구하였을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조금도 인정하시지 않고 몰사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마귀 짓은 아무리 거룩해보여도 빵점처리 된다는 것을 명심하길 축복한다. 아멘.
3) 어찜이냐(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τι εστιν τουτο 티 에스틴 투토 “이것이 무엇이냐?” what is this? ‘놀라’ : θαμβεω 담베오 awe-struck 경외신앙심에 눌린 모습, 엄청난 충격! 어떤 힘에 사로잡힌 것!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은혜충만’ ‘맥추감사’라고 격찬일색임. 그런데 그들이 서로 나눈 질문을 좀 생각하면서 들어보자. “이것(예수님의 설교와 귀신추방’)이 무엇이냐?” 그들은 예수님이 궁금했고 결국 몰라서 물어봤다. 깨달음이 없었다. 요 3:11-12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렇다면 엄청난 어떤 힘에 사로잡힌 체험은 하였지만 깨닫지 못하니 믿지 못했던 것이다.
오케스트라 연주공연을 보면 악기연주자들이 먼저 자기자리에 앉아 악기조율을 한다. 연주자들이 각자의 악기를 조율하면 화음에 맞지 않아 시끄럽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소리로 환상적인 화음을 이루려고 각자의 소리를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조율을 끝내면 지휘자가 등장하고, 연주는 곧바로 지휘를 따라 시작된다. 지휘자가 없이 시작하는 연주는 없지요. 축구경기도 시작하기 전에 선수들이 각자 알아서 몸을 푼다. 무릎을 올려 뛰고, 앞으로 옆으로 뛰고, 빠르게 천천히 뛰고, 굴러오는 공을 차기도 한다. 선수들이 모두 운동장에 뛰어다녀도 시작된 경기는 아직 아니다. 애국가를 끝내고 심판이 호루라기를 부는 순간부터 시작된 경기이다.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이 아무리 회개의 세례를 잘 전파하였어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복음의 시작’은 아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예수님을 따라 옳게 반응함이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아무리 ‘새 교훈’이라고 난리를 쳐도 ‘이것이 무엇이야’로 끝난다면 그것은 아직 ‘복음의 시작’은 아닌 게 확실하다고 마가가 증언하여 놓은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를 거울삼아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자녀 삶을 비춰보자.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 예수님은 안식일 회당에서 권위 있게 설교하시고 귀신을 꾸짖어 추방시켰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체험을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참을 깨닫지 못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냐고 서로 묻기만 하고 안타깝게도 믿지 못해서 ‘복음의 시작’을 놓쳐버렸다.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