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1일 설교
“하나님의 복음이다!” (막 1:14-15 ‘예수님의 첫 설교’) 20.6.21.
기형도(奇亨度, 1960.2.16.~1989.3.7. 인천 옹진 출생<30세 생애 중 시인 4년. 1985년 동아일보의 신춘문예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함>. 생존 때는 무명으로 지내다가 사후에 발표된 시집을 통하여 주목을 받았음). 성실한 부친 덕분에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9살 때 부친이 중풍에 걸리면서 어머니가 장사로 생활했는데, 15살 때 직장 다니던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러면서 1980년 광주시민항쟁이 일어날 만큼 암울했던 때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단다. 시<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첫 구절은 기형도 시인이 교인은 아닐지라도, 목사님을 관심가지고 보아왔음을 말해준다. 또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이런 교회풍속도는 유행이었는데도, 그 목사님만 그 교인들의 취향을 무시하다가, 어느 날 철공소에서 반듯하게 펴는 망치질을 발견하고 목사님이 통감하였고, 그러한 목사님을 목격했던 시인도 공감하게 됐던 모양이다.
동네 교인들이 기형도 시인에게 보여준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축복과 미래보장을 위하여 대신기도를 잘 해주는 목사님을 선호하는 삶이었는데,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이러한 모습은 교인들의 신앙관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감정적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그 교인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에는 무관심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성경중심 신앙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저 자기 일에만 축복응답을 바랄 뿐이었다. 목사님의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으니... 교인들은 목사님을 통한 축복을 의심한대로 줄줄이 교회를 떠났던 것이다.
그럴지라도 남은 교인들은 달랐나요?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신앙 삶을 강조한 기본 설교였지만.... 교회집사들은 분노하였다. 집사님들은 자신의 양심을 찌르고 삶을 개혁하게 하는 설교는 무조건 외면했던 것이니, 십자가 현장에서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한 바리새인들과 다른 게 무엇이냐고 항변한 게 아닐까?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떠나는 목사님을 보면서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라고 시를 끝마치는 시인은, 철벽같은 고정관념들에게 삶을 만드는 믿음을 설교하고 그 열매를 수확한다는 게 그토록 어려워서..... 목사님들이 복 타령으로 마법설교를 일삼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시인자신의 애통함을 쏟아내는 시를 쓰게 됐던 모양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실체를 올바로 알아보는 게 그토록 중요한 ‘복음의 시작’(αρχη 아르케 head, beginning, chief, important)을 좌우할 정도로 막중한 사실이라고 웅변해주고 있는데, 설교본문에는 그 실체를 ‘하나님의 복음’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니까 복음 중에도 하나님의 것(하나님의 소유! 하나님께 소속된 것)이다. ‘복음’(ευαγγελιον 유앙겔리온, Gospel,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베푸는 보상’이었는데,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가리키게 됨).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천국비유와 치유, 제자훈련, 십자가 죽으심, 부활승천...)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구출, 구제)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교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책 로마서 첫 장에 복음을 이렇게 규명하였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4- 17). = 복음에 대한 성능확신, 간절함, 유일한 대안제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해줌).
친구 목사님이 다른 교회의 헌신예배설교를 하는데 물과 기름 같은 예배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웃는 이야기를 해도 침묵반응이었다. 그 목사님이 물어봤단다. “왜 웃지를 않으세요?” 권사님 왈, “당회허락이 없잖아요.” 이 정도면 어느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라도 창조적인 아이디어에 동참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포도주기적만큼이나 어렵다. 실체를 알아차리고 동참하는 신앙생활이 ‘복음의 시작!’
자 그러면 설교본문을 통해 마가가 증언하는 ‘복음의 시작’을 저랑 같이 확인하면서 명품반응 해보자. 아멘.
1) 때(14)
‘때가 찼고’(πεπληρωται ὁ καιρος 페플레로타이 호 카이로스 the time is fulfilled. 완료 수동태 “The right time has come.” -GN-) :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해 오셔서 특별히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시간이 되었다!(인간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계절적인 시간은 헬라어로 ‘크로노스’ <χρονος>라고 함). 그러므로 ‘찼고’<πεπληρωται 페플레로타이 완료 수동태>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 언약하신 그 기간이 다 되었다는 것임<“The [appointed period of] time is(completed) fulfiled,” - Amf –>.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구체적으로 십자가 구원성취 시간!). 그렇다면 마가는 창세기 3장 15절의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그 십자가 구원이 바로 ‘복음의 시작’(αρχη 아르케 head, beginning, chief, important)의 본질이요 알맹이라고 증언했음을 알아차리는 게 마가가 볼 때 숙제를 잘 하는 것이다. 아멘.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23). 이 말씀은 왕비에게 황제의 사랑이 끊겼고, 더구나 하나님께 외면당하였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 남편을 비웃다가 당한 비극이었다. 이러한 징계를 놓고 ‘하나님도 너무하셨다’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엄중한 가르침이다.
왕비 미갈이 왜 다윗 왕을 비웃었을까? 남편을 걱정한 나머지 그랬나요? 아니다. 지극히 경솔한 판단 때문이었다. 다윗 왕은 언약궤를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왕 자신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함만 생각하였다. 그래서 평민복장인 베옷을 입고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이시다!”하는 마음가짐으로 언약궤를 환영하며 춤을 추었을 뿐이다. 그러니 다윗 왕은 온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표현했다. 왕 체면을 무시했고, 백성의 눈치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께 찬양, 하나님께 영광에만 혼신을 다했다. 그럴 때 미갈만 다윗 왕의 심정을 읽지 못하고 겉 체면을 앞세웠다. 사실 미갈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뽑힌 사울 왕의 딸이었다. 그런데 친정이 몽땅 망했지만, 다윗은 정치적인 적군의 딸 미갈을 왕비로 대접해주었다.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미갈은 ‘황공무지로소이다’라는 태도를 보여야 할 때 세상풍조를 따라 비난을 선택했다. 저와 여러분은 미갈의 사고방식을 없애길 축복한다. 아멘.
2) 하나님의 나라(15)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 ‘(내) 아버지(의) 나라’ ‘주의 나라’, ‘그(의) 나라’라고 기록 됨. 영어성경에는 ‘Kingdom’(왕국) ‘Kingdom of God’(하나님의 왕국)로 번역하였음. 성경에 근거한 설명인데,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다스림과 질서 ≠ 하나님이 수동적이고, 멀리 계심, 무관심하심. = 순종필요<응답! =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순종하고 찬양>. 중요한 바를 바울이 논증해 놓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라고.
이재용 삼성부회장이 프로포폴 약을 상습 투약했음을 목격한 증인이 나타났다고 인터넷 뉴스로 떠돌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프로포폴 약을 주사 맞았던 곳으로 지목된 서울 강남구 소재 성형외과에서 5년간 근무하였다는 전 직원 A씨는 프로포폴 주사를 맞으려고 그 병원에 오는 이재용 씨를 여러 번 목격했고, 또 병원실장이 프로포폴 불법투약하려고 이재용 부회장의 한남동 자택을 찾아간 과정을 다른 직원 2명과 함께 직접 미행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삼성 부회장이라면 무엇이 부족해서 마취주사를 맞을까? 경제력? 학력? 사회지위? 나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마음의 공허함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영혼이 병약한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에 맞게 설명하면 하나님나라와 단절! 이지요.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것을 감사하자. 아멘.
3)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회개하고’<μετανοεω 메타노에오 to undergo a change in frame of mind and feeling, to make a change of principle and practice = 가치관, 사상, 이론, 느낌, 실제 삶... 일체 고침! 굉장히 적극적인 변화>, ‘믿으라’<πιστευω 피스튜오← πειΘω 페이쏘 influence by persuasion, conceive, follow, obey<母> 이해하고 인격적인 완전한 신뢰로 자신을 온전히 맡김. 두 단어 모두 현재형 명령<반복 지속 ≠ 일회적 사건. 일상생활화 임, 복음살이!).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학 2학년 때 과감히 학업을 포기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차렸다. 그때 그의 주변 사람들이 학교는 지금 다녀야 하지만 일은 졸업하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만류했단다. 빌 게이츠는 그런 반대에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판단에 계속 추진하여 결국 세계적 기업을 키워냈지요. 빌 게이츠가 말해주듯이 과감한 결단이냐 주변의견이냐 즉 집중과 포기를 빠르게 결정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충성을 오래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현명한 판단은 올바른 설득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우리 예수님의 설득을 잘 알아듣기를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우리의 믿음 삶을 remodeling할 자재를 오늘 설교말씀에서 챙기자. 예수님의 첫 설교인데(하나님의 시간! + 하나님 나라! +회개와 복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