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4일
“기뻐하노라!” (막 1:9-13 ‘하나님 아들의 삶’) 20.6.14.
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상대이하의 죄인들을 칭찬하신 경우를 여러 번 목격하게 된다. 그 중에 백부장이 있다. 군인 백 여 명을 통솔하는 로마인 장교였다. 당시 유대들은 자기나라를 점령하고 있던 로마를 미워하고 멸시하였다. 그래서 로마사람들이 성전이나 회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엄금했다.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아주 추악하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로마사람 백부장을 상대해주고 칭찬했다. 그냥 보통으로 하는 칭찬이 아니고 최고급이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물론 백부장이 칭찬받을 만한 모범신앙을 갖추기는 했다. 자기 하인의 투병을 불쌍히 여겼고 그것을 보고 우리 예수님은 감동, 감격, 감탄하였다. 그리고 즉시 이런 선언까지 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 찌어다.” 그 결과는 완치였다.
또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투병하는 여인이 있었다. 혈루증은 하혈병인데 모세 율법대로 부정하게 취급하는 불쌍한 여자였다. 성전제사에 얼씬도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여인을 상대했고 칭찬하였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물론 예수님은 칭찬해줄만한 믿음을 그 여자에게서 발견하였다.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함이라.”(마 9:21). ‘딸’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안심시켰고,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였고, 구원도 선포해주었다. 그 결과는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였다.
오늘 설교본문도 우리 예수님이 좀처럼 예상하기 힘든 일을 과감하게 하셨다고 보여주고 있지요. 9절을 함께 읽어보자.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120km<300리 떨어져 있었음. =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 3:23> 예루살렘 가까운 곳, 그렇다면 예수님은 120km<300리 길>가량 일부러 걸어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임.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헤롯 왕이 46년 동안 건축해놓은 왕궁 같은 성전이 있었음. 거기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율법사들... 넘쳐났음.)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지 않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현대교회를 통회자복 시키기에 충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음!).
조선시대에 ‘재상(宰相)’이라 하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6조의 판서들 정도를 의미하였는데, 옛 중국에 ‘반식재상’(伴食宰相)이란 말이 있었단다(짝 반, 밥 식. 밥만 먹는 무능한 신하를 조롱하는 말). 당나라의 6대 황제 현종(玄宗)을 도와 손꼽히는 국가발전을 달성한 재상은 요숭(姚崇)이었는데, 요숭은 사치를 망국의 근원으로 보고 근절시키려면 문무백관들의 호화비단의 관복을 관청 앞에 쌓아놓고 불태우고, 세금을 탕감시키고, 형벌제도를 올바로 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국토방위만 전담하는 모병제도로 바꾸자... 이러한 요숭(姚崇)의 진언을 받아들인 현종은 나라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요숭은 백성의 안녕과 평화 삶과 동시에 국가번영을 실현코자 항상 원칙을 관철하는 행정을 하였고, 국가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할 때는 신속정확하기로 어느 재상보다 앞선단다. 그래서 그 시기의 당나라 인구는 5천 3백만 명(900만 호)에 달했고, 수도 장안은 아시아 각국은 물론 멀리 페르시아, 시나이반도에 살고 있던 아랍족의 외교사절과 상인들로 북적댔단다.
그런데 그 당시 환관들을 감독하는 관리였던 노회신(盧懷愼)도 청렴결백하고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었는데, 단 업무능력이 뒤쳐졌단다. 어느 날 요숭은 아들이 요절함으로 열흘간 고향에 가게 됐다. 그래서 청렴결백 근면한 노회신이 요숭의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회신이 아무리 빨리 업무를 처리하려고 해도 요숭처럼 신속하지 못함으로 중요한 업무가 점점 쌓여갔다. 결국 요숭이 돌아와서 미뤄둔 문제들을 해결하였단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노회신을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단다.
밥값도 못하면서 때가 되면 상을 자기 몫으로 챙기는 사람들은 많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실력을 말로만 대신하곤 하여, 힘 있고 강한 상관에게 빌붙어서 한심한 아부로 눈밖에 벗어나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삶이지요. 상을 제대로 타려면 창의적인 성실함으로 결실을 내놓아야 한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이루실 사명을 분명히 파악하였고 또한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그 사명을 설교본문은 ‘세례’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4절에는 ‘회개의 세례’라고 밝혀놓았다. 좀 더 설명을 하면 교인들의 가치관과 삶을 고쳐놓고 하나님이 그렇게 순종하는 신앙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게 세례운동을 제대로 벌렸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세례 요한은 좋겠네!’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해서 좋았겠네!’하면서 부러워하고만 있을 게 아니다. 저와 여러분도 세례 요한처럼 우리 예수님이 찾아오시게 믿음 삶을 올바로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오늘 설교본문에서 무엇을 터득해야 하는가? 지금 설교본문을 함께 정독해보자.
1) 요한(9)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 앞에서 조금 설명했듯이 수도 예루살렘 헤롯성전, 으리으리 그 자체이고 화려함의 극치이며, ‘내노라’ 하는 인물들 다 모이는 대 성전을 왜 마다하시고 요단강 노천, 나대지, 세례 요한에게, 그것도 300리 길을 걸어서 오셨을까? 이 정답이 ‘복음의 시작’(αρχη아르케 beginning, head, chief, important)을 좌우하는데, 요한복음 1장 29절을 함께 보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 1:34). ‘보라’ ἴδε 이데 Behold = 감탄사.‘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ἱλαστήριον 힐리스테리온 = ‘화목제물’<롬 3:25> = ‘속죄소’<히 9:5> atonement<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심!> 마태복음은 이 모든 것을 총 종합하여 기록해 놓았다.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3-15).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바로 이 ‘보시기’에 저와 여러분도 익숙하길 축복한다! 아멘.
세종임금이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린 신하를 뽑는 과거시험에서 성삼문이 장원을 하고 세종대왕 앞에 섰다. 세종이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자, 성삼문은 “어떤 배경도 모르게 하문하시니 적잖게 실망했습니다.”라고 직언을 올리자. 그때 대전 내시가 “쉬이!”하며 주의를 주자, 오히려 성삼문은 “대전 내시 주제에 감히 신하가 임금님께 바른 말로 직언하는데 중간에 ‘쉬이!’하고 나서다니...”하며 호통을 쳤더니, 그때 세종대왕은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많이 도와 달라.”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성삼문은 그 일을 통해 ‘이러한 군왕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하겠노라.’라고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사육신으로 충성하였다는 것이다. 서로 값진 성취를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한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 삶도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만남처럼 금상첨화이길 축복한다. 아멘.
2) 기뻐하노라(11)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사랑’+‘아들’+‘기뻐’ = 100%<3가지 모두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들임. 그런데 각각 그 향기나 농도, 순수성 다 100%!> = 하나님께서 평가하신 것임! 그러니 대단한 것임).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신 게 구체적으로 뭔가? 누가복음 9장 31절에 정답이 기록되어 있다.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옳음>.”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την εξοδον αυτου 텐 엨쏘돈 아우투 그의 그 죽으심 εξοδος death, departure, a way out, exodus 출애굽. 구원길을 만들고 죽는 인생<삶>을 우리 하나님은 100%사랑! 100%아들! 100%기뻐하심! = ‘복음의 시작’(αρχη 아르케 beginning, head, chief, important)이라고 마가는 독자들에게 증언하고 있기에, 우리가 알아차리는 건 우리의 숙제를 잘하는 것이다. 아멘!
사오정 엄마가 사오정에게 신라면(辛라면) 1박스를 사오라고 시키면서, 사오정 엄마는 불안해서 사오정의 손바닥에 친절하게 ‘辛라면’이라고 적어줬단다. 드디어 슈퍼마켓에서 사오정이 손바닥에 적힌 글을 보고 슈퍼 아줌마에게 말했다. “아줌마, 푸라면 주세요.”라고. 글쎄요, 한자로 ‘辛’자와 한글의 ‘푸’자는 매우 비슷하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서로 생각이 일치할 때 대화이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루지만, 대화의 불일치는 헛소리일 뿐이다. 성경쓰기나 설교, 순종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들려온 음성을 중요시하는 게 마가는 우리에게 ‘복음의 시작’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3) 성령(12-13 말씀현장을 잘 볼 수 있도록 반드시 중계할 게 너무 많은 구절임!)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가 어떤 곳인가? 새벽이슬이 있으면 광야라 하고 이슬마저도 없는 모래밭은 사막이라고 한다. 그만큼 생존하기 힘든 곳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했다(πειραζομενος υπο του σατανα και ἦν. 페이라조멘오스 휘포 투 사타나 카이 엔 현재 수동태<being tempted(the while)-Amf- = 4o일 계속!> ‘계시면서’<ἦν. 미완료 틈만 나면 충동질! +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διηκονουν 디에코눈 미완료(continually)-Amf-).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 ‘감당할’ ‘피할 길’<고전 10:12-13>).
공자가 말씀하셨다. “시 3백편을 암송하니, 정치를 맡겼더니 맡은 바를 올바로 이루지 못하고, 또 사방에 사신으로 뽑힌들 전문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니, 비록 그 수많은 암송을 어찌 암송하였다고 하리요?”(子曰 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논어_ 자왈 송시삼백 수지이정 부달 사어사방 불능전대 수다 역해이위). 문장만 읽고 쓰고 암송하는 건 수박 겉핥기라는 거다. =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나 자신이 나침반으로 삼을 그 가르침을 골라 챙기자. 오늘 설교본문은 ‘복음의 시작’에는 ‘하나님 뜻 실현! 출애굽 하는 별세 삶! 성령님과 광야승리! 들어있다고 마가가 증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