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4일 설교
“순조로움과 역풍!” (느 2:1-10 ‘느헤미야의 신앙의식’) 20.5.24.
우리에게 아주 익숙해져 있는 유교는 공자가 창시하여 맹자와 순자로 계승되어온 큰 가르침인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잘 깨우쳐서 미풍양속의 평화사회를 이룩하자는 이론이다. 그 핵심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지요.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부위자강(父爲子綱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 부위부강(夫爲婦綱 남편과 아내 사이에 꼭 지켜야 할 도리). 오륜은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는 정의로 대해야 함),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자식 간에는 친함이어야 함),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는 구별되어야 함),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는 차례 즉 질서가 있어야 함), 붕우유신(朋友有信 친구 간에는 신뢰가 통해야 함).
사실 알고 보면 세상사물은 다 제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큰 바위는 산에 있어야 제격이고 자갈과 모래는 강이나 해변에 있을 때 그 자리가 아름답다. 사람의 얼굴에도 이목구비가 있는데, 각각 알맞게 제 자리를 잡고 있지요. 우리의 가정에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가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가 있으며, 아들딸은 자식의 자리가 있다. 사회도 선생의 자리와 학생의 자리는 뚜렷하게 구분되고, 지도자의 자리와 국민의 자리, 기업인의 자리와 농부의 자리, 공무원의 자리는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사람마다 제자리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그 사람은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는 건전하고 행복해진다.
그런데 누구든지 제자리를 올바로 알고 제자리에 맞는 언행과 생활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제자리를 망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남에게 비난을 받고 자신까지 망쳐서 자기자리를 욕되게 함으로 결국 사람들에게 멸시당해 사라지고 만다. 둘째 제자리에 있으나 마나한 무용지물이 있다. 무능한 것이요, 부끄럼을 당한다. 셋째는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위인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역할로 자리를 빛나게 함으로 영광을 이루고 그것을 아는 사람마다 칭송하곤 한다.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표현하면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우리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러한 사람들이 은혜 충만하여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에 해당한다.
오늘 설교본문도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기에 충분한 그리스도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감을 잡았을 텐데, 느헤미야이지요. 그는 바사 나라의 아닥사스다 왕 때 수산 궁 술 관원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설교본문은 술 관원 느헤미야가 왕께 술상을 차려 올리다가 생긴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인데, 같이 확인하여 보자(1-2). רַע
우리는 먼저 두 단어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수심’(רַע 라아 evil, wickedness, worthless, hurtful, sorrowful. ‘죄악’ ‘재앙’ ‘흉함’) 느헤미야의 얼굴표정이나 태도가 아주 나빴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악한 흉계를 품은 게 아니라 단지 ‘슬픔’에 잠긴 심리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지만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것은 고대왕실에서 절대 금기사항이었다. 특히 바사제국의 역사를 보면 시종이 왕 앞에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였다는 기록도 있단다. 그렇다면 이 절대 금기사항을 느헤미야가 몰랐을 리 없다. 이러한 판단은 ‘없었더니’(וְלֹא־הָיִיתִי 웨로 하이티 and not/ I had been 강한 부정을 표현함. = ‘이전에 내에게는 절대로 없었다.’)라는 말이 확실하게 입증해 준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딱 한 번 슬픈 기색을 보였던 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대한 고충으로 금식하며 잠을 자지 못한 결과였다. 그만큼 느헤미야는 고국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환난소식 때문에 큰 충격과 고민에 사로잡혀있었고, 그것을 왕에게 들켰던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선조들은 ‘풍전등화’(風前燈火)라고 표현하였다. 위기상황을 최악으로 보았을 때 한 말이지요. 그러면서 “호랑이이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속담을 남겼다.
한 소년이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기까지 해서 학교수업은 구경도 못했단다. 그러니 당연히 문맹자였고, 그의 소원은 오로지 음식을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는 14살 때 양복점에 들어가 재봉기술을 배웠고, 18살 때 구두수선공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내에게 글을 배우고, 매일 밤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더니, 40대에 들어섰을 때 그는 달변가요, 명필가로 통하였다. 그리고 링컨이 암살당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미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도력을 잘 발휘하였다. 그러한 그를 아무도 무식한 대통령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 대통령의 이름은 앤드류 존슨. 알래스카를 소련으로부터 720만 달러에 매입한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학교를 못 다녀 본 역사상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소망이 살아있는 사람은 절망상황에서도 기대하면서 노력한다. 오늘 설교본문에서 보여주는 느헤미야가 그렇게 살았다.
자 그러면 설교본문을 통하여 느헤미야를 좀 더 자상하게 살펴보면서, 풍전등화 속에서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갔는지, 그것을 배우고 우리도 시도해 보자.
1) 불탔사오니(3)
‘불탔사오니’ 느헤미야가 왕에게 대답한 말인데, 바로 그때 느헤미야의 심정은 2절 끝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무서워서 벌벌 떨릴 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함께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 6:16-19. 다 거짓과 사촌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창세기 32장에도 보면 하나님과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껏 씨름하셨다는 희한한 일을 볼 수 있다. 결국 우리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해서 절름발이 장애자로 만든 후에야 축복을 행하시고, 복수해오는 에서의 분노도 바꿔주셨다. 우리간구가 아무리 절박해도 하나님은 ‘쓰레기통에 떡을 담아주시는’ 실수를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진실은 학력문제도, 재산도, 건강도 아니다. 느헤미야는 진실함이 마음에 녹아있었다. 저와 여러분도 진실함이 흘러넘쳐나길 축복한다. 아멘.
2) 묵도(4) וָאֶתְפַּלֵּל
‘하나님께 묵도하고’(וָאֶתְפַּלֵּל 와에트팔렐 ‘So 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NKJV, GN-. 느헤미야가 그 순간에도 기도하였다는 것임). 사실 느헤미야는 기도와 인간적인 최선의 노력을 잘 조화시켜 나갔다(‘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4:9>,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5:19>,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6:9>). 이런 기록은 느헤미야가 온갖 훼방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완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이었음을 밝혀놓은 것이다.
묵상(默想:특정 대상을 깊게 생각하는 행위인데, 종교적인 관점에서 기도나 명상임. 默 =잠잠하다, 조용하다, 없다. 어둡다. 명상(瞑想)도 ‘어둡다’(暝)는 사실과 ‘생각하다’(想)는 행위를 합하여 만든 말이다. 자신이나 처지를 알지 못하면 마냥 어둡지요. 그 어둠 중에 머물러 앉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헷갈리고, 헤매고, 물어보고, 또다시 물어보다 보면 깨지고, 자기 마음에 비춰지는 빛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을 명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명상’이나 묵상은 다 기도인 것이다. 제자리에서 잘 역할 해 그 자리를 빛나게 하고 영광을 실현하는 게 기도이다. 아멘. 느헤미야가 그랬다.
3) 건축하게(5)
‘건축하게 하옵소서’ : 느헤미야는 확실한 핵심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것을 중요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공개하였을 때 부끄럽지 않는 느헤미야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도’(聖徒, 聖民, 구별된 사람들, ἁγιοις)라고 부른다. 우리 자신도 이기적인 나 자신만의 욕심위주가 아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우리나라는 여름에 덥고 겨울에는 춥다. 그 이유는 태양과 지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나라와 태양의 각도가 기울어질수록 더 춥다. 그 기울기만큼 태양의 복사열이 줄고, 태양을 등지고 있는 밤은 길어져서 기온이 내려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거리가 멀어서 사랑이 식는 게 아니라 서로 간 마음이 틀어지면 둘 사이에 벽이 생기고 어두워지고 차가워져서 얼어붙는다. 사람들이 서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잘하는 것은 서로가 마음의 기울기를 제대로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였다.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 반가움과 분노... 이런 마음들이 다 눈빛에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계신다는 사실을 늘 시인하시기 바란다. 아멘.
4) 근심(10)
‘심히 근심하더라’(וַיֵּרַע לָהֶם רָעָה גְדֹלָה ‘와이예라 라헴 라아 게돌라’ ‘근심’ = ‘수심’<רַע 라아 evil, wickedness, worthless, hurtful, sorrowful. ‘죄악’ ‘재앙’ ‘흉함’>,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막대한 비통함으로 흉하게 하였다.’ 산발닷과 도비야가 엄청나게 반대하였음을 나타낸 말이다. 두 사람의 ‘근심’은 느헤미야에 대한 미움과 시기, 훼방 등을 적대감정으로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흥왕하게’(טֹובָה 토바 agreeable, to act rightly, 창 1:31. 느헤미야가 성전재건을 통한 믿음회복을 얼마나 간절하게 사모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다(לְבַקֵּשׁ טֹובָה 러바페쉬 토바 to promote the welfare -NIV-).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마귀 짓이 뒤따른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당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
사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다른 성경저자지만 히브리어원전에는 한 권으로 묶여있는데, 이는 두 책이 시대적 배경이나 내용이 거의 같고 주제와 구조, 관심사가 놀라운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는 술관원 느헤미야가 꼭 제사장 같은 신앙의식으로 기도하면서 성전건축을 하여 믿음회복을 실현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