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0일 설교

May 10, 2020

                                                   “정말 거룩한가?” (스 10:18-25 ‘진정한 교회생활’) 20.5.10.

   이형기(1933~2005) 시인은 진주에서 태어나, 나이 17살 때 ‘비오는 날’이란 시가 시인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문예’지에 실렸는데, 그가 1957년, 20대중반의 청년시인 때 쓴 시는 ‘낙화’라고 한다. 의미상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되어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봄철 돌아와 꽃나무가 마음껏 준비한대로 꽃을 피워내고, 실컷 자태를 뽐내다가 결국 떨어진다. 그런데 꽃은 피었으면 지는 게 창조순리이다. 꽃으로 전부이면 그 꽃은 꺾인 바이요 죽은 것이다. 꽃의 일생은 낙화로, 녹음으로, 열매로, 씨로 그리고 이듬해 다시 꽃으로 돌아와서 한 살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꽃에게 필연이고 한없이 자랑이고 성숙해가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일부의 사람만 ‘실패한 없어짐’으로 보려한다. 이 실패논리로 낙화를 보노라면 끝내 서글퍼진다. 심해지면 자신의 실패와 동일시시키고 겨우 인내해오던 연단을 더 참아내지 못하고 죽음을 스스로 앞당기고 만다. 그런데 이형기 시인은 24살 나이에 인생의 매듭을 만들기 위해 최고의 인기를 접는 그 낙화의 뒷모습은 인생사의 이별과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사별로까지 이뤄지지만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과정인 것을 통찰하고 노래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없어짐의 아픔’을 관조시켜주는 여유와 지혜를 주고, 인생의 철이 드는 성숙을 맛보게 한다. 꽃나무의 ‘개화 → 낙화 → 열매’는 인생의 ‘만남 → 이별 → 예비한 더 큰 만남’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없어짐의 아픔을 통한 성숙을 이루는 지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8-19). 지금 우리가 함께 읽어본 말씀은 바벨론 포로귀환자 중에 이방인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파혼하기로 맹세한 일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하는데, 그 명단(114명)을 전부 밝혀놓았다. 좀 더 설명을 붙이면 이방 아내를 다시 ‘내보내기로’ 한 것은 그들이 제사장 에스라의 신앙개혁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음을 보여준다(마치 마 6:31-34<“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일치!).

   이 동참결단을 밝히 보도록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이스라엘 포로귀환자들이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일을 제사장 에스라가 알게 되자, 에스라는 과감하게 개혁조치를 시행했다. 이스라엘의 성민회복을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게 하려면, 단지 눈에 보이는 성전재건만으로 완료되지는 않는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임재의 상징적인 처소이었기에 하나님백성의 신앙구심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본문은 이스라엘국민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성결회복까지 진행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기 때문에 굉장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일은 신앙지도자와 일반국민이 하나 되는 협력공동체를 잘 이룸으로 가능해지는 일이었다.

   우리는 ‘믿음’과 ‘고집’을 혼동하는 교인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물론 이 둘은 비슷한 점도 있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전혀 반대이다. 다른 성도가 볼 때 분명히 ‘고집’인데도, 본인은 ‘믿음’이라고 철썩 같이 확정하며 초지일관하는 교인들이 있다. 믿음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언약성취로 인도하고 결국 기도하는 성도들이 이해와 존중으로 대하게 한다. 그렇지만 고집은 시간이 갈수록 빗나감을 보여주고 먼 훗날 억지와 외톨이, 낙제로 끝나고 만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결단하는 삶은 항상 ‘좁은 문’이다. 그런데 좁은 문이라고 하니까 마음과 사고방식까지 좁아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작 좁은 문으로 가야할 상황에서 대문으로 활보하고, 굳이 그렇게 근시안으로 보지 않아도 될 일에 너무나 근시안으로 집착하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우리 예수님은 그러한 교인을 가리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위선자라고 책망하셨다. 타협하지 않고 확고부동한 신앙태도는 정말로 필요하지만, 자칫 그게 앞뒤로 꽉 막힌 옹고집일 때 협력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애간장을 녹이는 방해꾼이 된다는 것이다.

   어촌에 살고 있던 어린 소년은 늘 바닷가에서 놀다가, 어느 날 물새알을 주워 집으로 갖고 왔다. 소년의 어머니는 물새알로 맛있는 반찬을 해주었다. 그래서 소년은 바닷가에서 놀기보다 물새알을 찾아 헤맸다. 하루는 빈손으로 돌아오는데 길가 집에서 닭이 요란하게 울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암탉이 알을 낳고 울었다. 소년은 그 달걀을 들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달걀 후라이를 해 주었다. 다음날부터 그 소년은 바닷가를 헤매지 않고 남의 집 달걀만 찾았고, 점점 익숙해지고 대담해져서 규모도 커지더니, 결국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었다. 사형장에서 그가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어머니, 내가 처음 물새알을 주워왔을 때 그 ‘물새알’은 주인도 없고 아무 잘못도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도난당한 그 물새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알을 찾고 있을 것을 설명해 주셨더라면, 그때 저는 도둑질 심리의 싹을 자르고 오히려 남을 배려하는 인간으로 자랐을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실현이란 내게만 좋고 빠르며 편리함 일색일까? 아니다. 불편하고 더디며 복잡할 때도 많다.

   자 그러면 잘라냄의 아픔을 통한 성숙을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그 모습을 설교본문에서 좀 더 배우자.

   1) 제사장(18)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이 말씀은 이방인 여인과 결혼하고 다시 파혼하기로 맹세한 제사장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설교본문에 1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총 114명 중 18명은 15.7%이다. 그런데 레위인 6명, 노래하는 자 4명 모두 28명(24.6%)이다. 성전봉사자들이 1/4가량 공개적으로 탈선을 하였던 것이다.

   교회의 중직자라고 해서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게 아니다. 교회의 중직자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그들도 연약함이나 범죄의 가능성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아주 막중한 사실이 있다. 사탄은 교회의 중직자들을 더욱 집중해서 유혹한다는 점이다. 중직자의 타락은 그 한 사람의 병으로 그치지 않지요. 중직자의 타락은 그와 관계된 인간에게 다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3장 1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 말씀은 교회의 선생을 하지 ‘말라’에 강조점을 둔 게 아니다. 그 영광만큼 가르치는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것이다. 책임지는 신앙생활에 익숙해 가길 축복한다. 아멘.

   2) 내보내기(19)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이 말씀을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에 합당하게 읽어보면, 눅 19:8-9와 일치함을 알게 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회개기도의 생활화가 그토록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연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곰곰이 생각해보자. 바벨론포로 귀환자들이 사로잡힘을 당하였다. 무엇이 그들을 사로잡았는가? 그것은 바로 죄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슬러 이방인 아내를 취함으로 죄에게 종노릇 하였고,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대상으로 둔갑하였다. 그럴 때 제사장 에스라가 지도하는 회개운동을 따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들로 회복되었다.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 이다.”(12절). 그런 후에 이방인 아내와 소생을 이스라엘에서 내보낸 동시에 이방인들과 교제도 단절하였다. 이렇게 하는 게 올바른 회개라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ητε γαρ ποτε σκοτος νυν δε φως εν κυριω ως τεκνα φωτος περιπατειτε 페리파테이테 light in the Lord. 주님 안에 있는 빛 / as children of light( ως 호스 like as, according as. 똑같다. 기준 삼음).

   중국속담 중에 ‘정월은 가장 큰 거짓말쟁이’라는 게 있단다. 사람들은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나름대로 결심을 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그게 계획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하였지요. 실제로 우리도 새해가 되면 몇 가지 결심을 한다. ‘금연하겠다’ ‘거짓말을 안 하겠다’ ‘새벽기도를 하겠다’ ‘전도를 하겠다’... 아마 한 번씩 경험하였던 일일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하고 다시 반복한다. 하지만 성경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자상하게 보여주고 있고, 시몬이 시몬 베드로로, 시몬 베드로가 베드로로 변해가는 모습도 길게 기록하여 놓았다. 아름답게 변화됨을 예수교의 핵심이요 영성이며 영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속건제(19)

   “속건제를 드렸으며” 속건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부지중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드려졌다(“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레 5:15).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방인과 통혼할 때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했다가 제사장 에스라가 지적하니까 죄로 시인하고 속건제를 드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방인의 결혼을 파혼하는 것과 속건제는 둘이 아니라 한 가지였다는 것이다. 즉 결혼한 이방인들과 파혼하고 돌려보낸 그것을 이스라엘제사로 표현하면 속건제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와 실제 삶을 일치시켰음을 보여주는 바인데, 이것은 말로만 변명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실제 삶으로 입증하였던 것이다. 아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ελεγκω he will convince. -RSV-). 생각나고 확신될 때 예배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을 듣는 동안에 하나님이 저울로 우리자신을 재어서 보여준 그것을 챙기자.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올바른 자녀는 분명히 잘라냄의 아픔을 통한 성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중직자인데도 잘라내고! 생활로 잘라내고! 생각났을 때 곧바로 잘라낸다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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