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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16일 설교

“하나님 기적의 현장!” (스 6 : 1 – 11 ‘강행되는 성전건축’) 20.2.16.

2002년 월드컵축구는 대한민국에게 ‘4강 신화’라는 신바람 나는 용어를 만들어주었다. 그때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수석코치가 박항서 씨였다. 그는 베트남 지휘봉을 잡은 다음 대회마다 탁월한 성적을 거두더니, ‘박항서 열풍’으로 베트남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아시아축구연맹 23세 이하(U-23) 챔피언십 준우승,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위(본선진출이 최고성적), 2018년 스즈키컵 우승(2008년 우승, 10년 만에 우승), 2019 SEA게임(11개국) 우승... 이런 성적은 베트남으로선 거의 기적이었다.

베트남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121위로써 약체인데 94위까지 상승했단다. 박항서 감독은 2017년 10월, 연봉 3억을 받고 베트남에 갔더니 베트남 축구팬들이 유럽이나 남미에서 감독님을 모시지 않았다며 불평하더란다. 그래서 그는 취임 기자회견 때 “나를 선택한 베트남 축구에 내가 가지고 있는 축구인생의 모든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쏟아붓겠다.”라고 밝히고, 베트남축구를 조사 분석한 후에 축구기술보다도 선수역할에 대한 이해부족을 깨우쳤고, 그러고 선수들에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근면성실성, 배우고 책임지는 자세, 예의바름과 애국심을 계속 설득시켰었다고 한다. 지금 베트남 국민은 박항서 감독에게 ‘베트남의 히딩크’ ‘쌀 딩크’ ‘덕장’(德將) ‘국민 아빠’ ‘쯔놈 박항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는데, ‘쯔놈’은 베트남어로 ‘스승님’이란 뜻으로 웬만큼 존경받는 위인이 아니라면 호칭을 붙여주지 않는 굉장한 극존칭이라고 한다.

박항서 감독은 매일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는 집사님이고 그의 아내도 교회의 권사님이라고 한다. 원정경기 때는 항상 교우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단다. 그는 베트남에서도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고, 늘 초심을 잃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한단다. 경기 중에 박 감독이 기도하는 모습을 여러 번 TV로 볼 수 있었고, 베트남 사람들이 “박 감독이 예수 믿는 사람이냐”라고 묻고,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어쩐지!”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는 성경에서 어떠한 생활인으로 보여주고 있던가? 그들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실현을 확인하고 항상 관심갖고 동참하곤 한다. 사실상 이것을 순종이라 하고 또 믿음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 순종하는 믿음을 오늘 설교본문에서 제대로 목격할 수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 오늘 설교본문은 바벨론포로 귀환자들이 성전건축을 진행하다가 사마리아사람들이 하도 훼방해서 16년 동안 중단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희한하게 바사 왕 다리오가 성전 재건축을 엄명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다리오 왕의 엄명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건축경비를 끊임없이 지급하라(8 下). 둘째, 번제물을 요구한대로 날마다 공급하라(9). 셋째, 다리오 왕의 엄명을 변조하면 자기 집 대들보에 교수형을 집행한다(11). 이 세 가지 중에서, 작다고 할 수 있는 게 어느 것인가? 건축경비인가? 날마다 번제물을 공급하는 일? 아니면 교수형인가? 아무리 부자라도, 배짱 넘치는 사나이도 뒷걸음질 하게 하는 일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여 년을 살다가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갔는데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체험하였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바로 왕을 꺾느라고 10가지 기적과 홍해, 메추라기 기적, 반석 샘물 기적... 그런데 모세가 12명을 선별하여 가나안 땅 정탐을 보냈더니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우리를 위한 ‘여호와 이레’라고 보고하였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말로 불가능한 사실을 한 가지도 보지 못했을까? 그분들은 진짜 편리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다! 편리함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실현으로 판단했던 신앙관을 가졌던 것이다. ‘편리함 = 은혜’라고 생각하는 신앙관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제시킨 ‘내 생각’(내 집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겨대기 일쑤이다. 오늘날 교인들의 위험신호는 예배 중에 강 같이 넘쳐나는 은혜를 받지만 곧바로 자기고집이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댄다는 것이고, 소프라노 테너로 아-멘 하지만, 엿새 동안은 세상풍조라는 늪에 빠져 맥을 못 춘다는 것이다.

우리의 순종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하고 천국에 도착할 때까지 순종하며 헌신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엉뚱하고 말도 안 되어 보일 때가 많다. 배를 만드는 일에 120년간이나 끈질기게 배를 짓던 노아를 생각해 보면 납득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종이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스라엘 백성이 한 주일이면 통과할 수 있는 길을 40년 만에 겨우 도착하였다. 그 이유는 순종과 감사를 매번마다 이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순한 교인은 예배당에서 만들어질지 몰라도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은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훈련감독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무정과 야속으로 일관하셨다. 구름기둥 불기둥, 미리암의 문둥병, 아론의 옷 벗기기, 모세의 가나안 입성금지... 좀처럼 봐주지 않으셨다. 왜 그렇게 엄하셨을까? 그래야 믿음의 법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속담이 있다. 물을 조금 붓더라도 밑이 막힌 독이라야 그 물을 간직하고 그 물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은혜나 축복, 응답도 똑같다. 오늘 설교본문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법칙에 안성맞춤이었음을 보여준다!

자 그러면 그 안성맞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배워서 활용해보자.

1) 하나님의 성전(3)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이렇게 성전을 표현하는 것은 다윗 왕이 계획준비하고 솔로몬 왕이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였을 때 우리 하나님이 불로 응답하셨던 모리아 산 성전을 말한다(‘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대하 3: 1). 한 마디로 우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 점에서 가장 모범이요, original 성전이었다. 그런데 3절에 기절초풍할 말씀이 있다. ‘제사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이방인 바사 왕이 어떻게 이 비밀한 성막법을 알아냈을꼬?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도 몰라 즉사하였다. 그래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한심한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법칙에 합당하면 하나님은 창조수준으로 도우셨음을 성경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부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응급실로 실려 갔다. 응급진단을 끝낸 의사가 아내에게 말했다. “남편께서는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곧바로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러자 회장님 부인이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 돈 걱정은 말고 제일 좋은 뇌로 이식해 주세요!” “과학자의 뇌로 하면 3,000만 원입니다.” “그게 제일 좋은 건가요?” “아닙니다. 대학교수의 뇌는 5000만 원입니다.” “그럼, 그게 이 병원이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정치가의 뇌는 1억 원입니다.” “아니, 그 뇌는 왜 그렇게 비싸죠?” “그 뇌는 거의 사용한 적이 없어서 새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그런답니다.”

참으로 올바른 뇌사용은 하나님의 것을 알아내고, 하나님의 법에 맞는지 점검하고, 하나님의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법에 합당하게 믿음생활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제자리(5)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지니라.’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차리려면 1:7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다’ = 느부갓네살 왕은 승리확신 행위이고 자랑이었음).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이 보실 때 예루살렘 성전기구들은 죽은 역할을 하고 이었고 ‘사명 감당 zero!’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지니라.’ 사명 감당 zero!를 생명으로, 창조로, 충성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게 ‘주여 삼창’보다 100번 더 낫은 명품회개이고, 순종이다. 아멘!!!

뷔페식당에서 아이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뛰어다녀도 부모들은 그냥 보고만 있더란다. 심지어 한 애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뒤적이기까지 하는데도 그 부모는 충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애들의 부모들이 자리를 잡고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하는 말이다. “아직 목사 안 왔어?” 목사님도 아니고 그냥 ‘목사’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 그들의 말대로 ‘목사’가 왔다. 그러자 180도로 태도를 바꾸더란다. “아이구, 목사님 오셨습니까?” 꾸벅 으로...

그러고 다시 옆자리의 손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소리며 웃음소리로 자꾸만 옆 좌석을 방해하더란다. 여전히 아이들은 무질서한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바로 옆 좌석에서 식사를 하던 50대 중반쯤 되어보이던 두 신사 양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하는 말이 “아유! 저렇게 예수 믿는 놈들, 제발 없어졌으면 좋겠어.” 집사님이나 권사님의 역할은 꼭 예배당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엿새 동안도 전도되게 언행을 해갈 때 교회직분을 여전히 살리는 임마누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인 것이다. 아멘.

3) 향기(10)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נִיחוֹחִין 니호힌 satisfying, pleasant, delight = 번제, 소제, 화목제<레 1:9, 2:9, 3:5> = 조건은 안수하여 죄 사함<레 1:4> נִרְצָה 니르차 it shall be accepted<satisfied, delighted, pleased> הצר 라차 수동태 כַפֵּר 카페르 cover, purify, forgive). 그렇다면 다리오 왕이 조서에 적어둔 ‘향기는 인간의 후각이나 시각, 촉각을 즐겁게 하는 그러한 향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시켜서 죄를 덮어주고 하나님께서 끊어주시게 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다리오 왕은 자신과 왕자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으니, 죄 사함 요청이요 중보기도 요청이었다. 거꾸로 전도를 호소해 왔으니 우리 하나님도 놀랠(?) 일이었다!

인종차별이 심하였던 때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마침 거지처럼 보이는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은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좀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지만 역시 비정하게 거절당했다. 그 인디언은 몹시 시장하였고 갈증도 심했는지라 마지막으로 물 한 컵을 달라고 사정했더니, 그 신사는 “너같이 지저분한 놈에게 줄 물이 어디 있겠냐?”하면서 내쫓아버렸다. 인디언은 통곡하는 심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며칠 후 그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두워지는데, 허기지고 갈증 나 쓰러져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인디언이 신사를 엎고 자기 집으로 가서 대접해주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며칠 전 자기가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인디언이 한 마디 했다. “내가 당신처럼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죽었을 걸...”

생명을 살리는 게 예수교의 향기이다. 이 향기를 낼 때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게 돕는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교훈을 챙기자. 성전건축 현장의 안성맞춤(제사 드리는 처소! 살리는 역할! 죄 용서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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