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9일 설교
“대답을 갖추자!” (스 5 : 6 – 16 ‘충직한 믿음의 중심’) 20.2.9.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와 나눈 대화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낫기를 원하나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이 말씀을 하자마자 당장 그 환자는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정황을 좀 살펴보면, 38년 동안이나 투병해오다 들것에 들려왔던 중환자에게 예수님은 ‘너 혼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 보라.’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그 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걸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군인이었던 백부장이 이 말씀기적의 비밀한 이치를 깨알아 알고 즉시 활용하였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하인의 병을 고쳐주려고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럴 때 백부장이 “말씀으로 끝내십시오.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나도 상관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는데요, 그들에게 내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백부장의 설명을 들으시던 예수님이 감탄하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신 그 시각에 그 하인이 나았다고 하였다(마 8:13).
여기서 자문자답을 해보자. 예수님을 감탄시켰던 백부장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말씀의 사건화(막 11:22-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약으로 처방을 내리지 않으셨고 대화를 치유의 방편으로 삼으셨다. 그렇다면 기도나 예배, 찬송, 봉사, 헌신 중에 ‘살리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음이고, ‘죽을 거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인 것이다. 아멘!
오늘 설교본문도 우리 예수님을 감탄시킬 대화를 여러 차례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8. 바벨론포로 귀환자들이 성전건축을 진행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집요하게 훼방하자 결국 16년 동안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한 그 현장을 보여주는 말씀임. 좀 더 설명을 하면, 유브라데 강 지역을 통치하던 바사제국의 총독 닷드내 일행이 성전건축 그 현장을 시찰해본 소감을 적어놓은 게 오늘 설교본문임. 그렇다면 고위급 행정관이지만 불신자들의 소감인 것임. 소감의 핵심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 ‘큰 돌을 세우며’ ‘부지런히’ ‘형통’<צלח 찰라흐 to pass over. prosper, accomplish prosperously. ‘빈틈없이 잘 진행되어 가고’ -새번역- ‘The work is being carried on with diligence and is making rapid progress under their direction. -NIV-’>으로 요약할 수 있음. 아무튼 성전건축은 훼방 속에서도 계획한대로 일사분란하게 척척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임. 이런 게 하나님의 특별은혜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음).
무엇을 설명하려는 이야기일까요? “코가 일어나 말했다. ‘여러분,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운 때에 우리 중에 혼자만 먹는 못된 백수가 있습니다. 바로 제 옆에 사는 입인데, 그 놈은 자기 하고 싶은 말은 혼자 다하고, 음식은 혼밥만 합니다. 이런 의리 없는 놈을 어떻게 할까요?’ 발이 맞장구쳤다. ‘저도 입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 주인이 얼마나 과체중입니까! 그 몸을 몸짱으로 만들겠다고 아침마다 뛰어대니 내 발바닥은 충격으로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하고 생각해 보니 저 입이 혼자 처먹어 대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자 손이 말했다. ‘게다가 입은 건방집니다. 먹고 싶으면 개나 소처럼 저 혼자 처먹으면 되는데, 입은 꼭 나에게 이거 갖다 달라 저것도 갖다 달라 심부름시켜서 자기만 먹습니다. 이제 속이 상해 견딜 수 없습니다.’ 눈이 결론을 지었다. ‘이렇게 비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합시다. 이제부터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입 혼자 알아서 하라고 놔둡시다.’ 그러자 눈 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래서 당장 그날부터 입은 굶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자 코는 사방에서 풍겨오는 음식냄새 때문에 미칠 지경이고, 눈은 괜히 앞이 가물가물해지고, 손과 발은 후들후들 떨렸단다.
그러자 침묵하던 입이 말했다. ‘여러분! 이러시면 우리 함께 죽습니다. 제가 저만 위해 먹었습니까? 오히려 여러분을 위해 먹은 것입니다. 먹는 일도 힘듭니다. 때로는 입술을 깨물고, 혀도, 돌도 깨뭅니다.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봅시다.”
이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필요성과 위대함에 대한 설명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하나님의 자녀들이 화목공동체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는 게 아름다움이고 수준 높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바벨론포로 귀환자들이 중단된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하면서 그렇게 하였다.
자 그러면 성전건축의 현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자신에게 필요한 충고를 챙기자.
1) 하나님의 종(11)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이 말씀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정체성을 불신자들에게 당당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답하는 현장을 자세히 보자. 이름을 묻고 있다(10 ‘이름을 물은 즉’ 이름이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단다! 스룹바벨, 예수아, 학개, 스가랴... 본 이름은 다 있었다). ‘천지를 통치하는 하나님’이라는 대답은 바사 나라의 행정관들에게 다분히 전도되는 기회였다.
어느 독일교회의 찬양대원들이 주일찬양연습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어린이가 지휘자 앞으로 다가왔다. 지휘자는 그 어린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지휘자님, 저도 찬양대원으로 찬양하고 싶습니다.” 지휘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우리 찬양대는 어른반이라서 어린이는 받아들일 수 없단다. 네가 아무리 찬양을 잘한다고 해도 지금은 너를 찬양대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구나.”
꼬마 아이가 당돌하게 지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휘자님, 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쓰시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이곳으로 왔는데요.” 지휘자는 그 어린이를 찬양대원으로 특별히 발탁하였는데, 이 당돌한 아이가 먼 훗날에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창작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였단다. 신앙관을 당당하게 행동할 때 홍해도, 요단강도 갈라졌다. 아멘.
2) 노엽게(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치욕적인 역사를 솔직하게 시인했던 말이다(‘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7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1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왕하 25:1, 7, 9, 11, 12>. ‘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24: 18-20>,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23:37>). 이렇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를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라고 과감하게 밝혔던 것이다.
인디언 추장이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인생살이의 이치를 깨우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 늑대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인데 그 놈이 가진 것은 분노, 질투, 걱정, 비관, 자기 동정, 죄의식, 열등감, 거짓, 우월감, 그리고 탐욕이란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선한 늑대인데 그 친구는 평안, 기쁨, 소망, 인내심, 친절, 아량, 사랑, 진실, 겸손,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있지. 이 늑대싸움은 네 마음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손자가 할아버지께 물었다. “그러면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가 쉽게 대답하였다. “자기가 먹이를 많이 주는 놈이 이기지.”
사람의 생각은 누구나 끊임없는 줄다리기이다. 탁월한 아이디어는 당연하지만 매번 올바른 법칙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고 필요하다. 매번 올바른 법칙을 선택하려면 훈련을 요한다. 훈련이란 게 다른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익숙해 가는 것이다. 훈련 중에는 누구나 실패를 거듭한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시기를 훈련해 가길 축복한다. 아멘.
3) 제자리(15)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이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일본놈들이 약탈해간 우리나라 유물을 돌려준 것 봤는가? 영국, 스페인 프랑스가 훔쳐간 아프리카 유물들이 자기나라 박물관에 버젓이 진열해 놓고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강탈해간 성전비품들을 돌려보내주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고, 귀한 일로 평가하고 그 일에 동참한 게 성전건축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에게 친구 목사님이 물었단다. “자네 교회의 교인 수는 얼마나 되나?” “5,000명쯤 되지.” “그러면 교회 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교인은 얼마나 돼?” “대략 1,000명 정도.” “그럼 자네 교회는 실업자가 4,000명이네.”
테러 분자가 레바논의 미 해병대 본부를 폭파하여 200명 넘게 전사하고 생존자는 16명뿐이었다. 미 해병대 사령관 폴 켈리(Paul Kelley)가 즉시 달려가 특별히 온 몸에 호스를 여러 개 꽂고 있는 병사에게 켈리 장군이 옆에 가서 자기가 사령관 켈리 장군이라고 말했더니 앞을 못 보는 그 해병은 손을 내밀어 장군의 어깨를 더듬어 계급장의 별을 하나씩 만져서 장군을 확인한 후에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는 시늉을 하기에 간호사가 종이판을 들고 손에 연필을 쥐어주었더니 Sempre Fi까지 쓰다가 힘이 없어서 연필을 놓아버렸다. Sempre Fidelity! 항상 끝까지 충성하자! 라는 말이었다. 그 순간 해병대 사령관도 울고 말았단다. 이런 게 ‘제자리로 돌리기’이고, 단단한 것을 먹는 믿음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의 핵심에 딱 맞게 저와 여러분의 믿음중심을 맞추자. 오늘 설교본문은 성전건축을 재시도하는 현장이었다. 한 마디로 충직이었다. 하나님의 종 인식! 올바른 역사인식! 제자리 돌리기 동참! 자주 생각나는 축복을 누리길 바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