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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6일 설교

“깨달아집니까?” (막 6:45-52 예수님에 대한 인식’ 20.12.6)

지금 다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빈 들판에서 해는 저물어 가는데 2-3만 명이 예수님께 설교를 듣다가 저녁밥을 굶게 되었지요. 배고픈데 어둠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를 할 만큼 예수님을 열심히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광신적이라고 할 만큼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따라가도 어둡고 배고픈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모시고 가던 배도 풍랑을 만났다.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의 설교를 찬성하고 빠져들 지라도 항상 배부르고 편안한 일만 생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배고픔과 어둠을 당해도, 예수님을 모시고 가다 풍랑을 만나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기다리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 맛 볼 있다. 이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믿음생활이다.

찬송가에도 445장 1절에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살아가다 보면 태산을 넘어가게 되고,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지요. 그런데 진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를 체험하고 찬송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절에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라고 찬송한다고 고백해 놓았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태산을 넘고, 험곡에 가고, 캄캄한 밤길도 당해서 어리석은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이 길 되실 판단과 선택을 할 줄 알아야 그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두려움을 고쳐주려고,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아들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엄마, 바깥은 지금 깜깜해서 무서워요.” “아들아, 밖에도 예수님이 계시는데 뭐가 무섭다고 그러니? 예수님이 너를 지켜주실 거야.” “정말로 밖에 예수님이 계신다고요?” “그럼 그럼, 예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까 우리의 주님이시지. 특히 우리가 힘들 때 틀림없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주님이시지.”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방문을 살짝 열고 틈새로 말했다. “예수님, 거기 계신다면서요. 빗자루 좀 갖다 주실래요?” 바로 이 아이처럼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이 의외로 흔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 전지전능하심에 참여하여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몽땅 다 해주시기만 바라고,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부려먹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 궁금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하였던 사람은 누구나 한없이 생생한 감탄감동 뿐이었는데 왜 그렇게 그 자리를 당장 떠나야 했는지? 또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뱃길인데도 왜 풍랑에 시달렸는지?(‘재촉하여’αναγκαζω 아낙카조 to compel, force. ‘강압하여 시키다’) 하나 예수님은 야간산행을 하셨다가, 밤 사경(밤중을 넘기고 새벽)에야 제자들을 구출하시려고 오신 것도 이상하다. 그것도 호수 위로 걸어서 오실 정도로 황급하게! 제자들과 군중은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실감나는 그 감동감화 감사에 푹 빠져 있고 싶었는데, 예수님께서 ‘즉시’ ‘재촉하사’ 오병이어의 기적현장을 억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문을 쏟아지게 성경을 기록해가던 마가는 결정적인 그 대답을 52절에서 하고 있다(“이는 그들이 떼시던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 ‘이는’ = γαρ 가르 because, ‘그 떡 떼시던 일’ = 5병2어의 기적, ‘깨닫지’ συνιημι 쉬니에미 understand, comprehend throughly, ‘둔하여졌음’ πωροω 포로오<πωρος stone> to harden feeling, unimpressible, insensibility. ‘졌음’ = ἦν 미완료)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제자들은 의심까지 갖고 있는 작은 믿음이었는데, 5병2어의 기적 때 고치지 않았다고 밝혀놓았음!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도 예외 없이 그 5병2어 현장을 당장 미련 없이 떠나게 하셨다는 것임>.

중요한 것은 ‘깨달음’(συνιημι 쉬니에미 comprehend throughly)이었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내용을 암기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다(8:19-21). 그 5병2어 때 반드시 봐야할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αναβλεψας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ευλογησεν και κατεκλασεν τους αρτους και εδιδου τοις μαθηταις looked up to heaven, gave thanks to God. He broke the loves and gave them to his disciples to distribute –GN- 창조주 예수님을 보여주었다(‘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떡들 5개> 이 3동사는 1회적<Aorist>, 제자들에게 ‘주어’<εδιδου διδωμι 미완료 giving> 출 14:30-31, 15:16, 수 3:17, 10:13 기적 진행 중 까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했음!). 엄청난 5병2어 기적을 목격하고 감동 감탄했지만,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 그래서 그 예수님이 또 다르게 창조권능으로 위로 걸어오셨을 때 제자들은 일제히 유령으로 판단했다. 이런 현상은 12제자들만 아니라 현재도 비슷하다. 현대인들이 지식부족으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깨닫지 못해 좁은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신 분이 바로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심 깨달으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아멘! 할렐루야!”로 환영하게 된다. 아멘!

자 그러면 깨달음을 방해하는 요인을 설교본문에서 함께 찾아보자.

1) 인본주의(46).

예수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종료하신 직후 그 현장에 아무도 남아있지 못하게 다 쫓아 보내시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요한복음은 추대 때문이라고 밝혀놓았다(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5병2어의 기적을 체험한 큰 무리가 만장일치로 추대한 왕은 하나님의 뜻을 망치는 일이었다. 신앙은 선동도, 흥분도, 억지강요도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황급히 전부 해산시켰던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왕으로 추대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유혹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거절로 일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은 인본주의로 지지한 인기나 성공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선동과 인기를 통해 성공을 이루고 은혜로 둔갑시키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불법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혀지는 곳은 심판대이다. 심판대가 춤판이 되기 축복한다. 아멘.

한 세대가 지나자 종교개혁은 본래의 열정을 잃게 되더니, 목회자들은 예배의 본질보다 형식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과 더욱 간격이 생겨났다. 신자들은 교회당 아래, 위층에서 침을 흘리며 졸기도 했고, 성탄절에 어떤 목사는 마구간 만드는 법을 설교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교리 논쟁은 끊이지 않았단다. 그래서 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면 되지 행위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생활에 대항해 신앙을 실생활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외치는 신학자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게 독일의 경건주의 신앙운동이었고 우리나라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삶을 무시한 믿음풍조에 쓸리고 있다. 만장일치나 유행보다도 성경의 가르침을 살리는 신앙생활에 쏠리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사람의 자만(48)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힘겹게 βασανιζομενους 바사니조메누스 βασανιζω 바사니조 현재 분사 수동태 계속진행을 당하고 있는 모습! to examine<try by torment, disease, toss>). 제자들이 돌풍을 만나 12명이 혼신을 다하는 모습을 보게 한다. 제자들이 자력으로 해결하려고 힘겹게 노 젓는 것은 ‘근면’이요 ‘열심’이지 흉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밤 사경쯤’이라는 말이 상당히 오랜 시간 혼났음을 말해준다. 문제는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시간 동안 기도하셨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과 그것에 순종함을 방해하는 핵심 중 하나가 사람의 자만이다. 사람이 자만에 빠지면 기도도 예배도 봉사도 보이지 않게 된다.

소년이 10살 이전부터 아버지의 돈을 노상 훔치더니 14세 때 어머니가 별세하시던 날도 음주도박을 하였다. 16살 때 여관숙박비를 떼어먹고 도망치다 붙잡혀 1달간 감옥살이도 하였다. 그러다 신학생이 됐지만 추악하고 음란한 죄악행위는 여전하였다. 그러다가 20살 때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성령에 사로잡혔다. 그 후로 10만 명이 넘는 고아를 돌보았고, 200명 넘게 선교사를 후원하였다. 지구를 8바퀴 돌만큼 32만Km, 42개국, 300만 명 넘게 복음을 전했다. 그가 기도하면 빵을 가득 실은 수레가 고아원을 찾아왔다. 그렇게 5만 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았단다. 그는 죠지 뮬러(George Muller) 목사님이었다. 죠지 뮬러는 성령님을 만나고 평생 동안 사람에게 손 내밀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 해결했다고 한다. 아멘.

시 107:9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했고, 약 4:8에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하나님과 친함은 더욱 중요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성도가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을 잘 알아차리게 된다. 아멘.

3) 육의 심령(5 0)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 대화하셨을 뿐만 아니라 밤바다 같은 풍랑 때문에 제자들이 기진맥진하는 것을 보고 듣고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고 예수님은 사경쯤 사투하던 제자들을 구출하러 물위로 오신 것이다. 그때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알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난리판 제자들을 지나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48 ηθελεν παρελθειν αυτους 에셀렌 파렐세인 아우투스, 직역하면 ‘그가 그들을 지나가기를 원하고 계셨다. <παρα 파라, ∼곁에> + <ερχομαι 에르코마이, 가다> = 어떤 대상 곁을 통과하여 지나가다. 그런데 우리 한글 개정판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αυτους 아우투스그들을’이라는 뜻임으로 예수께서 난리판에 허덕이던 제자들지나치려 하였음).

예수님을 몰라보는 조급한 성격, 자기생각만 고집하는 이기주의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신 밤 사경을 감사할 수 없다. 우리도 밤 사경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내 스스로 앞장서 설치는 바람에 일이 실타래처럼 꼬인다. 그럴 때 예수님이 유령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찾아오신 밤 사경이 늦은 것 같아도 정답이다. 우리가 아무리 떼쓰고 주님을 협박하며 기도해도 주님은 시간을 바꾸시지 않는다. 우리가 결단하고 순종하는 법을 깨우치시려고 밤 사경에 오신다. 내일도 올해도 ‘주님의 시간표인 밤 사경의 이치’를 알아차리고 기다리며 체험하자. 아멘.

어떤 분들은 “예수 믿으면 풍랑을 만나지 않는다!”라고 설교하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전체의 일부분이다. 세상과 짝하고 살아가면 그 사람을 세상이 방해하려고 하지 않지만, 성경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면 그 성도를 세상이 괴롭혀서 넘어지게 하는 법이다. 그래서 주님이 명령하시고 재촉하신 뱃길인데도 풍랑이 심하게 방해하였다. 그런데 그 풍랑해결은 예수님께 있다. 하지만 인본주의자만, 의 사람은 기름과 물처럼 예수님과 통하기 어렵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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