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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31일 설교

“구원을 얻게! (행 27:27-37, 44 “송구영신”) 20. 12. 31. 11:30.

오래 전에 개척교회에 여자 집사님이 등록하였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8년차 반신불수 장애자였다. 누워서 밥도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했다. 집사님은 가락시장에서 배추시래기를 주워서 삶아 팔고 그렇게 살아갔다. 그런데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교회가 피아노를 사기로 하였습니다. 피아노 값을 마련하기 위하여 은행계좌를 만들었습니다. 한 푼이라도 돈이 생긴 대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피아노를 살만큼 돈이 모아지면 구입하겠습니다.” 교인들이 200원, 1000원, 2000원씩 입금하였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다. 목사님의 식사대접이 문제였다. 가난한 그 집사님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신청하였는데, 난감해진 사람은 목사님이었다. 사실 그 집에는 고기라고 멸치 8마리뿐이었다. 두 분 목사님을 모시고 그 집으로 갔다. 국수를 끓이고 강사 목사님 국수에 멸치 5마리, 담임 목사님 국수에 멸치 3마리를 올려놓았다. 강사목사님은 감격하여 울면서 축복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 장사가 점점 잘 됐다. 처음으로 몇 원을 벌자, 피아노헌금 10,000원을 처음으로 하고 이것저것 쓰고 나니 1,000원이 남았다. 그는 1,000원으로 무심코 복권을 한 장 샀다. 그리고 그날 수요기도회 때 목사님께 말했다. “목사님, 오늘 1000원이 남아서 복권을 하나 샀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그랜드 피아노 한 대 사요. 그래도 돈이 남으면 교회도 이사해요.”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그 복권을 성경에 넣어두었다. 며칠 후 집사님이 시장에서 일하던 복장 그대로 허겁지겁 급히 왔다. “목사님! 그 복권 좀 줘 봐요.” 집사님이 적어온 1등 복권번호와 일치하였다. 수억 원이었다. 그래서 그랜드 피아노를 사고 교회도 2층으로 이전하고 자기 집도 지상으로 이사하였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보디발의 거짓모함을 통해 요셉을 총리로 가는 감옥으로 인도하셨고, 한나는 브린나의 격분 때문에 기도하여 사무엘을 임신하게 됐으며, 예수님의 성탄도 알고 보면 말구유를 활용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오늘 설교본문도 인간적으로는 최극빈(最極貧) 상황을 만난 격이다. 알렉산드리아 배가 로마로 출항하였다. 그 배에는 276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승객과 선원, 선장, 선주, 군인들이었다. 그 배는 안타깝게도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휩쓸리고 말았다. 광풍은 글자 그대로 미친 듯이 불어대는 폭풍이다. 그래서 침몰위기 속에 여러 동안 해도별도 보이지 않는 중에 14일간 먹지도 못하고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었다. 표류하던 배가 겨우 열다섯 길 수심되는 해안선으로 접어드는데(15 X 1.8 = 27m), 문제는 파도보다 무서운 암초였다. 칠 흙같이 캄캄한 밤이었다. 배는 한 순간에 난파당할 수 있는 처지였다. 사공들은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상륙할 길을 찾아보련만 그 밤이 최대위기의 고비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배는 교회나 가정, 나라를 의미할 수 있다. 교회라는 배를 탑승하고 세상의 무서운 광풍을 이겨내야 한다. 위기이다. 교회는 늘 위기를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신앙관이다. 고난을 당하지 않는 배는 없다. 아무리 성령 충만한 배라도 고난을 당하게 된다. 다만 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 그게 중요하다. 인생항해의 고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가 기억할 바는 고난을 이겨내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된다는 이치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지 않는 고난은 불가능하며, 대부분의 고난은 궁극적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πειρασθηναι 페이라스쎄나이 πειραζω 페이라죠의 수동태 분사 연단, 시련).

설교준비 하는 동안 자꾸 우리 세월호가 생각났다. 알렉산드리아 호는 깨어져가는 중에도 승객을 전원 구조시켰다. 영국의 해양대국 정신은 세 가지였다. ① 배가 침몰할 때,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탑승시킨다. ② 그래도 자리가 남으면 남자를 탈출시킨다. ③ 그래도 또 자리가 남으면 선원들이 탈출한다. 이 정신으로 선원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끝까지 남아서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고 선원들은 찬송가를 불렀단다. 그러기에 타이타닉호의 침몰참사 때 어린이 및 여성 구조율은 78%, 남성 구조율 20%, 선장선원 구조율은 0%였단다. 우리 세월호의 구조율을 보면 선박직원 구조율은 100%, 학생구조율 23%였다. 위기일수록 사람의 본심은 정직하게 공개되는 법이다. 우리나라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은 꽃다운 학생들의 생명구조? 씨도 말라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한 학생이라도 더 살리겠다고 배 안에서 구명조끼들을 나눠준 이는 22살 박지영 회사 여직원과 단원고 선생님들, 정차웅 학생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배의 절대위기 중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1) 구원신앙(31)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바울이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바울 자신과 함께 하심을 확신되었기 때문이다(23-24). 그 최악 곤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붙잡으시고 인도하셨기에 그 나리 통에 암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절대 위기였을지라도 기적을 체험할 호기로 변해갔다. 오늘날 우리들의 암초는 건강위험과 경제위기, 신앙적 갈등, 지방색, 남북문제... 많다.

세계철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철학자가 31세 때 1654년 11월 23일. 오랜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을 만났다. 바로 ‘팡세’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파스칼이었다. 그러고 7년 후 파스칼은 “사유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닌 “구원의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가운데 삶을 마쳤다. 팡세가 죽은 후에 그의 서재에서 봉합되어 있는 ‘문서’를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써져 있더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지 철학대상의 하나님이 아니다.” 좀 쉽게 풀어 말하면 ‘구원’이며 ‘임마누엘’이 이론적 암기지식으로 끝내지 말고 현실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 속 배에서 임마누엘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저와 여러분도 실제 삶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길 축복한다.

2) 기도(35)

“하나님께 축사하시고” ευχαριστησεν τω θεω 유카리스테센 토 쎄오. the act of giving thanks. 그 초죽음 상황에서도 바울은 다 같이 하나님께 축사하는 것을 생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울수록 생략하지 말아야할 게 하나님과 교제이다. 가장 괴로울 때, 가장 바쁘고, 가장 낙심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예배나, 기도, 봉사로 표현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하나님과 무선교신을 하는 것이기도 한다. 무선교신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핸드폰으로 무전기로 서로가 보고하고 지시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 하나님께 보고하고 응답지시 받는 게 잘하는 기도인 것이다.

유명한 깡패가 회개하고 목사님이 된 후에 한국교회의 초대부흥사 목회자로 한 몫을 톡톡히 하신 분이 김익두 목사님(1874-1950)이시다. 어느 날 김 목사님이 고갯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술 취한 사람이 올라오더니 다짜고짜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라고 하면서 김 목사를 마구 때리고 밟았다. 한참 후에 김 목사님이 한 마디 하였다. “다 때렸소? 그런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았소.” “내가 김익두 올시다.” 술이 확 깨진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제발 살려 달라!”라고 빌었다. 그래서 김 목사님은 전도를 하였고 그 ‘복 받은 사람’은 후에 장로님이 되었다고 한다.

맞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도 무릎 꿇고 애걸복걸 간구만 하는 게 아니라 간구에 어울리게 순종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기도와 삶을 잘 조화시키길 축복한다. 아멘.

3) 행동하는 지혜(34)

배 안에 있던 승객과 사공과 선장, 군인들과 백부장은 두려움과 비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시 알렉산드리아 배는 요즘 우리의 현실(가정, 교회, 사회)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항해하는 것이 옳다고 고집하던 선장과 선주는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다. 그럴 때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배에 붙어 있고 자기들만 살아남으려고 하는 이기심을 버리게 지시하였고, 축사한 후에 음식을 먹게 하였으며, 심지어 밀을 버리게 하였다(38). 이렇게 한 바울은 그토록 최대위기 중인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증언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믿음 삶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음을 잘 배우게 한다. 불안과 불평, 좌절로 점점 치우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할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믿음과 현실 삶을 멋지게 조화시키는 믿음생활을 신앙지혜라고 한다.

어느 교회가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그 예배당의 벽에 선명한 글씨로 이렇게 써 놓았단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예배당 건물 벽에 담쟁이 넝쿨이 자라나하더니 점점 자라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힌”이란 부분을 가려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말만 보였다. 후 담쟁이 넝쿨은 더 자라나서 ‘예수’를 가렸다. 결국 “우리는 믿는다.”는 말만 남았다. 그러다가 결국 담쟁이 넝쿨이 예배당 벽을 다 덮어버렸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신앙 삶을 분명히 올바르게 시작하지만 누구를 믿으며, 무엇을 증거하는지 흐려지기 쉬운데 그게 조금씩 진행되어 변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죄에서 해방시키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에서 빠지면, 또 예수님에게서 십자가를 빼면 우리가 믿는 이 신앙 삶에서 축복이고 은혜이며 부흥은 아예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로 둔갑하고 만다.

올 해 믿음 푯대를 새롭게 정하자.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과정일 뿐이요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승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요셉의 험악한 환경을 선으로 바꿔주셨다. 하나님의 결말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끝까지 인내함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믿음인생의 시련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인생의 골치 거리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게 하자. 저와 여러분의 인생시련들은 기도제목일 뿐이다. 인생의 시련들이 상처가 될지 미담이 될지 그것은 임마누엘 삶을 얼마나 올바르게 하느냐에 달려있음을 명심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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