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7일 설교
“이 말을 하였으니!” (막 7:24-30 ‘수로보니게의 믿음’ 20.12.27)
여러분, 베토벤이나 존 밀턴, 루스벨트 대통령...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언지 아는가? 좀 더 쉽게 우리나라 사람의 예를 들어보면, 시인 송명희, 강영우 박사, 피아니스트 이희아... 이 분들의 공통점이 있잖아요. 장애를 뛰어넘고 인간승리를 이룬 삶을 살아간 것이다.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실명한 후에 ‘실락원’이라는 서사시 12권을 썼단다.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청각장애 중에도 위대한 교향곡들을 작곡해냈다.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은 39세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을 못 쓰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미국통령 역사상 유례가 없는 4선 대통령이 되었다. 시인 송명희 씨(1963-)는 뇌성마비 장애자로 태어나 지금까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의 심금을 울리는 수많은 찬송시를 지어냈다. 강영우(1944 - 2012)박사도 중학교 1학년 때 축구공을 맞고 실명한 시각장애인이 됐지만,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보좌관을 역임했으며,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과 루스벨트재단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1985-)는 양손이 다 손가락 둘밖에 없는데도 유능한 피아니스트로 살아간다.
여러분, 이런 장애자들은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뭔가 특출한 점이 있기 때문에 위대한 성공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렇지만 그들도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장애를 무척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었다. 단 한 가지 그 어떤 장애라도 이겨내겠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인간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애를 장애물로 생각하고 그 장애물에 타협한 사람들은 평생 자기 장애를 탓하며 비관하고 살아간다.
오늘 설교본문은 진짜 골칫거리 장애물을 해결해낸 한 여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다. 마태복음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니’라고 기록해 놓았다(마15:21).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지방의 북서쪽으로 지중해의 해변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그 지역을 수리아 - 페니키아(Syrian Phoenicia) 지방이라고 불렀는데 설교본문에는 수로보니게라고 번역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사는 땅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이방인은 부정하다(unclean)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unclean”한 것은 먹거나 접촉해서도 안 된다는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고 제자들도 꺼림칙했을 텐데, 수로보니게 여인까지 만나주셨다. 이게 특이한 일이었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헬라사람이었다(“The woman was a Greek, born in Syr-ian Phoenicia.” -NIV-, “The woman was a Greek, a Syro-Phoenician by birth,” -NKJV-. 헬라 수로보니게에서 출생한 사람). 그 여인이 예수님께 더러운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자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다.”(27 “First let the children eat all they want,” he told her, “for it is not right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toss it to their dogs.”-NIV- 아이들의 빵을 가져다가 그들의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모습은 깜짝 놀랄 일이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개새끼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중심을 확인해 보시는 중이셨다면, 그 여자가 정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만이 자기 딸을 고칠 수 있다는 그 소망이 살아있어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는지 알아보셨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퉁명하게, 그러고 약간 귀찮다는 태도로 말씀하셨겠지요.
그런데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님,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그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29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Because of that answer, go back home, where you will find that the demon has gone out of your daughter!” -GN-<그 대답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넌 귀신이 네 딸에게서 사라진 것을 알 거다.>).
제가 성남에서 목회할 때 30대 아주머니가 가끔 신 내리려고 하면 어찌나 괴로워하던지,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이 “고칠 수만 있다면 어디를 가서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지만 고치지 못하고 점점 심해지는 몸부림을 당하고만 있었다. 제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고쳐주면 교회 다니겠느냐?”라고 물어보라고 하였더니, “교회 다니겠다!”라고 해서, 집사님들과 작정예배를 드리면서 안수기도를 하였는데, 달포쯤 지나자 괜찮아졌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식당을 개업하고 스트레스를 푼다고 노래방 가고 바빠서 교회 다닐 시간이 없다고 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오늘 설교본문을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 숨기려 하셨다는 것이다(24 예수님의 병 고침은 하나님의 자녀 삶으로 초청방법이요, 과정이지 하나님자녀 생활의 본질핵심이 아니기 때문이었음.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이 난치병을 고쳐주심은 철저하게 믿음의 선물이거나, 하나님을 시인하고 믿게 하려는 방편이셨다는 것임).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골칫거리 문제를 예수님께서 깨끗이 해결해주시기를 바랄 때,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던가? 그 해답은 바로 설교본문에 있다. 그 해답을 지금 저랑 같이 집중적으로 찾아보자.
1) 와서(25)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ακαθαρτον 아카사르톤 unclean = ‘흉악하게’ κακως 카코스<마 15:22 of a bad quality, worthless, corrupt> 육체가, 정신이, 영혼이 귀신에게 조종을 당해서 자신과 남을 괴롭히고 위험하게 하는 정도가 얼마나 험악하였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함).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자기 딸을 고치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확신한 만큼 곧바로 예수님께로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방해는 없었는가? 유대인들이 상종을 꺼리는 이방인 장벽, 귀신 짓하는 딸, 동네방네 소문난 귀신병자... 수많은 소곤소곤, 핑계거리들, 코로나 같은 위험들... 이러한 장애물을 물리치고 예수님 앞에까지 왔던 것이다.
서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도 낙후된 지역이란다. 그곳의 고충을 들었던 의사 켄트 브랜틀리는 2년간 라이베리아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당시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만류하였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움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더란다. 그러고 라이베리아로 파송되기 전 교회에서의 마지막 결단의 기도회시간에 “시련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수십 년 간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해 2년간 최선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기도부탁도 했단다.
그런데 그는 라이베리아에서 에볼라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도 마다하지 않고 치료하다가 3달 후에 에볼라에 감염되어 미국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그때 그의 아내는 오히려 그 동안이라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더란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원봉사하다가 에볼라에 걸린 게 은혜인가? 에볼라를 피해 숨어있는 게 은혜인가? 에볼라 속에서 봉사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걸 은혜라고 믿었던 신앙인도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은혜 받아야 방해나 핑계를 이기고 동참할 수 있다!).
2) 간구(26)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마 15:22)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 여인은 소리를 질러 간구했다는 것이다. 다윗이 시 3:4에 이렇게 고백해 놓았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도다.”(אקרא 에크라 미완료형 계속 부르짖음 “I cry aloud” -NIV-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 말은 ‘하나님이 오랜 동안 종들을 통하여 예언해 오신 대로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셔서, 예수님이 바로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었다. 정통 이스라엘의 후손도 아닌 헬라여인이었기에, 우리 예수님이 깜짝 감동을 받고 그 여인의 간구를 인정하시고 당장 치료를 끝내주신 것이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쌍방 간 많은 병사가 죽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링컨 대통령은 동족끼리 죽이는 전쟁을 쓰라리게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단다. 그런데 당시 남군은 병사도 많고 맹장 로버트. 리 장군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유리한 점이 많아 남군에게 늘 지기만 하였단다. 그래서 그는 매일 두 세 시간씩 기도했다고 한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의논하는데 한 분이 링컨 대통령에게 이런 말로 위로했단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서 북군을 승리하게 해달라고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즉시 링컨 대통령이 충고했다. “그 기도를 중단하시오.” 모두 깜짝 놀라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링컨 대통령의 설명하였다. “하나님이 우리 편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항상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합심으로, 오래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기도원리가 있음을 강조해준다. 그것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은 자주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자기욕심의 창고를 채우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그래서 키엘케골이 말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오시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마구잡이로 대충 기도하는데 익숙해지지 말고 성경이 보여주는 기도법칙에 맞는 기도에 익숙하길 축복한다. 아멘. 우리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벌레가 '대충'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3) 부스러기(28)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이 말에 담긴 인품의 폭이나 사고방식, 겸손함, 적을 포용하는 넉넉함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예수님이 개새끼 취급한 것은 그냥 누구나 가진 유대인의 사회정서에 따른 것이었다. 역사적 전통, 오랜 식민지의 관습에 따른 종교적, 민족적 관행이 어린 딸을 살리려고 간청하는 한 어머니의 한탄보다 순간적으로 앞서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의 '부스러기 대답'이 순간적으로 올바른 신앙관을 예수님께 보여주었다. 이렇게 기도 중에 신앙관을 내보일 때 잘 하는 기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고 고통을 끝내주셨던 것이다.
1946년 남아프리카에서 유명한 점쟁이가 “올해는 대기근이 들 것이다.”라고 점괘를 내놓았다. 그 점괘는 입소문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가뭄징조는 없어도 사람들은 기근이 올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여름철에 수많은 농부들이 재난을 피하려고 도시로 떠났다. 밭에 곡식들은 방치되어 점점 메말랐고, 결국 그해 농사는 망쳤다. 점쟁이의 점괘대로 기근이 닥쳤다. 하지만 그해 남아프리카는 비나 기후도 충분했단다. 다만 밭을 가꿀 농부가 없었단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The lazy man says, “There is a lion in the road! A fierce lion is in the streets!”(거짓 핑계 변명삼음이 게으름!)
자 이제 설교정리하자. 수로보니게 여인(이방인이, 골칫거리 한을 믿음으로 해결!(예수님께, 기도로, 부스러기까지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