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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년 10월 30일 설교


“큰 이익이 되게!”(딤전 6:3~10 ‘말씀과 경건의 교훈’ 22.10.30)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이 미국 대통령이던 1995년 방글라데시의 농촌 마을 마이샤하티를 방문하였단다. 아무런 담보도 없이 빌린 소액 대출금으로 자급 자립을 이루는 마이샤하티의 여성들을 만나보기 위함이었다. 힐러리 여사는 그들과 대화 중에 이런 설명을 들었단다. “우리 여성들은 소나 닭, 오리로 소득을 올리고 그래서 아이들을 학교도 보냅니다.” 힐러리는 그들의 생활형편이 점점 나아지고 있고 여성들의 힘이 강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 마을 여성들이 힐러리 여사에게 질문했다. “아파(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어요?” “아니요, 없는데요.” “아파, 당신은 자신의 소득이 있나요?” “아니요, 전에는 내가 직접 벌었는데, 남편이 대통령 된 뒤로는 그 일을 그만뒀지요.” “아파, 아이가 몇이나요?” “딸 하나요.” “아파, 아이들을 더 낳고 싶지는 않으세요?” “네, 한둘쯤 더 낳고 싶긴 해요. 하지만, 우리 딸 첼시와 충분히 행복하게 지낸답니다.”

그러자 마이샤하티 부인들은 서로 안타까운 눈길로 이렇게 중얼거리더란다. “참 딱하네! 힐러리 아파(자매님)는 암소도 없고, 자기 소득도 없고, 아이도 딸 하나뿐이고...” 마이샤하티 여성들은 힐러리 클린턴을 ‘힘없는 여성’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힐러리 여사를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그 후진국의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 대통령의 first-lady를 왜 불쌍하게 여겼을까?

마이샤하티 시골 여성들은 힐러리가 누리는 세계 최강국의 first-lady와 거기에 따르는 부와 권세를 부러워하며 힐러리 여사에게 돈을 무상원조해 달라고 청원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의 first-lady를 아파(자매님)라고 불렀던 마이샤하티 부인들은 자신들이 분명히 가지고 살아가는데, 힐러리는 가지고 살지 못한 그것들을 보았다. 그게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참으로 자기 확신과 자력으로 살아간다는 자부심, 자기 존중이었으리라. 마이샤하티 여성들의 삶을 서구식 성공의 잣대로만 보면, ‘야만으로 낙후된 빈곤’이라고 쉽게 속단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참모습은 인생을 인간다운 품위와 기쁨과 감사를 강건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어 바다를 생각나게 한다(海 = 氵+ 每<母> 온갖 물을 다 받아들임이 어머니의 품 같음). 한마디로 ‘올바른 인생관’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오늘 설교 본문도 사람이 생각하는 견해(見解)대로 설교하고 그 설교를 따라 믿음 생활도 이루어지게 된다고 밝혀준다(3 “다른 교훈을 하며” ἑτεροδιδασκαλεῖ 헤테로디다스칼레이 현재형, ἑτερος <different, strange, illicit 불법, 편법, 부정, 빗나감> + διδασκαλεω<to teach>).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언약하시고도 이상하게도 첫아들을 낳는데 무려 25년을 기다리게 하셨다. 그 25년은 아브람과 아내가 전혀 출산할 수 없는 나이까지였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미 아들 이스마엘을 여종을 통하여 낳았는데, 이스마엘이 10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니 아브라함 부부는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대로 아브라함은 100세에 도저히 불가능한 부인을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지 않아야 했다.’ 생각해보자. 아브람은 예배생활을 시종일관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을 편법으로 하면서 빗나간 신앙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만 그런가?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엘케고르(1813.5.5.-1855.11.11.)는 ‘성경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왕자는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 여인을 잊지 못하였다. 자꾸 생각나고 그리워하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믿게 할 수 있을까? 엄청난 신분의 격차가 문제였다. 실제로 신분의 격차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 난감했다. 사랑하는 데는 가난이나 못 배움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데.... 사랑은 그 모든 걸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우치면 되는데... 어떻게 설명을 하면 좋을지? 또 성공하지 못하고, 불행하고... 그러한 것들은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아니다. 무슨 핑계나 모든 책임은 왕자 내가 해결할 문제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 그리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도 나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은 뭘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고, 저도 나를 사랑하면 되는데... 이런 게 왕자의 고민이었다. 물론 왕자는 신하들의 의견도 구하면서 많은 연구도 계속한 끝에 결행하였다.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그녀가 사는 시골로 가서 셋방을 얻고 목수로 일하면서 그들의 말을 배우고, 가난한 풍습을 익히며, 마을 사람들과 친절히 지냈다. 그리하여 그들과 애경사를 같이 하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그 여인을 만나 고백하였다. “내가 당신과 사랑하려고 이렇게 모든 내 몫을 포기하고 당신을 찾아왔노라!”라고. 그때야 겨우 그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함을 알고, 시인하고, 믿고,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다.”

이렇게 키엘케고르가 설명한 사랑이나 바로 사도 바울이 강권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바른말을 따르는 것”이나 똑같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바른말”을 올바로 따르는 그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 본문을 통하여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바에 귀를 기울이자. 아멘.

1) 바른말(3)

“바른말”<ὑγιαίνουσι 휘기아이누시 ὑγιαίνω 현재 분사, pure, health의 지속> = “경건에 관한 교훈” <τῇ κατʼ εὐσέβειαν διδασκαλίᾳ, 테 카트 유세베이안 디다스칼리아 “to the doctrine which accords with godliness.” -NKJV-> 결국 ‘경건과 일치하는 가르침’이 “바른 말”이라는 것임! 그런데 이 바른 말을 따르지 아니하는 신앙생활이 4절 5절이고, 흉악하다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 목사에게 증언함). 흉악한 모습을 여러 가지로 지적했는데 그중에 하나 “교만하여”(τετύφωται 테튀포타이 τύφοω<연기를 피우다, 흐리게 하다, 숨차게 한다, 어리석다>의 현재 완료 수동태).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하여 바른 말을 따르지 아니하는 신앙생활은, 연기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처럼 식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안타까움을 당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결국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해 ‘고집쟁이 바보’라는 의미이다.

테니스 경기에서 호주 오픈 우승 2회(1991, 1996), 윔블던 우승 3회(1985, 1986, 1991), US 오픈 우승 1회(1989)로 테니스 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선수 보리스 베커가 이렇게 말했단다. “나는 윔블던에서도 세 번이나 우승했습니다. 그중 한 번은 가장 나이 어린 선수였습니다. 나는 부자였습니다. 필요한 모든 물질을 소유했지만 아주 불행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저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부족했을까요? 그렇게 유능하게 살면서도 여전히 불만스러워서 자살까지 시도하였다면 도대체 뭐가 그토록 힘들었을까? 그런데 최정상에서 비관하는 자들은 보리스 베커뿐이던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흔한 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할 때 가치와 보람과 소망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주관계를 잘 이룬 그리스도인이다. 참 그리스도인이길! 아멘.

2) 자족하는 마음(6)

“자족하는 마음”(한 단어, αὐταρκείας 아우타르케이아스 αὐτος<he, self> + αρκεω<enough, satisfy>). 현대인의 성경은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됩니다.”라고 번역했다. 개역성경은 “지족(知足)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했다(자기 분수를 알고 사리에 맞는 책임 의식으로 살아감). 7-8을 보자. 자족의 비결을 깨우쳐 준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최소한 검소한 생활의 필요기준’을 가르쳐준다. 사도 바울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욥도 자기 모든 재산과 자녀들이 다 사라졌을 때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돌아갈 것이라.”(욥 1:21-22)에 맞춰서 판단하고 선택하였다. 아멘.

지금까지도 미국이 부국강병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주기보다 조상의 청교도 신앙으로 학교나 병원, 예배당을 짓고 선교하며 베푸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느 집사님이 학교의 미인대회 1등에 목을 매달더니 끝내 결혼하였다.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대답은 “일생의 실수였습니다. 아침마다 2시간씩 거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말을 붙이면 날벼락을 맞습니다. 적당하게 생겼으면 감사하십시요.”

3) 돈을 사랑함(10)

“돈을 사랑함”(한 단어 φιλαργυρία 필알구리아, φιλ<사랑> + αργυρία<알구리아 money> 그러니까 돈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돈에 빠져 미친 사람을 말함). 역사적으로 돈은 항상 필요하고 중요했다. 현대 사회에서 돈의 위력이 ‘황금만능’으로 입증됐다. 그런데 돈은 지배하는 힘이 있다. 게다가 소유욕과 재물욕은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돈이 사람을 지배하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그 이유는 수단과 방법을 사악하게 하면 좋은 시작도 목적도 사악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돈 그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닌데도 돈은 더러운 돈과 깨끗한 돈이 섞여 있다. 깨끗한 돈은 옳은 방법과 정당한 과정으로 벌었던 돈이요, 더러운 돈은 그릇되고 부정한 수단으로 번 돈인데, 더러운 돈은 너무나 흔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중장부와 상납제가 묵인되어 부정축재라는 말이 생겨났고, 정직과 성실로 일하면 답답해한다. 온 나라가 썩더라도 마지막까지 썩지 않기를 바라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이 이 사회의 소금이요, 정의의 실천자이며 정신적 기둥이다. 법관이고, 교수이며, 의사이고, 종교인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그들이다. 아멘.

한 탈북자가 서울대에서 강연을 마치자 한 대학생이 질문했다. “왜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 않죠? 우리 남한 사람들은 투쟁하여 이만큼 자유를 누리고 산답니다.” 그 답변이었다. “예, 맞습니다. 북한에서는 투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하지요. 한 번도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탓이죠. 봉건사회인 조선왕조 500년과 일제강점기 36년을 거쳐 김일성 3대 독재정권을 살았으니, 자유를 알 수 없지요.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투쟁하겠습니까?”

마음에 진리를 담지 않으면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 된다고 바울이 말했다. “방도”(πορισμὸν 포리스본 ποριζω provide, acquire의 명사 “financial gain” -NIV- ‘경제적 이득’으로 타락한다.

명심하고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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