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9일 설교
“이걸 본받자!” (스 3:1-7 ‘깨어있는 믿음중심’) 19.12.29.
인디언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태양이 어두움을 전혀 이해가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태양을 데리고 아주 깜깜한 굴로 갔단다. 그런데 그 굴에 태양이 들어서자마자 어두움이 줄행랑을 쳐버리는 바람에 태양은 여전히 어두움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낮과 밤이 공존하지 못하는 사실을 알아차린 인디언들이 그 깨달음을 잊지 않으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이다. 바울도 깨달았다(‘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즉시 물러가고 그 자리를 대신 빛이 차지한다. 다만 그 햇빛이 가려져 있는 곳이라면 그만큼 어둠은 남아 있다. 해가 지면 어두워지는 게 사실이지만, 그 어두움은 일시적일 뿐이다. 또다시 아침이 되면 어둠은 사방에서 물러간다. 아무리 긴 밤 동지라도 낮을 가로막은 적은 없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깜깜한 밤중에도 태양은 떠 있다. 밤의 반대편에서 빛을 비춰주고 있다. 밤에 떠 있는 달이 태양빛을 반사하여 주는 것을 보면 우리는 밤에도 태양이 여전히 빛을 비추고 있음을 시인하게 된다. 모든 생물은 빛을 받지 않으면 점점 시들고 병들어 끝내 죽고 만다. 이 사실은 예수교신앙 삶에도 잘 통하는 믿음의 이치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현실에도 종종 어둠이 생길 때, 그 어둠 속에서 온갖 범죄와 죽음이 이기는 것을 목격하면, 실망과 분노와 심지어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힐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둠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 빛을 가리고 있는 장애물들만 치우면, 그 순간 어둠은 확 사라지고 만다. 빛이 전혀 없을 때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면 된다. 이 이치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 어떠한 고난과 훼방 속에서도 산 소망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오늘 설교본문도 평온한 마음으로 읽고 있으면 어두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 빛을 향하여 나아오는 사람들을 보게 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6-7. ‘여호와의 성전지대를 놓지 못한지라’라는 말씀은, 성전건축의 기초공사를 전혀 시작하지 못하였다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어두운 현실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또 해외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운송해오는 일에 석수와 목수들을 참여시켰다는 것은, 성전건축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바로 이런 게 하나님의 생명 빛을 찾아 나오는 일에 해당한 것이다.
참고로 ‘백향목’은 제대로 자라면 36m까지 컸고 그 둘레도 12m나 되는 거목이었다고 한다. 또 백향목은 이름 그대로 나무색깔이 하얗고 향기를 풍기면서 옹이도 없어 내구력이 뛰어나 성전건축 자재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었단다. 그런대 중동지역에서 레바논은 땅이 비옥하여 백향목이 최상품으로 자라났던 것이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이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운송해왔다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성전건축 준비였다. 솔로몬 왕도 여호와성전을 건축할 때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구입하였다고 성경은 밝혀준다(‘또 레바논에서 백향목과 잣나무와 백단목을 내게로 보내소서. ... 이와 같이 나를 위하여 재목을 많이 준비하게 하소서. 내가 건축하려 하는 성전은 크고 화려할 것이니이다.’(대하 2:8-9).
성경 레위기는 제사규칙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 책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레1:2). 왜 우리 하나님께서 예물을 호랑이나 사자로 정하지 않으셨을까? 막강하고 위풍당당한 동물이 있는데도 하필 순한 초식동물인 소와 양으로 제한하셨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복잡한 질문이겠지만 그래도 ‘가축 중에서’라는 말씀이 많은 대답을 해준다. 가축은 집에서 키우는 동물이다. 또 소와 양은 무섭지 않는 가축이라 누구나 키울 수 있다. 그 먹이도 풀이다. 풀은 아무데서나 엄청나게 잘 자라고 있다. 그만큼 사료를 구하기 쉽다는 것이다. 결심만 하면 얼마든지 예물을 준비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준비는 결심과 정성을 담으라는 것이다. 예물의 막대함이나 멋짐, 엄청난 희귀함, 그래서 당당한 자기용맹을 과시함보다 예물을 드리는 분의 진실한 수고와 사랑함과 정성어린 소망중심을 담아드리는 예물을 우리 하나님께서 바라셨기에 초식짐승의 가축으로 제한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빗나간 예물을 보시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분노를 들어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 성회(聖會)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1-13). 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 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말 1:13-14). 우리 하나님이 바라시는 준비는 네모반듯함과 정성어린 사랑함을 표현하는 그 주심을 담으면 된다. 아멘. 명심하길 축복한다.
자 그러면 다시 설교본문으로 돌아와서 성전건축 준비의 현장을 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챙겨 담자.
1) 일제히(1)
지금 함께 읽어본 말씀은 바벨론 포로 42,360명이 1400km(3660리)를 걸어서 귀환하였다가 우선 생활거처를 마련하느라고 6개월을 보냈다. 그러고 ‘일곱째 달’에 예루살렘 광장에 일제히 모였다는 것이니, ‘합심’이요 ‘협력함’이다. 참으로 귀한 신앙인들이었다. 바벨론의 생활기반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예루살렘 성전건축에 동참하기로 결단한 신앙인답게 여전히 고난 속에서 신앙이 삶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멘!
저는 35년간 목회를 해 오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일에 여러 번 동참하다가 여러 병자들이 낫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귀신병들과 불치병들, 사고들... 아산병원에서, 성모병원에서, 국립의료원에서, 순천향병원에서, 인하대병원에서, 동네병원에서, 집에서, 예배당에서... 그때마다 감격하면서 기뻐하였고 감사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정작 그 환자 본인이나 가족은 눈물 겨워하던 그 고마움을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귀환자 42,360명은 대부분 작심삼일과 담을 쌓고 살아감을 설교본문이 말해주고 있다. 저는 마냥 부러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작심삼일로 삼을지라도 저와 여러분은 ‘일제히’를 꾸준히 해나가길 축복한다. 아멘.
2) 제단 중심(2)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임시예배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확인할 바가 있다. 그것은 이 일을 누가 주동했느냐? 어디에? 왜?를 정확하게 보는 것이다. 누군가? ‘예수아’와 ‘스룹바벨’이었다. 예수아는 제사장이었고, 스룹바벨은 왕족출신 행정관에 해당한다. 우리 교회와 대비시키면 목사님과 장로님 쯤 된다. 목사님과 장로님의 결정, 당회의 지도를 따라 순종하는지 그것을 점검해보자는 것이다. 또 어디였던가? '그 터에' 왜 그랬는가? '모든 나라'가 두려워서. 70년 포로생활이 재현되까봐 불안해졌다.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가 신앙야심에 걸렸다. 자라보고 노란 가슴은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는 법이다. 아멘.
성경은 시간을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계절시간(calendar time)이다. 이것은 자연계에 맞춰진 시간인데,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태양을 바라볼 때와 등질 때를 구별해 놓고 시간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 말고 생물학적 시간(biological time)이 있다. 이것은 모든 생물에게 제한적으로 허락되어 있는 시간이다. 제비가 강남으로 날아가고, 연어가 다시 돌아와서 알을 낳고, 사람이 결혼하고 애를 낳고 결혼시키고 죽을 준비를 하는 그러한 시기이다.
계절시간을 ‘피동적 시간’이라고 한다면 생물학적 시간은 ‘자동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작정하고 자기인생을 살아가는 삶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약을 줄기차게 먹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을 자기시간이라고 속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이다. 계절시간이나 생물학적 시간은 확실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무제한 영원, 영생이다. 성경에서 ‘구원’이라고 말하는 바는 제한시간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살아가는 거다. 나의 인생에서 어느 편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그 우선순위를 판단할 때 하나님의 시간을 알아보고 맞추는 인생살이를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모여서 제단을 만드는 일에 동참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따르는 인생이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시간을 우선하고 따르는 인생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3) 번제(3-4)
예수아와 스룹바벨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또 초막절을 1주일간 함께 모여 드렸는데 42,360명은 일제히 그 제물들을 준비하여 동참하면서 협력하였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굉장히 부러운 모습이다. ‘너희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출 29:38~ 39),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 월 십오 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레 23:39-40).
내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지우개는 연필에 붙어있었는데 지금은 연필과 지우개가 따로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옛날 연필은 실수를 범하였을 때 남이 개입하기 전에 자신이 얼른 지워버리고 다시 새 출발을 하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되어, 오히려 옛 연필이 훨씬 성경적이었다. 사실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가끔 잘못을 범하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이해하고 용서하며 친밀감도 갖게 된다. 그러기에 사람의 진짜 잘못은 실책자체에 있지 않고 실책을 범한 그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 있다. 실수를 알아차리는 염치와 실수한 다음에 가능한 빨리 바로잡으려는 ‘지우개 연필의 사고방식’을 스스로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새 출발하는 인생살이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차대한 과제이다. 바로 이렇게 실수를 고치려고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은 핑계를 무시하고 번제에 열심히 동참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을 저와 여러분도 잘 닮기를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우리 자신 모두에게 보여준 믿음의 나침반바늘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보자. 오늘 설교는 바벨론 포로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성전건축 준비를 시작하는 그 모습을 보게 하였다. 제사장 예수아와 행정관 스룹바벨이 지도할 때 일제히 모였고, 임시제단을 마련했고, 번제드림부터 시작하였다. 이 성전건축 준비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믿음생활의 답이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