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5일 성탄설교
“성탄은 실현됐습니까?” (눅1:39-48) 2019. 12. 25.
미래는 두 종류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미래는 현재를 뒤따라 다니는 미래이다. 저와 여러분은 과거를 살았고,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중이고, 오늘 밤을 자고 나면 반드시 내일이라는 미래를 만나게 된다. 이 미래를 로마사람들은 ‘푸투룸’(futurum)이라 했는데, 이 라틴말은 과거에서 출발하여 오늘을 거쳐 내일로 가는 미래를 의미하였고, 영어의 ‘future’라는 단어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를 설계하려고 하고 그것을 ‘꿈’이라고 부르며 기다리지만 사실 아무 보장도 없이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사항’으로 상당히 막연한 바램이요, 기다림이다.
또 하나의 미래는 사람이 계획한 시간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다. 이 미래는 사람에 의한 설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여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이 주인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 미래는 모든 사람에게 언약실현으로 강림(降臨)한다. 그런 미래를 라틴어로 ‘Adventus’라고 하였고 ‘오는 미래’(도래, 출현)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로 대림절을 'Advent'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든 미래가 있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만들어진 미래가 있다. 만들어져 주어지는 미래를 사도 베드로는 ‘산 소망’(ελπιδα ζωσαν 벧전 1:3)이라 하였다.
이 소망으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해석하여 현재적이고 미래의 종말적인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이 ‘미래의 현재화’, 이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현실을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미래가 오고 있고 이 소망이 현재의 나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의 변화는 과거나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의 현재화에 있다. 이러한 변화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 대망사상’ ‘메시야 대망신앙’이라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탄이다. 우리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성인들의 출생까지도 구별하여 ‘성탄’(聖誕 거룩한 탄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메시야 대망실현을 바라보고 믿었던 사도교회의 신앙들은 현실삶의 그 어떤 고난도, 순교의 죽음까지도 아주 넉넉하게 기쁨으로 감당해 냈다.
오늘 설교본문은 바로 메시야 대망신앙(하나님의 언약성취 시간, ‘Adventus’)을 완전히 중심에 맞추고 살아가던 두 여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44. 성모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정보를 듣고 제사장의 부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성령의 권능으로 임신한 아이 세례 요한이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기뻐 뛰었다는 것이니, 성탄의 예비모임? 성탄전야제의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음).
성탄은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하고 권태스런 중에, 그러나 이루어진 기다림의 언약성취요, 영생복락의 좁은 길이며, 구원성취의 감격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성탄의 방법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이루어진 비밀이기에 그렇다. 그 당시 로마황제 가이사(Caius Octavius. 30B.C.-14A.D.)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독재정치를 펼치려고 자신의 생일인 9월23일을 새해로 바꾸었고, 자신을 구세주의 신으로 선포했다. 그러고 세금충당을 위하여 호적조사를 철저히 시켰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당연한 나라현실이었다. 하지만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참 구세주가 탄생한 현실역사요 언약성취이며 ‘Adventus’이었다.
성탄의 장소를 생각해봐도 평범함의 극치였다. 그 당시 세계적인 수도는 로마였고, 이스라엘의 신앙명소는 예루살렘이었다. 그런데 성탄언약은 하필이면 시골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다. 선지자 미가는 B.C. 650년 경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했다. 이는 로마의 식민지 중에 변방 이스라엘에서 그것도 시골 조그만 마을 베들레헴이니, 너무나 의외였다는 것이다. 또 나사렛 땅 마리아라는 틴에이저 미혼모를 통해 사람의 아기모습으로 메시야 대망이 실현됨도 평범함의 극치였다.
한국교회와 성경의 모순 중에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는 이원론적 사고이다. 주님의 일과 세상일, 주일과 엿새, 주의 종과 일반평신도, 특별새벽기도... 너무나 따로 따로 차별시킨다. 다시 성탄현장을 생각해 보자. 베들레헴 마을은 오늘날 피서철처럼 갑자기 몰려든 손님을 치르느라고 여관과 민박들은 대박났겠지요. 그럴 때 메시아 대망실현을 생각하고 반영하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신앙인 바울 사도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라.’(고전 10:30)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언약실현이란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베들레헴의 말구유도 성령충만한 성전이었고 하루하루가 특별한 기회이었다는 것이다.
설교본문의 마리아는 메시야대망신앙의 실현을 알아차린 후에 준비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녀는 하나님의 성탄계획에 선택되었다. 우리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것을 확신하며 오늘까지 신앙생활을 해 왔을 거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성탄준비와 우리 자신을 비교해보자.
1) 교제하는 삶(39).
하나님이 보시기에 착하고 충성된 일꾼을 기대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만남을 특별히 가려야 한다. 아무나 무심코 만나면 그 교제가 믿음생활을 빗나가게 하고 더 진행되면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가롯유다가 우리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을 때 성경은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막 14:10-11, 43. 유다가 찾아가 함께 했음). 그런데 마리아는 빨리 산골로 가서 엘리사벳을 만났다고 했다. 왜 그렇게 서둘렀나? 36절에 답이 있다. 단순히 친척 때문이었나? 더 중요한 이유는 없었을까? 엘리사벳이 성령의 권능으로 임신했다는 소식을 천사에게 듣고 나사렛에서 에루ㅡ살렘 산골까지 빨리 가서 만났던 분이 마리아이었다. 두 여인의 만남은 성령사건의 확인이요 확신이었다. 이러한 교제는 서로 상생하게 되어있다. 서로 위로하고 모방하며 치유 그리고 변화되어 믿음의 진보를 이룬다. 이러한 소그룹의 교제가 필요하다. 마리아는 3개월쯤 엘리사벳과 교제하였다(56)고 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걸 배우고 해보길 축복한다.
2) 기뻐하는 삶(42).
마리아가 구세주를 잉태했음을 알아차릴 만큼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이 엘리사벳이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라고 했다는 것이다(ανεφωνησεν κραυγη μεγαλη, ava 위로, φωνεω ‘부르짖다’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모습을 연상시킴. κραυγη ‘외침’과 ‘부르짖음’ μεγαλη ‘거대한’) 그렇다면 엘리사벳은 메가폰을 대고 악쓰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목청껏 울부짖듯이 외쳤다고 본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성모 마리아임을 직감하고 온통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44 엘리사벳의 태중 아기(세례 요한, 6개월 됨).
마리아 자신도 엘리사벳을 만나서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47)이라고 찬양했다. 올바른 성령 충만함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특징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기쁨과 찬양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마리아의 잉태는 하나님 편에서는 기쁨이지만 이스라엘의 신앙풍속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기뻐하였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메시야 대망신앙(하나님의 언약성취 ‘Adventus’)의 실현현장에 자신이 동참함을 인생의 가치로, 인간존재의 의미로 여긴 까닭이다. 만일 마리아가 삶의 비중을 편리함과 순탄함에 두었다면 기쁨 대신 당연히 낙심과 원망에 빠졌을 것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1만 정도 알을 낳는데 비하여, 어항에서 살아가는 금붕어는 약 3000~4000여개 밖에 낳지 못한단다. 아무런 위험도 없이 적정한 온도와 먹이를 잘 공급받는데도 불구하고 확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고난’이라는 자연법칙의 현상이 전혀 없는 어항 때문이라고 한다. 쓴 고비를 이겨내고 세대를 이어가는 게 자연생태인데, 어항생활을 하는 금붕어는 날마다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갔지만 한편으로 중요한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항생활을 하면서 편리함과 편안함을 감사하는 금붕어여야 하는가? 아니면 자연환경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금붕어이길 바라는가? 힘들고 험난한 일들을 자주 당하는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목으로 삼는다. 아멘.
3. 찬양하는 삶(46).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한 단계 더 높아져 찬양을 이루었다. 46-55를 바로 ‘성모 마리아 찬가’( THE MAGNIFICAT)라고 한다. 46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시작하였다. 마리아는 찬양하면서 성탄을 기다린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이 보실 때 최고급으로 잘하는 성탄준비이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시 22:3 다윗의 고백). 찬양하면 거기에 창조주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게 함께하신다. 자주 말하지만 찬양을 노래로 하는 게 찬송이다. 찬양은 영어로 praise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칭찬’이다.
우리는 다 같이 마리아가 성탄준비 하는 것을 보았잖아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칭찬함이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을 진심껏 칭찬해 보자. 영혼의 에너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찬양의 비밀 곧 칭찬의 효력인 것이다. 그래서 칭찬하는 관계, 칭찬하는 공동체는 건강하다. 이 건강함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미래를 올바르게 준비하고 맞이하는 성탄이다.
동방박사들이 성탄에 동참하려고 찾아가다 헤롯궁전을 찾아와서 물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베들레헴이오니’ 그래서 온 예루살렘이 소동할 때 동방박사들은 찾아가서 경배하고 3가지 예물을 드렸고, 또 목자들도 찾아가 천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베들레헴이라고 정답을 헤롯 왕에게 알려주었던 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찾아가지 않았다. 헤롯 왕도 똑같았다. 떠버려 아는 척하며 잘난 척만 하고 가지 않았다. 이게 비극이다. 말로는 메시야대망 신앙인이라고 대세를 잡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라 설교하며 글로 끝냈다. 성경이 우리에게 비참한 사실을 증언한다. 메시야예수님은 여관도 민박도 없어 말구유로 갔고, 헤롯 왕은 살해명령을 내렸고, 대제사장들이 십자가처형을 결정했다고. 예수님의 보좌를 대신 차지해 놓고, 잘 먹고 잘 누리는 성경지식쟁이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도 한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만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실현에 솔직하고 정직하여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선 천국백성이길! 또 오늘 성탄절을 매듭삼아 마리아식 믿음생활을 시도하길 축복!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