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5일 설교

December 15, 2019

                                      “귀환하는 사명자들!” (스 2:36-43 ‘행함이 있는 믿음’) 19.12.15.

 

   미국의 위스콘신 주(州) 85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자그마치 길이만 7.2km에 달하는 해바라기 꽃밭을 볼 수 있는데, 그 넓은 땅에 해바라기 꽃이 가득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황금빛비단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것 같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시키게 한단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 아름다운 해바라기 꽃밭을 이루어 낸 이의 사연이다. 2006년 한 아저씨의 사랑하는 아내가 골수암에 말기 진단을 받고 60일 시한부인생으로 몰리고 말았다. 바로 그때 남편은 아내를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랑함과 희망의 표시로 집주변에 아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심어주며 병간호에 최선을 다 하였다. 그 헌신적인 사랑함은 아내의 시한부인생을 60일을 넘기게 했고 다시 6개월, 1년, 2년, 무려 9년을 더 남편과 함께 사랑을 누리며 살게 하더니, 2014년 11월 6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단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게 해서 아내를 떠나보냈지만, 아내를 잊고 살아가려니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아내가 좋아했던 해바라기 꽃을 계속 심어나갔더니, 그게 지금 50만 평이나 되는 그 황금빛 해바라기 바다를 이루었으며, 해바라기 씨로 얻은 수익금을 암 연구기관에 기부하기도 하고 또 항암투병 환자들을 돕고 있단다. 한 사람이 마음속에 간직한 진솔한 사랑을 꺼내어 보이니까 7.2km 50만 평을 완전히 덮고도 남을 정도라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아무리 넓고 긴 공간일지라도 얼마든지 끌어안을 수 있게 한다. 그 커다란 사랑을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의 영혼이 가지고 있다. 아멘.

   우리는 갑자기 실현된 예루살렘의 성전건축 기회에 동참하였던 사람들 42,360명에 관한 말씀을 4주째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설교본문은 42,360명 중에서 5,022명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약 8.5% 정도 되었는데, 크게 셋으로 구분되었다. 제사장 4,289명과 레위인 341명, 기타에 해당한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 392명이다. 우리가 설교본문을 보면서 혼동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정보인데 그것은 그 당시에 바벨론에 포로로 살아가고 있던 유다인들이 2-300만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5,022명은 전체 포로백성 중에서 정말로 극소수(0.3%)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교회는 대림절을 보내면서 평화의 예수를 외치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동안(1943~45)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미국국회에 출두하여 의원들에게 질문을 받았는데, 한 젊은 의원이 “이 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예방할 길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그 길은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평화를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오펜하이머 박사는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한 말이다.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위대함, 필요성, 관심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 평화를 어떻게 성취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평화를 위한다고 원자핵폭탄으로 위협하면서 피터지게 싸운다. 그런데 성경은 그 평화의 진정한 근원은 십자가라고 밝혀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님이 말구유에 탄생하자 천사들이 불렀던 찬송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던 전날 밤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유언처럼 남겼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예수께서는 죄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화목제물로 바쳤다. 평화는 단순히 환경을 개선하는 정도로 끝내는 그란 게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평화의 진정한 근원이란 사실을 확신하게 되기를 축복한다.

   영국의 국립박물관에 이런 그림이 걸려 있단다. 전투 중에 한 통신병이 본부와 연락을 하느라고 양손을 벌려 끊어진 전선을 쥐고 메시지를 보내다가 죽은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 병사는 끊어진 전선을 자기 몸으로 연결시켜 통신을 하고 죽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진실로 몸담으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제물 되심의 핵심결과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이 평화에 뿌리내리길! 아멘.

   살아있는 믿음은 그 사람의 영혼을 깨어있게 하고, 그리하여 판단과 선택, 삶을 살아 움직이게 하며, 힘들어도 진리를 따라 좁은 생명길로 가게 한다. 바벨론 포로귀환 때 5,022명이 바로 그러한 신앙인들이었다. 참으로 돋보인 성도들이었지요. 그러면 5,022명을 현미경으로 살펴보듯이 좀 더 세밀하게 알아봄으로 우리의 믿음생활에 기준치로 작용하길 바란다. 아멘.

   1) 제사장들(36)

   제사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게 하려고 성막에서 이스라엘백성의 제사를 대신 드려주는 일을 전담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제사장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전이 필요했고 또 성전에서 지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귀환인원 42,360명 중에서 4,289명이라면 10%(10명당 제사장 1명은 굉장히 많은 셈이었음!)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레 21:4),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신 21:5). = 제사장의 어른의식, 어른 됨의 생활, 또 예배권과 축복권과 재판권에 충실하는 제사장이 많은 신앙공동체나 그러한 사회는 복이다. 아멘.

   사람은 차림새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 차림이라면 동네가게 쯤 가는 것이고,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있다면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것이고, 여권을 들고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있다면 해외여행을 가는 중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짐을 보아도 무엇을 하려는 사람인지 잘 드러난다. 나그네라면 간단한 봇짐차림을 하고 있고, 야영휴가를 떠난다면 텐트와 배낭을 챙기고 있을 것이며, 이사를 간다면 트럭에 살림살이를 가득 싣는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 중일까요? 천국으로 출발한 그리스도인이다. 제사장의 어른의식, 어른 됨의 삶이 살아있던 제사장들이었기에 첫 귀환대열에 동참했던 거다. 저와 여러분도 천국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서 생명길로 가는 신앙관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2) 레위인들(40)

   레위인들은 341명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노래하는 레위인들은 128명, 문지기 레위인들은 139명인데 비하여 성전에서 제사장들의 도우미를 할 레위인들은 74명, 절반 정도로 확 줄어들었다. 왜 그랬을까? 힌트는 민수기에 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민 3:5-6)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들의 들은 성벽에서부터 밖으로 사방 천 규빗이라. 성을 중앙에 두고 성 밖 동쪽으로 이천 규빗, 남쪽으로 이천 규빗, 서쪽으로 이천 규빗, 북쪽으로 이천 규빗을 측량할지니 이는 그들의 성읍의 들이며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들이 피하게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이 성읍이라. 너희가 레위인에게 모두 사십팔 성읍을 주고 그 초장도 함께 주되’(민 35:4-7). 생각을 좀 해보자. ‘시종’(종살이) ‘사방 천 규빗’(사방 500m) ‘도피성’(실수지만 살인범 도피처) ‘사십팔 성읍’(분산생활) : 소위 ‘레져, 웰빙, 문화생활’과 먼 거리의 조건이었다. 편리함과 고난 없음을 선호한 신앙인은 싫어하는 귀환길이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신비의 빛이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고린도후서 4:6-10에 밝혀놓았다. 질그릇인 우리 속까지 담겨져 있는 이 빛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비난, 방해 속에서 더욱 더 빛남을 체험하게 된다고 강조하였다(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계란이 21일 동안만 따뜻한 열을 받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껍질을 깨고 생명체로 바뀐다. 이렇게 생명이 변화를 일으키는 그것을 성경은 ‘참 빛’이라고 증거했다(요 1:4-5). 이 빛은 고난과 장애물에게 지지 않고 당당하게 서서 미래의 판단을 대망하게 하는 생명력이다. 이런 생명력인 참 빛에 영향을 받고 산소망으로 살고 있던 341명이 첫 번 귀환에 합류하였다는 것이다. 아멘.

   3) 느디님 사람들(43 ‘주어진 자들’)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58)이라고 밝혀놓았다. 이 말씀은 상당한 충격을 준다. 그 이유는 뭔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사로잡은 사람들과 짐승들을 계수하고’(민 31:25-26),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수 9:27),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중 남아 있는 모든 사람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왕상 9:20-21). 사로잡힌 전쟁포로들 외국인 막노동잡부들이 느디님 사람드리요 솔로몬 신하의 자송들이었는데 예루살렘 성전건축에 1차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도 아무런 보장도 생활개선도 희망도 없는데도!

   “하나님! 우리 중에 누군가를 일으켜 세계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1934년 미국의 한 목장에서 남녀들이 모여 기도할 때 한 사람이 드렸던 기도란다. 훗날 그 목장주인의 아들이 세계전도를 하는 분이 되었는데 빌리 그래함이었다. 그 당시에 빌리의 믿음은 별로였던 고등학생이었지만 하나님은 기도응답을 장기전으로 천천히 하셨다. 2년 후 1936년 빌리는 밥 존스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다시 플로리다 신학대학으로 전학하였다. 그때 밥 존스 대학장이 플로리다 신학대학학장에게 보낸 추천서에 있는 말이다. “빌리는 언젠가 그 무엇을 이룰 것입니다.” 빌리는 나중에 목장에서 기도와 밥 존스 대학장의 예견대로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 살아갔다. 직분이나 명찰보다 신앙관이, 역할이 살아 움직이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설교 중에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생활의 기둥감을 골라 챙기자. 고생문이 훤했지만 성전건축에 뛰어든 신앙인들을 우리가 보았다. 어른들! 도우미들! 외국인 막노동잡부들! 신앙관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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