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일 설교
“회복에 참여하자!” (스 1:5-11 ‘하나님의 회복현장’) 19.12.1.
새벽을 깨우시는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성실하심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하루를 시작하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잘못 학습된 내용을 아주 자연스럽게 복습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응어리 된 것들을 다시 휘저어 떠올리는 그러한 하루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나는 안 돼!’ ‘나를 사랑하시지 않나 봐.’ ‘기도해도 안 되잖아.’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지.’ 이토록 비관적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사야 61: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하나님께서 응어리진 마음을 고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응어리를 풀지 못한 채 맺힌 그대로 있으면 잠깐 사랑할 수 있으나 오래 사랑할 수 없고, 잠깐 기뻐할 수 있으나 오랜 동안 기뻐할 수 없으며, 한 때 용서할 수 있으나 길게 용서할 수 없고, 한 순간 뜨겁게 감사할 수 있으나 항상 감사할 수 없다. 이러므로 응어리는 반드시 풀어야 한다. 하나님자녀의 우선과제이다. 응어리는 ‘품고 살 게’ 아니라, ‘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어두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두운 꿈을 꾸게 된다. 더 어두운 마음은 어떤 꿈조차 꾸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굉장히 정직하다. 그리스도인이 미소를 머금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에게 더 값진 미래를 선물하고, 그리스도인이 불평하면 하나님나라는 더 괴로운 내일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니 밝고 아름다운 소망을 현재 우리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다 변하여도 이 소망만은 변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언약에 뿌리를 둔 그런 소망을 담고 살아가자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참 소망의 그 실현을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1.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은 1절에 기록되어 있는바 그대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임). 그렇다면 ‘이루게 하시려고’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이었다고 5절에 밝혀져 있다.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라는 말씀을 그 당시의 시대정황을 반영하여 설명한다면 ‘개혁하는 신앙’(reforming faithful, 바울이 기록한 말로 하면 ‘믿음의 진보’<빌 1:25>임)에 해당한다. 오늘 설교본문은 ‘믿음의 진보’인 ‘개혁하는 신앙’(reforming faithful)의 삶에 동참하였던 그 현장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자원일색, 자진물결, 자발바람에 다들 공감할 것이다. 억지강요로 조성한 분위기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적 결단을 중차대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천국비유로 제자들을 깨우치셨던 일 때문이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17-22, 23). 밭에 가서 일을 하는 것, 소 10마리를 훈련시키는 것도, 장가 들었으니 이제 가장노릇에 충실 하는 것까지, 다 착하고 책임감도 강하며 근면성실함인지라 모범된 칭찬감이었다. 다만 우리 하나님의 가치기준으로 평가할 때 ‘내 집을 채우라’보다는 훨씬 작음으로 바보짓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와 무관하길 바란지만 이러한 계산법을 터득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진보’인 ‘개혁하는 신앙’ (reforming faithful)의 삶에 자원동참하고 일취월장하게 된다. 아멘.
우리나라 전래동화에 ‘3년 고개’라는 게 있다. 어느 동네를 넘어가는 재에서 넘어지면 3년밖에 못 산다는 전설이 오랜 동안 전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고개를 넘을 때 조심하였다. 어느 날 한 영감님이 그 고개를 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이제 3년밖에 못 살겠다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허둥지둥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더니 누워버렸다. 초상집 분위기였다. 소문을 듣고 동네사람들이 찾아와 위로하였지만 수군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럴 때 손자가 낙심한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할아버지, 왜 근심만하고 계세요? 한 번 넘어져서 3년 산다면 두 번 넘어지면 6년 살고, 10번 넘어지고 30년도 살 수 있잖아요.” 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고개로 달려가서 수십 번 넘어지고 나서 입이 귀에 걸리더니 장수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풍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쉽게 생각을 맞춘다. 하지만 인생은 운명적 요소보다 선택적 요소로 결정된다. 우리 하나님의 계획실현을 알아보고 동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오늘은 성전건축에 자원일색이었던 그 현장을 좀 더 살펴보고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것을 배우자.
1) 감동(5)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הֵעִיר הָאֱלֹהִים 헤이르 하엘로힘 God stirred up<עור 아우르 awake, watching, stir up, excite> = 1:1<하나님께서 이방인 왕 고레스의 마음을 잡아 흔들고 휘저으며 감동시키셨고, 또 바벨론 포로로 살고 있던 족장들이나 제사장들, 레위인들, 그리고 일반 지파백성 할 것 없이 누구나 감동을 시켜주었음. 지금도 성령님은 생각나게 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8, 13>).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동을 받게 되는가?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행 10:19-20.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순종하려고 생각했더니 성령님이 정답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임). 루터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로마서를 가르치게 되어 강의안을 준비하다가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복음에는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 있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라고 이해했는데, 이게 어떻게 실현되는지 몰라서 밤낮으로 몸부림치면서 묵상하다가 17절 ‘나타나서’가 수동태로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라고 깨닫는 순간 루터는 “온전히 거듭났다는 확신과 열린 문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간 것 같았고 성경전체가 전혀 다르게 인식되어지더라.”라고 고백하여 놓았다(δικαιοσυνη γαρ θεου εν αυτω αποκαλυπτεται εκ πιστεως εις πιστιν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ο δε δικαιος εκ πιστεως ζησεται. is revealed). 성령의 감동을 요행으로 착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2) 지도자 정신(5) רָאשֵׁי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ראשׁ 로쉬 leader, head, top, first, beginning.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사 56:10-11 ≠ Herald. 멀리, 길게, 넓게 보는 예측력이 형편없이 부족하다는 책망임),
이해는 사랑함의 열매이지만 오해는 사랑함의 흉내가 맺은 열매이다. 그러므로 이해는 내면적인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 생기고 오해는 외면중심의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 싹튼다. 누구든지 사람을 외형적인 안목으로 바라볼수록 오해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명심하자. 사람이 외형적 안목을 중시하면 그 사람이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가치를 간과하게 된다. 진정한 가치는 흔히 마음중심에 있는 것이지 마음 밖으로 나와 있이 않다. 저와 여러분이 바라보는 이웃들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결함도 내면적인 안목으로 살펴보면 개성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걸레를 생각해 보라. 외형적인 안목으로 살펴보면 추하기 그지없지만, 내면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 숭고해지기 그지없다. 걸레가 더러운 것은 이웃들이 묻히고 다니는 더러움을 뒤집어쓰느라고 자신의 온 몸을 던져 헌신했기 때문이다. 또 지폐를 보자. 아무리 지저분하게 구겨져있는 지폐라도 여전히 그 값을 인정받는다. 지폐는 외모가 아니라 지폐에 허락된 돈의 값어치 때문이다. 저와 여러분은 머리구실, 리더정신, 첫째역할을 살리는 신앙생활을 해갈 때 자원분위기를 놓치지 않게 된다. 명심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성전건축(5) לַעֲלֹות לִבְנֹות אֶת־בֵּית יְהוָה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인식문제(觀)인데,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라는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다(לעלתֹ 라알로트 עלה 알라 to go, ascend, increase. 장소나 사건, 의미와 가치를 향하여 올라가 도달함. =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출 3:17, 17:3, 33:1. 출애굽> = ‘여호와의 성전건축’을 ‘제2의 출애굽’인 구원사건으로 인식함! 6-70년 전부터 살아 제2고향으로 정착했음. 1400km<3500리 길>을 도보로! 온가족과 함께 올라가서 성전건축을 하겠다고 자원했던 것은 구원의식이, 구원의 가치가, 구원의 확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음).
‘기다리는 님’(김 성수) 님은 갔습니다/ 살갑게 어루만지며/ 그리두 사랑 속에/ 정성 쏟아 또닥이 듯/ 아름다운 님/ 님은 갔습니다// 무더운 날 땀 흘리며/ 왔다가/ 서늘한 바람에/ 서쪽새 울던 밤에/ 님은 갔네요// 나뭇잎 붉게 물들면/ 고운 잎에 편지를 써서/ 보내마 하구/ 님은 그렇게 갔습니다// 붉은 잎 떨어져/ 바람에 날려 가고/ 부엉이 우는 밤이 되어도/ 님 소식은 없네요// 바람불고 눈 가루 날리는데/ 기다려도 오려하질 않네요// 이 겨울이 지날 즈음/ 님에 향기 순풍에 날려오려나/
이 시는 님을 사모하다 시커멓게 타가는 마음을 보게 한다. 여름 한 때 함께 지내다 서쪽새 울어대는 가을밤에 떠나간 님을, 늦 가을밤 부엉이 소리로 달래보지만 한 서린 눈물만 흘려내고, 긴긴 겨울밤을 새우며 멀찍한 봄 손님이길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런 사모함의 신앙이 6000리길도 자원하게 한다. 구원의 감격이 사모함을 이루어 기도해가는 믿음생활이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내 말로 들려진 그것을 챙겨 담자. 오늘 설교는 하나님의 언약실현에 자원동참함이었다. 감동순종 때문에! 살아있는 지도자 정신 때문에! 구원확신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