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0일 설교

November 10, 2019

                           “하나님이 넘기시매!”(대하 36:11-17 ‘망하고 마는 왕, 시드기야’) 19.11.10.

   사도행전 4장 37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37). 구브로 출신 요셉을 사도들이 ‘바나바’라고 불렀는데, 그는 위로나 권고, 헌신하는 일을 탁월하게 잘하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화해전문가(peace maker)이었다.

바나바가 화해전문가(peace maker)이었다는 분명한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두 군데만 살펴보아도 분명해진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행 9:26-28>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0-25).

   24절 말씀처럼 바나바는 신앙적으로도 대단한 덕을 갖춘 그리스도인이어서 존경받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울의 회심을 의심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바나바는 자청해서 사울을 사도들에게 변호해 주면서 화해시켰으니, 바나바가 없는 바울을 생각하기 어렵다. 또한 바울이 없는 바나바 역시 일류는 못 됐을 것이다. 초일류가 초신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충성과 진실과 믿음을 다 하나님의 큰 계획 중에 있다고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게 이루어져나갔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팔을 기꺼이 벌려준 사람, 바나바가 아름다운 신앙인이다. 오늘날도 바나바는 당연히 필요한데, 어디에서 볼 수 있던가?

   오늘 설교본문을 조용히 묵상하면서 읽고 있으면 바나바의 넉넉한 안목이 한없이 돋보이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4. 한 마디로 믿음 삶의 변질을 넘어 타락인데,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이란 말씀과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라는 말씀이 참으로 심각한 충격을 주는데, 그 실체를 보았는가? 제사장들의 어르신들이 이방풍속 중에서 가증한 것까지 따라 했다는 것임! ‘가증한’ תועבה 토에바 구역질나게 싫음. abominable thing<act 신앙지도자들 중에서 최고 어르신들까지 하나님이 보실 때 토해버릴 짓을 따라 했음. 바나바가 절실했음!>. 그래서 끝내 유다 왕국은 멸망했음!).

   '출가'(出家)는 가정과 세속의 인연을 끊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생활을 지속하는 삶을 말하는 전문용어이다. 좀 더 설명하면 출가는 개인적인 욕심의 삶으로부터 인류애의 삶으로 전환함이며, 닫힌 사랑의 개념에서 열려진 사랑의 개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출가는 단순한 가출이 아니라 초개인(人間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출가했다는 중이 ‘가출한 중’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아주 흔하다. 조화와 생화는 너무나 비슷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조화는 향기를 품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화가 풍겨내는 향기! 생명력을 입증해주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이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차별시킴이다.

   미켈란젤로가 지었다는 시이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 연약한 쪽배를 타고​/ 내 삶의 여정은 벌써 이르렀네/ 우리 모두의 항구에/ 우리의 온갖 좋고 나쁜 행실을 밝히고 결산하는 곳에// 나 이제야 알겠네/ 예술을 나의 왕과 우상으로 만들었던/ 애정 어린 상상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갈망한다는 것을.​// 두개의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지금/ 즐겁지만 헛된 사랑스런 생각들은 무엇인가/ 한 죽음은 분명하고/ 다른 죽음이 나를 위협하네/ 내가 그리지도 않고 조각하지도 않는다고.// 우리를 받아들이려 두 팔을 십자가로 펼쳤던/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내 영혼이 위로 받았으면....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요 화가이며 건축가였고 또 300편 넘는 시를 쓴 시인이었다. 그런데 인생의 노년기 때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예술만이 왕이라고 절대화시키며 살아온 삶을 신중하게 반성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후심판대에 서서 두려움과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 흔적을 모조리 적어놓은 기록을 받아들고, 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 영혼이 맞이하는 불구덩이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정받기를 애타게 사모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의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은 시드기야 왕 주변에는 거의 흉년이었다.

   자 그러면 시드기야 왕이 불구덩이를 막아줄 십자가를 그토록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를 좀 더 살펴보자.

   1) 예레미야(12)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 ‘겸손하지 아니’의 실제를 보자.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렘 32: 1-4)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38:5-6).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52:10-11. 지적당하는 설교를 싫어했음).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왕이었지만 달랐다.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단 4:17-19). 겸손과 교만의 차이는 하나님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느냐 무시하느냐의 차이이다. 시드기야 왕은 철저히 무시했다가 망했다. 자주 생각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부지런히(15 הַשְׁכֵּם)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הַשְׁכֵּם 하솨캄 ad. in the morning, early, without delay = 구체적으로 적극적인 다양성!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 19:1-4, 7).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4-17).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눅 2:15),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1-2).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걸 모른 사람이 없지만 하루하루에 믿음행위를 더하면 영생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다. 둘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만 남는다는 건 모르는 교인이 없지만 사랑에서 희생을 빼면 욕심이 된다는 건 알아차리는 교인은 드물다. 세상을 더하기로 살수록 인생은 쉽게 빼기로 변하고, 욕심을 더하기할수록 믿음생활은 자꾸 빼기로 된다. 유능한 신앙인은 더하기도 잘 하지만 빼기를 올바르게 잘한다. 시드기야 왕 시대에 덧셈과 뺄셈을 엉터리로 하다가 멸망하였다.

   3) 총체적(16)

   ‘비웃고’ ‘멸시하며’ ‘욕하여’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종과 그 종이 전하는 설교와 권면을 멀리하고 무시하며 거절하였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7-9).

   빈 깡통은 아무리 흔들어 봐도 조용하다. 속이 가득 찬 깡통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를 내는 깡통은 그 속에 무엇을 조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게 없는 사람은 그냥침묵하고 크게 아는 사람은 易地思之를 하느라고 침묵도 잘 한다. 무엇을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 시끄럽게 자주 떠들어댄다. 시드기야 왕 주변에 떠드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빈 깡통소리들이었다. 빈 깡통소리들을 조심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판에 새겨놓은 말씀교훈을 진지하게 확인해 보자. 오늘 설교는 시드기야 왕이 비통하게 침몰해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하셨다. 예레미야를 통한 말씀 거절했기 때문! 하나님이 아끼사 부지런히 보내심을 무시하다가! 총체적으로 무지함으로! 예레미야를 알아차리는 바나바가 흉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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