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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3일 설교

“분별력이 믿음수준이다!” (대하 35:20-25 ‘요시야 왕의 흠’) 19.10.13.

우리 한글의 창제원리를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1940년 안동 이한걸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권만 남아있다. 그 중에 안동본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주본은 2008년 8월에 상주에 사는 배익기 씨가 집수리 중에 발견하였다고 공개하였는데, 골동품 판매업자 조 모씨는 “2008년 7월 배씨가 자기 가게에서 고서적 두 상자를 30만 원에 사가면서 몰래 상주본을 훔쳐갔다.”며 배씨를 고발하였다. 결국 대법원은 2011년 5월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의 소유권자는 조씨라고 확정판결을 했다. 그래서 조씨는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서류로 기증을 하였고 2012년 별세했다. 다시 대법원은 지난 7월 상주본 소유권이 문화재청에 있다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배씨는 “국가가 가져가려면 상주본 가치의 10분의 1인 1000억 원을 내라.”고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 반환 서명운동을 벌여온 경북 상주고 2학년 김동윤 군을 포함하여 서울지역 고등학생과 함께 4명이, 지난 9일 한글날, 상주본 소장자인 배익기 씨의 골동품 가게로 찾아가 배 씨에게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을 반환해주기를 바라고 1000여 명의 학생이 염원을 담은 서명서와 200여 통의 손 편지와 멈춰진 벽시계도 전달하면서 “선생님이 상주본을 소유한 뒤부터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의 시간이 멈췄습니다. 이 시계를 빨리 되돌려주시길 바랍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정신을 살려서 상주본을 국민들이 다 볼 수 있게 국가에 반환하여 주세요.”라고 전하자, 배 씨는 “내가 상주본을 규장각 내부에서 꺼내온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노력해서 찾은 것” “국가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해주는 의무만 하면 된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배씨는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을 혼자 만 아는 어딘가에 숨겨놓고 있단다. 그래서 문화재청은 수십 차례 배 씨를 만나 반환을 설득하였지만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씨는 왜 이렇게 안타까운 옹고집을 부리고 있을까? 자신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그 한 가지에 집착하기 때문이다(이래서 易地思之<易我思之 易汝思之 易神思之>가 중요하다는 것임!).

오늘 설교본문도 ‘우물 안 개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21-23). 애굽 왕 느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유브라데 강가 갈그미스와 침략전쟁을 하겠다고 하고 요시야 왕은 절대로 못한다고 하다가 결국 전투로 맞섰는데 전사했다는 것임).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여기서 당장 떠오르는 질문을 만나게 된다. “왜 하나님은 요시야 왕을 그토록 값싼 전사를 당하게 하셨을까?”이다.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을 최고 수준으로 평가하셨던 말씀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우리라서, 요시야 왕의 죽음을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34:2>, 실제로 요시야 왕은 전국적으로 우상청소를 해냈고, 또 성전수리와 율법책 발견, 그 율법책에 따라 유월절 복구완수... 정말 어마어마한 순종을 하였음! 그렇다면 전사는 거기에 걸맞은 은혜와 축복일 수 없다는 생각임). 여기까지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깊고 복잡하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3-34).

어느 봄날 참새 부부가 밭에 걸어 다니면서 유채씨를 찾고 있었다. 그때 마침 제비 부부가 하늘을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유채씨를 찾던 남편 참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까 제비 부부가 신나게 쏜살같이 날아다니고 있는 게 궁금해서 물었단다. “제비야, 지금 뭐하는 거니?” “강남 가는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야.” “강남이 어딘데?” 그래서 제비는 강남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남은 항상 푸르고 따뜻하고 열매도 사시사철 풍성하고...” “야! 거기도 유채 있니?” “못 봤는데 아마 없을 거야.” “야, 그런 강남 너희나 가라. 나는 여기가 좋단다. 여기는 유채 밭이 많잖아.”

“천국에는 예수님이 왕으로 계시고, 진주 문이 열두 개이고, 고통과 아픔과 눈물이 없으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생명수 강가에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실과나무가 있고...” “거기에 돈도 있니?” “아니, 거기는 돈이 필요 없어.” “야, 그런 천국 너나 가라. 나는 안 갈 거야. 지금 나에게 요긴한 것은 돈이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땅의 것으로 생각이 꽉 차있는 교인들이 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하나님의 언약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눈물겹도록 순종하고 충성하던 요시야 왕이 한 순간에 자기고집에 빠지고 말았다.

자 그러면 요이야 왕이 왜 그리 쉽게 믿음의 길을 벗어났는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배우자.

1) 애굽 왕 느고(20)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그런데 이 전투는 왕하 23:29에도 기록되어 있다(‘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앗수르’를 잘 알아차려야 한다!(‘몽둥이’<사 10:5,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 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12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벌 אֶפְקֹד 에페코드 ‘I will punish’ דקפ 파카드 to visit, come to see, prove, punish>,

‘호세아 제구 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왕하 17:6-7). 23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23-24.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두들겨 패는 몽둥이로 앗수르를 사용하셨고, 이제 하나님이 애굽 왕 느고를 사용하여 앗수르를 벌하심을 전혀 몰라서 요이야 왕이 전투로 맞섬).

벼룩을 유리병 안에 넣고 뚜껑을 덮어놓으면, 자꾸 뚜껑에 부딪치다가 나중에 뚜껑을 없애줘도 그만큼만 뛰어오른단다. 벼룩 스스로 체념하게 된 것이다. 자기키보다 몇 백 배를 뛰어 오른 일은 옛 자랑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기도하고 체험하며 감사로 더 높은 언약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걱정과 불안, 어둠이 낙심에 갇히게 한다. 하나님은 ‘눌리게’ 하시지 않고 ‘누리게’ 하신다. 그 누림은 체험할수록 엄청나다. 아주 옛날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금광석을 돌멩이로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르면 금을 가지고도 거지로 산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엄청난 보혜사(counsellor)로 계신다. 얼마든지 지혜롭고 유능해질 수 있다. 체험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싫어하고(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וְלֹא־הֵסֵב 웨로-헤셉 and would not turn. change, turn, transfer. 당연히 바꾸고 옮겨 탔어야 했음!) 그러면 요시야 왕이 왜 바꾸지 못했는가? 이유는 세 가지인데 참모부족<34:20-23>과 기도부족<민 10:33-36>, 분별력 부족<‘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 5:14>.

사람은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 새벽을 깨우고 기도시간을 갖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 기도만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게 한다. 그렇다면 새벽기도 할 고난도 없이 살아가는 교인은 불쌍하다. 제자들이 쉽게 노 저을 때, 예수님도 그 배에서 주무셨다. 하나님은 요셉을 사랑하셨지만 감옥에 집어넣으셨고, 다니엘이 성령충만했지만 사자굴에 집어넣으셨다. 그 이유는 연단이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깨닫게 함이셨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을 감추려 한다. 그래서 신앙삶에도 거품이 있다. 잘 믿는 척, 거룩한 척... 그 거품이 위선과 외식, 대충함을 감추고 있다. 믿음은 자기체면도 아니며, 오기도 깡도 아니며, 신념도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 체험이고 관계이며 권능이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기에 형제를 용서할 수 있었다. 바울은 날마다 죽었기에 유라굴로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듣고 전했다. 신앙은 사람에게서 생기는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할 때 생기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도 연단을 받고 연단 받은 분들과 친하길 축복한다.

3) 애가(25)

요시야 왕이 죽자 선지자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애가는 대단한 교훈을 간직하고 있었다(하나님은 요시야 왕에게 재앙을 보지 않고 별세하도록 축복계획을 세움<34:28> 그리고 예레미야는 슬퍼할 이는 요시야가 아니고 아들이라고 예언했음<렘 22:11, 18-19. 잡혀가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을 잘 보라는 것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당한 이기선 목사님에게 일본경찰이 물었단다. “천황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 사형시키라 하는데 어떻게 하겠소?” “그러면 하나님나라의 법도 지키고, 국가법도 순종해야지요. 하나님나라의 법은 신사참배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하니 그렇게 믿으면 되고, 국가법은 그렇게 하면 죽인다고 하니 죽으면 되겠지요.”

이런 게 살아있는 믿음이다. 올바른 신앙지식에 따른 신앙관대로 판단하고 생활하였다면 순종이요 충성이니 비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들려온 하나님의 깨우침에 우리믿음 삶의 축을 맞추자. 오늘 설교본문은 요시야 왕의 마지막 전사장면이다. 하나님의 뜻 인식 부족 때문에! 참모와 기도와 지각부족 때문에! 애가의 가르침에 못 미쳐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 신호등으로 역할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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