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5일 설교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을!” (대하 34:1-7 ‘요시야 왕의 믿음 삶’) 19.8.25.
세계에서 자기가 사는 곳을 가장 만족한 곳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발리 사람들이라고 한다. 발리 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곳이 지상에서 가장 좋은 천국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기에 발리 사람이 신혼여행을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란다. 이 사실을 듣고 미국의 노만 핀센트 필 목사님이 직접 발리 섬으로 가서 일주일 동안 조사해보았단다. 그랬더니 정말 발리 사람들은 행복함을 실감하며 만족하게 살아가고 있더란다. 그렇다고 그들은 큰 산업시설이나 재미나는 오락 레저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행복해했던 이유는 다섯 가지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①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② “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is simple) ③ “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④ “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⑤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섬에서 만족하게 살고 있습니다.”(We live and have a satisfaction on a beautiful island).
이 세상에서 만족을 보장해주는 곳이라면 그 곳에서 살고 싶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발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을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낙원으로 생각한다니까 순진하기도 하지만 부럽지 않나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설교본문에 요시야 왕에 대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와야아스 하야살 וַיַּעַשׂ הַיָּשָׁר and he did the right<upright, approve>.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심)라고 기록해 놓았다. 우리 하나님이 이 정도로 칭찬하신 경우라면 어떤 일을 기대해도 좋은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9- 11).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도 하신다는 것이다. 시 107편 말씀으로 예측해 보면 요시야 왕은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마가복음 10장에 맹인 바디매오를 기록해 놓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현장 예루살렘 성으로 가실 때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떠나면서 맹인거지 바디매오를 지나쳤다. 그는 가난, 더러움, 무시당함의 대명사였다. 그런 그가 인생을 뒤바꾸게 됐다. 바디매오는 눈을 떴고, 천국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희한한 일이 일어났는가? 마가복음 10장 46-48절에 이렇게 대답해 놓았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나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그래서 바디매오는 ‘나도 그분을 만나서 눈을 뜨리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비록 자신은 구걸인생이지만 그의 중심에 예수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바디매오가 들었고, 그 한 번의 기회로 자기인생을 바꾼 것이다.
바로 이런 게 ‘항상 사모함’이며 ‘산 소망’이다. 만약에 바디매오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도 다음으로 미뤘더라면 아찔해진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생기지만 누구나 그 기회를 잡는 게 아니다. 소망이 삶을 만드는 성도만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다. 똑같은 예배시간에 설교를 들어도 깨달은 성도가 있고, 깨달음을 쏟는 교인이 있다. 그 차이는 왜 생기는가? 예배를 드리는 자의 믿음중심 때문이다. 성막의 번제단처럼 네모반듯한 믿음중심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잘 알아차리는 법이다.
지난 엿새 동안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종하려고 애쓰신 분들은 오늘 예배시간에 받을 깨달음으로 설레며 기다린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 아멘생활할 각오를 단단히 한다. 바로 이런 성도일수록 기적의 하나님을 쉽게 만난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그 기회가 지나가는 중이다. 지금 주어지는 기회가 우리의 내일을 얼마든지 바꾸게 한다. 아무리 힘들고 작아져도 주님이 만나주시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치유될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으며, 창조수준의 은혜와 축복으로 삶을 역전시킬 수 있다. 예배시간에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으시고 그 예수님을 마음에, 가정에, 일터에, 모신 후에 ‘오직 예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기다리면 된다. 우리 주님께서 놀라운 새 시대를 시작하실 것이다.
자 그러면 요시야 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를 믿음으로 잘 순종하여 우리의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체험을 하게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1) 다윗 왕의 길(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 3중 칭찬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만 해내도 대단한 모범이다. 그런데 ‘다윗의 길로 걸어간’ 신앙생활은 자타가 인정하는 우수함이다(히스기야 왕과 두 분 뿐임.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29:2>). 요시야 왕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기까지 했다는 것은 최고 1인자를 의미한다. 요시야 왕은 우리 하나님이 보실 때 믿음생활을 다윗 왕을 잘 따랐다.
‘기독교대학교의 하버드’라고 불리고 있는 미국 시카고의 명문 휘튼대학교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감리교 목사님들이 1860년에 세웠단다. 이 학교의 중앙 홀 2층에는 휘튼대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님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있는데 그중에 몇몇 사진에는 십자가 표시를 해 놓았단다. 그 이유는 낯선 문화와 생활환경에서 전도하다 목숨을 바치고 순교로 일생을 마감했다는 표시란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아오카 부족에게 전도하다가 순교를 당한 선교사로 유명한 짐 엘리엇도 이 학교 출신이다. 짐 엘리엇은 학교를 다닐 때 묵상한 내용을 노트에 적곤 했는데 그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대부분이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 한다. 젊음도 지나가고, 명성과 쾌락도 결국 지나간다. 아무리 많은 물질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최후순간까지 십자가를 붙드는 그리스도인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바울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이 진리는 암기로 되는 게 아니고 체험으로만 깨달아지는 바이다. 체험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팔년(3)
‘왕위에 있는지 팔년에... 하나님을 찾고 제 십이 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요시야 왕은 8살 때 왕이 되었다. 그러면 16살 때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찾았고, 20살 때 우상청소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매듭은 회개인데, 회개 중에서도 최고최대는 우상청소이다. 회개는 우리 마음과 사상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고, 우상청소는 하나님을 모시려고 모든 것을 치우는 것이다.
1930년 3월 13일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소금 행진’을 시작한 날이다. 간디와 추종자 78명은 24일 동안 인도를 세로로 가로질러 약 380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었다. 발바닥에 물집들이 잡히고 터져나가도 간디의 일행은 아라비아 해변에 도착해서 손으로 해안가의 소금을 집어 올리는 상징적 행동을 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통치하면서 소금을 영국의 독점품목으로 만들었다. 인도의 바다에서 인도인의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소금을 만들고 높은 세금을 붙여 인도인에게 다시 팔았다. 그래서 소금을 인도인이 당연히 영국정부에게만 살 수 있다는 '소금법’에 대하여 간디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인도의 해안에서 6만 여명이 간디의 뜻을 따라 소금을 만들어 거래하다가 구속됐고, 32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지만 결국 영국정부는 독립투쟁이자 비폭력 저항운동에 손을 들었다. 간디는 “폭력이 짐승의 법칙이라면 비폭력은 인류의 법칙”이라고 했다.
소신을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맞다. 신앙지식을 생활할 때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산 믿음! 산 소망! 산 사랑! 이다. 이렇게 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생활을 하는 우리이길 축복한다. 아멘.
3) 제사장들의 뼈(5)
‘제사장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왕하 23:5-7). 그렇다면 철저한 우상숭배와 타락을 철저하게 뿌리 뽑았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군인 한 명이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붙잡혔는데, 나폴레옹 군대의 군사들이 포로로 잡은 러시아의 병사에게 이제는 그가 러시아의 군인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군대에 속하게 됐다는 표시로 그의 팔에 N자를 새겨주었더니 러시아 병사는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오?” 나폴레옹의 군인 왈 “그 N자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황제에게 속한 군인이라는 표시야.” 그 말을 듣자마자 러시아 군사는 칼을 뽑아 자신의 팔을 잘라버리더란다. 그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팔을 내던지며 하는 말이 “내게는 한 주인만 있을 따름이요. 나에게 두 주인은 없소. 나는 오직 러시아 황제께만 속해 있소!”하더란다. 바로 이런 정도의 결심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하나님께 충분하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가 가리키는 화살표를 보자. 요시야 왕의 31년 믿음평가이다. 정직! 다윗의 길! 좌우균형! 이 3중칭찬을 들었던 왕이 요시야이었다. 다윗 신앙에 정통했고, 십대청년의 소신파였고, 철저한 우상청소 때문이었다. 저와 여러분도 작심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요시야 왕처럼 믿음생활을 해가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