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19년 8월 18일 설교

“이 년이라니!” (대하 33:21-25 ‘비운의 아몬 왕’) 19.8.18.

한 노인이 손자와 함께 도끼자루로 적합한 히코리 나무를 구하러 산으로 갔단다. 그들은 뒷산에서 히코리 나무들을 보았다. 그러자 손자가 말했다. "할아버지, 도끼자루로 안성맞춤인 히코리 나무들이 있네요. 여기서 고르시지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대답했다. “낮은 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는 아무리 히코리 나무라도 도끼자루로 쓸 수 없단다. 높은 곳을 휩쓸고 몰아치는 그 폭풍우를 격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란다. 사나운 바람에 이리저리로 마구 뒤흔들리는 나무들이 있는 저 높은 곳으로 가자. 그 곳에 있는 나무들이라야 매서운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그래야 아주 튼튼한 도끼자루 노릇을 할 수 있단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자 하나님께서도 곧바로 40년 광야훈련을 받게 하셨고 우리 예수님께서도 40일 광야금식기도로 사탄의 유혹을 100% 이겨내시고, 3년 공생애 삶을 하나님의 언약성취로 완성해가셨다. 하나님의 축복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자질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철물공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다녔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하자 8년 동안 믿지 않을 때보다 훨씬 많은 시련을 당했단다. 그 과정을 쭉 지켜보던 불신자 친구가 어느 날 그에게 일부러 이런 말을 하더란다. "자네는 예수를 믿고 나서 더 많은 시련을 당한 것 같은데 그래도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을 보면 진정으로 딱하기만 하네." 그러자 철물공 아저씨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쇠를 보게나. 마차의 스프링인데, 불에 달구고 두드리고 찬물에 넣었다가, 다시 달구고 또 두드리고..... 이렇게 몇 번씩 해야 단단해진다네. 만약 쇠가 무르면 스프링으로 만들지 못하고 말지. 쇠 덩이를 이렇게 연단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맡은 봉사를 충성으로 해 가도록 연단하시는 그걸 자네가 바라보았고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세.”

우리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하시려고 좀 험해 보이는 시련세월을 지나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오늘 설교본문은 아몬 왕을 참으로 안쓰럽게 보여준다(21, 24). 아몬 왕은 그 유명한 히스기야 왕의 손자요, 므낫세 왕의 세자이었는데, 므낫세는 황제지만 전쟁포로로 납치당하고 그 극단의 처지에서 기도응답을 체험하였다. 아몬은 22살에 임금님 자리에 올랐다가 단 2년 후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런 경우에 통치기간을 보나, 요절한 나이로 보나, 그 가정사정을 보더라도 ‘비운’ ‘비참’ ‘비통’이란 말을 더욱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잠시 아몬 왕을 묵상하노라면 이런 생각에 잠긴다.

욕심에 맞춰진 소유와 누림에서 그리스도인의 첫 걸음은 시작된다. 하지만 그 신앙생활의 완성은 온전한 포기함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인데도 탐심의 목마름과 갈등과 속상함으로 살아가 수 있기에, 날마다 탐욕의 충동에서 태평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많은 것을 요구하며 기대하고, 그 요구들이 지연될 때 쉽게 속상해 한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도를 올바로 깨닫게 되면 그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 그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을 택한다. 자신은 살고 싶은데 성령님은 죽으라고 생각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하면 ‘예수님을 누리려고 믿는 게 아니라 이루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올바로 믿는 축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는 게 아니라 더 주고 포기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삶이요, 그 줌과 포기로 이룬 것을 천국에 쌓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현저히 다르다. 세상은 많은 소유를 부자나 성공이라 평하지만 예수님은 주고 포기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를 부자요, 믿음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언약성취의 신앙관에 철저해야 한다. 예수님은 천국보좌 대신 이 땅에서 화목제물을 택하셨고, 예루살렘 대신 베들레헴 말구유를 선택하셨다. 사실 모세도 애굽의 왕자를 마다하고 광야를 선택하였다. 바울도 ‘잘 나가던’ 로마시민권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도의 증인을 선택했다. 바울의 사상과 심장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녹아 있었다. 영성인을 결정하는 것은 소유함의 크기보다 언약성취를 위한 동참이다. 예수님을 믿으니 누리는 소유가 많아져서 축복이고 은혜라고 감사하는가? 아니면 포기하여 언약성취를 이룬 게 많기 때문인가? 예수님 `의 십자가를 진정 화목제물로 알기에 그래서 그 십자가를 못 잊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섰는가?

우리 한국교회의 실태를 사실대로 말해보자.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는 없고 그러니 덧셈표 십자가로 개조해서 핸드백처럼 어깨에 걸치고 다니지 않는가? 그래서 경건의 모양만 화려하지 응답과 능력은 한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탐욕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름과 독자를 포기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를 선물하셨고, 포기한 그 예배 때 ‘준비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다. 기막힌 포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말구유 선택, 요단강 세례와 광야금식의 순종이 진정한 성탄절이요 부활절이며 감사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 딱 2년에 암살로 끝난 왕이 아몬이었다. 할아버지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아버지 므낫세 왕은 55년, 아들 요시아 왕은 31년을 통치기간으로 허락받은 것을 보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자 그러면 아몬 왕을 좀 더 살펴보면서 그 요인을 찾아보고 저와 여러분의 가르침으로 삼자.

1) 보시기에(2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한 마디로 우리 하나님이 평가하심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3-15).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해야 훌륭하고 아름답고 잘 믿는 것이다. 아멘.

미국의 정치가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3.19-1925.7.26)은 경건한 장로교 신자였단다. 그가 하원의원이었을 때, 이집트의 카이로를 방문하여, 한 골동품 가게에서 3,000년 된 미라에 곡식단지가 있는 걸 보았는데, 그 속에 완두콩이 들어있더란다. 돌처럼 단단하고 쪼글쪼글하였다. 브라이언은 신기한 생각에 싼 값으로 그 콩알을 샀고, 시험 삼아 그 콩알을 자택 마당에 심고 물을 주었단다. 며칠 후에 3천년 된 콩알이 싹을 틔우고 솟아나와 자라더니 열매까지 맺더란다. 놀랍게도 콩알의 씨방은 3천년 동안이나 살아있었다.

브라이언은 3천년 된 콩의 기적을 전하면서 전도했는데, “3천년 된 콩도 땅에 심었더니 열매를 맺었습니다. 1년생 식물도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겠습니까?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합당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게 일을 성취시키신다. 체험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우상(22)

아몬 왕은 임금님 자리에 오르자마자 우상숭배부터 집중했다가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생활에서 우상숭배는 치명적인 독약이다. 십계명에도 우상숭배만 특별히 삼사 대까지 그 죄를 갚겠다고 기록해 놓았다. 우리 하나님은 도둑질도, 간음도, 살인도 그토록 엄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세기 이태리가 낳은 유명한 화가이고 조각가이며 건축가이지 과학자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화가로서 완숙해가는 43세 때,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에 교회의 식당벽면에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단다. 다빈치는 성서의 기록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그 기록을 해석하여 두드러지게 전달하려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쪽에 12제자가 셋씩 그룹을 지어서 예수님의 오른쪽에 6명, 왼쪽에 6명이 앉아 있는 의도적인 균형배치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뒤쪽에 있는 창문은 후광의 역할=로, 동시에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게 했다. 또 건축물의 실내벽도 사건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를 향하게 원근법으로 그렸다.

작품을 완성하고 다빈치는 절친한 친구를 불려서 그림을 보여주며 의견을 들어보았단다. 대단한 걸작을 본 친구는 감탄했다. 특히 예수님이 손으로 들고 계시는 은잔이 어찌나 빛나던지 그 잔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느낀 그대로 다빈치에게 소감을 말했다. 소감을 다 들은 후에 다빈치는 붓을 들고 빛나던 은잔을 지워버리고 설명하기를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중심이 될 수 없다네."

맞다. 하지만 그림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것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면, 그게 우상병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자신을 점검하고 바로잡자. 아멘.

3) 더욱(23)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 하더니’ 아몬 왕은 진정 할 바는 하지 않고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였다는 지적이다. 아몬 왕은 22살에 왕이 되었고(21), 아버지는 55년을 통치했으니까 33년 통치 때 태어났다(55-22=33). 그리고 16살 때 득남했다(24-8=16). 그렇다면 아버지 므낫세 왕은 뼈에 사무친 기도체험을 친 자식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다(13). 하지만 아몬 왕이 우상숭배에 집착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교훈을 마이동풍(馬耳東風 ≠ 진주를 개에게!<마 7:6>) 정도였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유적지나 풍광이 좋은 산하에 가 보면 신경질 나도록 새겨놓은 이름들을 볼 수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은 특유한 의식구조를 가졌나 본다. 절 기둥이나 서까래, 심지어 대들보에도 써 놓았고, 경주 석굴암을 보수할 때 보니까 부처의 이마와 콧등에까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란다. 그 허전한 마음에 우리 예수님(성경말씀, 성령님)을 채워야 우상숭배를 예방할 수 있다.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사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바위에, 절간 대들보에, 부처의 이마에까지 이름을 새기는 이 심정이 허전해 있으면 우상숭배로 돌변하게 된다. 그 허전한 마음에 예수님(말씀, 성령님)을 채워야 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이 가리켜주는 화살표를 확인해 보자. 아몬 왕의 통치2년! 너무나 단명하고 안타깝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해서! 우상숭배 때문에! 뼈에 사무친 아버지 교훈을 무시하다가! 저와 여러분에게 자주 생각나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살아있는 화살표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최근 게시물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