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8일 설교
“이르셨으나!” (대하 33:1-10 ‘우상숭배의 끈질김’) 19.7.28.
투명한 유리병 두 개가 모두 깨끗하게 소독되어 있는데, 한 유리병에 마실 물을 가득히 채우고, 다른 유리병은 그냥 비워둔다면, 유리병에 채운 물을 ‘순수하다’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그냥 비워둔 유리병은 ‘순진하다’라고 할 수 있다. 순수한 병은 마실 물로 가득 채워져 있어,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갈 틈이 없으니 깨끗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순진한 병은 비어 있으니, 깨끗한 물을 가득 채워 순수할 수 있고, 더러운 물이 섞여 들어가 순수를 망쳐놓을 수도 있다. ‘순수함’의 사전적 의미는 ‘대상 그 자체에 전혀 이질적인 잡것이 섞이지 않음’ ‘마음속에 사사로운 욕심이나 불순한 생각이 없음’이다. 그리고 ‘순진함’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꾸밈이 없고 참됨’ ‘세상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함’이다.
사람이 ‘순진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좀 ‘어리석다’는 평가이다. 하지만 ‘순수하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인생을 나름대로 뚜렷한 자신의 소신과 주관에 물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순진함은 어릴 때는 좋은 말이지만 어른이 되어도 순진하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순수함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노인층인데도 순수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선하고 정직하며 자기언행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진정으로 순수한 사람은 어디서나 진실하고, 언제나 한결같으며, 누가 봐도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으면 순수해져서 대개 소신파로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남의 잘못에 관용하면서 자신에게는 엄격해 한다. 현실적으로 순수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게 되지 않다. 그럴지라도 성경이나 기도로 십자가 화목제물에 정통하면 순수함을 이룰 수 있다.
저는 은혜로 교회의 목사인지라. 우리 교회에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면 순수함을 사모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배우는 신앙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오늘 설교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므낫세 왕이 히스기야 왕의 아들이었음을 생각하노라면 순수함을 더욱 절감하게 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1-2. 사람이 12살 때 왕좌에 올라 55년을 통치했다면 67세에 은퇴하였으니 한평생을 황제로 살아간 셈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므낫세 왕은 그 부러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11 이런 황제삶이라면 차라리 그만두는 게 훨씬 나음. 그런데 므낫세 왕의 황제 삶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이삭을 좀 살펴보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 26:1-3, 5-6, 12-13).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 31: 20-21). 그렇다면 이삭처럼 므낫세 왕도 아버지 히스기야 왕 때문에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므낫세 왕은 형통은 고사하고 손발을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으니 비참! 비통! 기절할 신세이었다!
너무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가? ‘하나님, 이제 그만 좀 흔드시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왜 나만 꺽으시냐’고 반항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흔드심은 여전할 때가 있다. ‘단단한 쇠는 두드려 만든다.’는 서양속담이 있다. 하나님의 두드리심이 믿음 삶을 철들게 하고, 믿음생활의 원리와 법칙을 깨닫게 한다. 큰 축복과 큰 응답은 반드시 큰 흔드심을 통한 큰 믿음으로 주어지곤 한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 말고 거저주시는 게 별로 없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흔들고 아들 이삭을 주셨고, 그 아들을 또 모리아 산에서 흔드신 다음에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체험시켰다. 야곱은 21년 동안 계속 험하게 흔들리다가 마침내 얍복강에서 항복하자 끝났다. 요셉은 13년간 흔들렸고, 모세는 80년이었다. 그래도 감사하겠느냐? 그래도 기도하겠느냐? 그래도 충성하겠느냐? 이래도 믿음으로 살겠느냐?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가 3:33 하나님은 괴롭히지 않고 올바로 고치심).
므낫세 왕이 분명히 히스기야 왕의 아들이었지만 진정한 믿음을 확인하는 우리 하나님의 저울에서 그는 여지없이 모자람을 보여주었다. 이런 평가는 그 누구도 예외 받지 못한다.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3-14).
그러면 므낫세 왕을 좀 더 살펴보고 아버지를 통한 축복의 몫을 놓친 그 이유를 알아보자.
1) 다시(3)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런 경우를 두고 패가망신(敗家亡身) ‘망나니 짓’이라고 한다. 므낫세 왕은 부모의 빛나는 유업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렸기 때문이다. 선친 히스기야 왕의 평생창업을 너무나도 쉽게 망가뜨리고 짓밟아 쓰러버렸다. 그것도 우상숭배로 하였기 때문에 언약의 복이 축복의 몫이, 복 실현이 취소당하고 말았다(‘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6下>,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구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11>). 그러므로 믿음생활은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처럼 계보를 이어가며 진보되어야 축복이다.
조선왕조 세조는 사주를 쉽게 풀어 책으로 집필하려고 했다. 그래서 당대의 문장가인 서거정에게 명령했다. 서거정은 박식한 지식인답게 사주팔자를 연구한 결과 인간의 운명총수는 51만 8천 4백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 조선인구가 1,500만 명이었다. 따라서 조선 땅에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이 29명이 생김으로 사주팔자는 원천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단다. 참고로 지금 우리나라 인구가 약 5천만 명 정도인데 그렇다면 약 100명 정도는 같은 사주팔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성종 임금은 자기와 사주가 똑같은 과부가 성안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녀에게 살아온 여정을 물어보니 성종이 세자책봉 때 그 여인은 어머니와 사별하였다. 성종이 임금으로 등극할 때 그 여인은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임금은 경사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그 여인은 불행한 일을 당했다. 이 사실을 알고 성종은 세상에 못 믿을 게 사주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사주팔자에 매여서 살고 있는 자들이 있다. 므낫세 왕이 사주팔자 논리에 속아 망했다.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2) 여호와의 전(7)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더라.’ 이 말씀을 통하여 폭로하려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교회들은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상숭배의 그 열정이 심각했다(‘하나님의 전에’<7>,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5>). 하나님의 성전 안팎에 온통 우상숭배를 상징하는 장식을 세웠으니까 발광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워낭소리’라는 영화 중에 할아버지가 소를 팔고 사는 시장에서 ‘부리는 소’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부리는 소 있나?” “부리는 소? 요즘 없어요.”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지만 ‘없다!’는 대답만 듣는다. 그런데 ‘부리는 소’는 ‘쟁기질’을 할 수 있는 일소를 가리킨 말이다. 옛날에는 농사일을 일소가 다 했는데 지금은 기계로 하기 때문에 일소를 보는 게 쉽지 않다. 요즘에는 거의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먹이는 소’ 일색이다.
사실상 소는 사람들이 정한대로 ‘부리는 소’가 되기도 하고 ‘먹이는 소’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부리는 인간’이 될 수도 있고 ‘먹이는 인간’이 될 수도 있다. 돼지처럼 먹고 자는 재미로 살다가 잡아먹혀 죽는 날만 기다리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먹이는 인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궁리를 하면서 창의적인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부리는 인간’이다. 저는 요즈음 우리나라 교인들이 이토록 무능해졌는지 분노할 지경인데,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교회의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입맛대로 좋은 것들만 먹이는 목회에 급급했기에 ‘먹이는 소’와 같은 교인들로 키웠다는 평가이다. 우리 하나님의 40년 광야훈련처럼 예수님의 3년 제자훈련처럼, 여러 가지로 훈련실습을 반복시키고 때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야단도 쳤어야 ‘부리는 소’처럼 일도 잘하고 순종도 잘 할 텐데 너무 과잉보호로, 편리위주로 목회를 하였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올바른 결단으로 선택할 줄 알아야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이다. 아멘.
3) 꾀임(9)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תעה 타아 to wander, go astray, err, injury) 므낫세 왕은 자신만 빗나간 게 아니라 남까지 빗나가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혼나고 비참해졌다. 몰라서 그랬을까? (신 12:13-14, 대하 7:12, 16).
세 사람이 어느 책을 읽었다. 한 사람은 이야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그 다음 이야기가 분명 나올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작가를 만나보았다. 작가는 중얼거리듯 무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은 “거 봐!”하며, “자기 말이 맞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도 “들었지?”하며, “자기 말이 맞다”고 말하자, 또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다시 일제히 작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가는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한 사람은 “그래도 모르겠니?”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주었고, 다른 사람은 “이제 알겠지?”하며 짜증을 냈고, 또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이야기에서 세 사람 중에 작가자신과 올바른 대화를 한 분은 누구인가? ① 이야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 ② 그 다음 이야기가 분명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 ③ 없다! ④ 모르겠다고 생각한 사람. 이 이야기에서 작가가 하나님이라면 작가의 책은 성경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성경을 읽는 교인들이다. 그렇다면 세 사람 중 누가 성경을 올바로 읽었나?의 질문이 성립한다. 성경으로 올바른 지식을 터득해야 ‘꾀임짓’을 예방하게 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성령님이 우리 자신에게 주신 화살표를 챙기자. 오늘 설교핵심은 므낫세 왕이 우상숭배로 망함이다. 아버지의 유업을 우상숭배로 망가뜨려서! 여호와의 성전을 우상숭배로 더럽혀서! 꾀임시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