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 설교

June 16, 2019

                                            “진보하는 믿음 삶!” (대하 31:1-10 ‘개혁신앙생활’) 19.6.16.

   에베소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여기에 ‘복종’과 ‘사랑’이란 말이 나오는데, 사랑이라는 단어 아가페는 육체적 애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데 책임을 다하는 자이다. 혹시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라는 이 말을 못마땅해 할 수 있다. 그래서 남편이 여자의 머리됨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공동체에는 모두 머리가 있다. 나라에는 대통령이, 학교는 교장선생님이, 회사는 회장이 머리이고, 교회는 담임목사님이 머리로 있다. 그런데 그 머리가 다른 지체보다 더 뛰어나니 우선한다는 게 아니다. 어느 공동체이든 책임지고 판단하고 기획하는 머리가 있어야 하는데, 가정마다 남편이 그 역할을 맡으라는 뜻이다. 여자는 능력이 모자라고, 가치도 떨어지고... 그런 관점이 아니라, 이 가정을 건강하고 건전한 생명체로 하기 위해 그 기능적인 역할분담을 남편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과 아내는 이미 하나로 존재하지 둘로 따로 있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엡 5: 31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밝혀놓았다.

   어떠한 생물이나 머리가 둘이라면 틀림없는 괴물이다. 그래서 바울은 가정에서 아내의 머리됨은 남편이 맡아 건강한 생명질서를 이루라고 했던 것이다. 아내가 남편께 복종하는 것은 존경함으로 이루어지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은 아가페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한 몸을 이루고, 그러한 삶에서 가정의 평안과 방향을 책임지고 판단하고 계획하는 역할은 남편이 맡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올바른 역할과 관계가 제대로 될 때, 그 가정이든 교회이든 나라가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올바른 역할과 관계에서 벗어나면, 영혼들이 상처를 받고 기도생활도 안 되고 가정의 화목은 금가고 심하면 결손가정으로 변질된다.

   그런데 오늘 설교본문은 신앙공동체를 축복으로 잘 인도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8, 10). 히스기야 왕이 주도한 유월절복구 잔치가 축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퍽 다행이지요. 이건 꼭 배워 활용할 바이다. 신앙행위는 무조건 전부 축복으로 이어지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염려 μεριμναω 메림나오 dividing the mind, 할까 말까, 좋을까 나쁠까. 그게 anxious. 족하다 χρεια 크레이아 needful, require). 염려, 근심, 불평하며 많이 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가지만으로 줄여서 감사함으로 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말씀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περισσευω 페리스쉬오 to be over and above, to be superfluous, abound. 주의 일을 넘치는 기쁨과 감사, 확신으로 자원하여 하라! 고전 15:58).

   어느 집사님이 하는 말이다. “목사님, 저분이 한 때는 믿음이 엄청났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구요.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는데 시험에 들더니 지금은 저렇게 넘어져 있답니다.” 생각해 보자. 엄청난 믿음이 시험에 들어 넘어질 수 있는가? 사실은 교회를 믿거나 목회자를 믿다가 교회생활을 그만둔 게 사실 아닐까? 성경은 믿음을 정금으로 비유하였다. 정금은 불변한다. 진흙 속에 파묻혀 있어도 정금이고 망치로 두들겨 맞아도 정금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 식으로 산다면 ‘표절을 해도 논문만 통과하면 된다.’ ‘도둑질 장사라도 돈만 벌면 된다.’ ‘부정불법이라도 교인 숫자만 늘이면 교회부흥이다’ 이게 맞는 것이 되고, 그래서 엉망천지인 사회로 둔갑해가고 만다. 모로 갈 서울이라면 가지 않을 신앙관이 참 축복이고 진짜 은혜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우들에게 슬프게도 ‘심판을 믿습니까?’라고 확인해보고 싶은 징조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경건의 모양을 갖출 수 있고 교회생활에 열심을 낼 수 있다. 올바름과 비슷함은 하나일 수 없다. 물론 믿음은 신령한 체험을 하게 한다. 하지만 신비한 체험이기에 믿음을 정당화 시킬 수 없다. 믿음이 삶을 형통하게 하지만 형통함만으로 정금믿음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설교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써 히스기야 왕의 축복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이라고 밝혀주고 있다. 아멘.

   자 그러면 히스기야 왕은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복으로 이어갔는지 그것에 집중하여 살펴보자.

    1) 나가서(1)

    ‘나가서’ 조금도 어렵지 않는 말씀인데, 아직 그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분은 ‘끝나매 거기에 있는’ 이 말씀과 연관시키면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우리의 현실로 바꾸면 ‘예배 후에’ ‘기도 후에’ ‘성경을 읽고 쓴 후에’이다. 우리가 중요시할 바는 나가서 한 일인데, 그것은 우상청소이었다. 그것도 집으로 가기 전에!

베트남 전쟁 때 전투 중에 미군병사가 총상을 당했단다. 빗발치는 총알 때문에 그 병사를 구해낼 엄두도 못했다. 그런데 한 전우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부상병이 있는 곳으로 막 뛰어갔다. 지휘관은 물론 모든 병사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사망을 직감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우는 부상병을 업고 돌아왔다. 그래서 두 명 모두 살았다. 전투가 다 끝나고 병사들은 부대로 복귀했다. 소대장이 부상병을 구출한 전우를 불러서 물었다. “너는 그 부상병사에게 달려가기 전에 왜 시계를 보았지?” “예, 제가 출국할 때에 제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매일 3번씩 5시, 12시, 9시가 되면 1시간 동안 기도할 테니 믿음으로 출병하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계를 보았더니 바로 12시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전우를 살리려고 달려갔습니다.”

    기도의 능력이 이 간증의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꼭 기도시간에만 전능하게 일하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도 있다. 복음의 권능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도삶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 중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가 절박하게 필요한 때가 있음을 깨닫고 평소에 실행하는 분은 많지 않다. 예배와 삶을 일치시키자. 아멘.

    2) 직임(2)

   ‘직임을 행하게 하되’ 제사장 반을 가동했다는 것인데, 성전활성화, 예배정상화라고 할 수 있고, 우상청소를 외적인 회개라고 한다면 성전활성화는 내적인 회개인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올바른 믿음생활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사도 바울도 일치한 말을 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2-3). 무엇이 열심이고 선함이며 유능함인지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열아홉에 장원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넘쳐나는 게 자만심이었다. 어느 날 그가 평범한 절을 찾아가 중에게 물었다. “스님, 군수인 제가 무엇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까?” “그건 어렵지 않지요.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중이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권했다. 그는 못 이기는 척하고 자리에 앉았다. 중은 맹사성의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고함치듯이 말했다. 하지만 중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랐다. 그러면서 잔뜩 화가 난 맹사성을 정색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쉽게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다가 문지방에 쿵! 부딪히고 말았단다. 그러자 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은 없답니다.”

   3) 몫의 음식(4)

   당연한 대가로 정해진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의 몫을 마련하도록 히스기야 왕이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전활성화의 지속화이었다. 개혁한 제도를 활용함이었다. 히스기야 왕의 훌륭함은 매일 아침저녁, 안식일, 초하루, 절기까지 번제를 드리게 하고 그 제물을 히스기야 왕이 헌금했다. 참으로 히스기야 왕은 신앙개혁을 시도하였고, 신앙개혁 되게 행정하고, 동참하게 하고, 후원하고, 자원하게 하고, 제도를 만들고... 이런 점을 붙잡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순종이요 충성이다.

   세상에서 중요한 3가지 ‘금’이 있는데 황금, 소금, 지금이란다. 3가지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누구나 ‘황금’일 것이다. 돈만 있으면 음식 맛의 필수라는 ‘소금’도 살 수 있고, 시간이 금이라는 ‘지금’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물론 동서고금을 통해 돈의 필요성은 항상 정당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가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어도 시간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잠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어도 지식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의사는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수 없다. 돈으로 관계는 맺어도 사랑은 살 수 없다.

   돈의 가치는 모으는데 있지 않고 사용하는데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돈을 벌 때 개같이 벌고 쓸 때는 정승같이 쓰라고 가르쳤다. 3%의 소금이 97%의 바닷물을 건전하게 만든다. 저와 여러분도 믿음행위를 정승같이 소금되게 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우리 각자의 믿음발자국을 확인해보자. 히스기야 왕은 유월절 복구를 축복으로 연결시켰다. ‘나가서’와 ‘성전활성화’, ‘성전활성화의 지속화’ 때문이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저울이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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