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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9일 설교

“기도가 하늘에!” (대하 30:23-27 ‘연장하는 유월절’) 19.6.9.

어느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쓴 일기이다. “엄마는 날마다 집에서 병원놀이를 하자고 해서, 병원놀이를 하면 엄마는 의사 선생님이 되길 원하기 때문에 저는 환자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저에게 ‘이것은 안 돼!’ ‘그것도 안 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이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가? 자기자녀를 위하여 함께 놀아준다고 하는 엄마의 수고가 아들에게는 시달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엄마도 아이도 힘들고 말았다.

어느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아빠는 항상 저의 장래를 염려한다지만, 저의 현재를 생각해주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위해 나름대로 무진장 희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도 아빠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겨야 마당하다. 그럴지라도 실제현실은 서로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사실상 ‘잘못을 누구에게서’ 찾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꼭 필요한 살핌은 “누가 더 역지사지를 할 것이냐?”이다. 그렇다면 인생을 더 살아보았고, 더욱 깊고 크게 생각할 줄 아는 어른 쪽이 역지사지를 더 잘 할 수 있다. 사실상 상대방을 더 많이 넓게 생각하는 쪽이 어른이고, 그런 어른을 만났을 때 훌륭한 부모요, 스승이며, 멘토인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인생수업은 이기심을 전수하는 어른을 만나는 것이다. 사실상 아이를 욕심쟁이로 만드는 어른이 다름 아닌 부모요 스승일 수 있다. 그래서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회개를 엉터리로 하는 그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대부분 ‘이기심’을 발견하게 된다. 이기심은 영혼을 틀어지게 하는 발암물질이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일수록 쌓아두려고만 하는 이기심이 베풀어주려는 믿음중심으로 바꾸어져 있다.

오늘 설교본문을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읽고 있으면 엄청난 회복, 소생, 치유를 체험하는 축제현장이었음을 목격할 수 있게 되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23, 26-27.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이 말씀은 7:1, 3-5을 말함.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자,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을 때, 거기 있던 모든 교우들이 돌 땅바닥에 엎드려 경배하였고, 제물로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마리를 바치면서 낙성식을 했다는 것임. 감동, 감격, 감사의 극치를 말해주는데, 히스기야 왕이 주관하였던 유월절 기념축제도 엇비슷했다는 것임). 그래서 축제를 7일간 연장했고, 제사장들이 축복했는데, 그 축복기도는 하나님 보좌에 상달됨을 확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중차대하게 사모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실현 때문이다(‘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8-3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20> 바울도 대단히 귀중하게 보았다(‘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7-12. ‘fit to share the portion’ -Amf-).

오늘이 성령강림절이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하고 찬송 부르고 끝내버리는 날이 아니라 ‘회개하여.....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이 모든 말씀이 해당되고 시작되며 실현됨을 확인하는 날이다. 이 확인이 참으로 축복이요 은혜이며 성령충만인 것이다.

어느 예비군 훈련장에서 중대장이 결혼한 사람에게만 설문조사를 했단다. “아내의 말과 상관없이 자기 일을 결정하는 분은 손을 들어보세요.” 350명 중에 단 한 분만 손을 들더란다. 그 사람에게 중대장이 말했다. “어떻게 아내를 잡으셨습니까? 부럽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제 아내가 사람 많은데 끼지 말라고 하던데요.” 각 가정마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진지 오래 됐다. 물론 베드로도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아내를 귀히 여기라(벧전 3:5)라고 하였다. 모자라고 열등해서 귀히 여기는 게 아니다. 기도상달이고 기도응답 때문이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다. 유월절 복구 잔치를 통하여 하늘 문이 열리고 기도응답으로 고침이 이루어지고 축복기도가 상달되었다.

히스기야 왕은 어떻게 그런 은혜를 누리게 되었을까? 설교본문을 다시 정독해 보자.

1) 결의(23)

유월절 축제를 다시 7일간 연장하게 됐는데, 그것은 히스기야 왕이 명령한 것도 아니고 제사장들이 정한 바도 아니었고, 온 회중이 결의하여 된 일이었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토록 중요하게 보시는 ‘자원함’이었다.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출 36:2-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13,15-16).

개를 친 자식처럼 예우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귀가할 때 아내가 개처럼 반겨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만약 개가 말까지 할 줄 안다면 개들은 친절과 존경 언어로 자기 주인께 마음껏 충성할 게 틀림없다. 가끔 사람들은 ‘개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는데, 그 말을 개들이 알아듣는다면 어이없어 헛웃음을 하고 말 것이다. 개들끼리 배은망덕 하는 짓을 하는 개를 보았을 때 개들이 “사람 같은 놈이야!”라고 흉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감탄고토(甘呑苦吐)를 밥 먹듯이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선 하나님의 자녀 삶에서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제사장(24)

‘성결하게 한 제사장도 많았더라’ 이 말씀은 3절과 15절을 비교해 보면 그 교훈은 뚜렷해진다. 한 마디로 제사장의 변화(개혁, 내적이고 질적인 회개)를 이룬 것이니, 천국에서는 하늘 문을 열고 스데반이 순교할 때처럼 목격하였을 것이다(‘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5-16).

미국에 벤 후퍼(Ben W. Hooper)란 아이는 어머니의 실수로 태어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단다. 키도 작고 왜소해서 항상 왕따를 당했다. 하지만 더 괴로운 일은 “꼬마야, 니 에비가 누구지?”라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상 숨어 다녔단다. 이 소년이 12살 되던 해에, 그가 다니던 교회에 굉장히 인격적인 목사님이 오셨다. 후퍼는 늘 늦게 뒷좌석에서 예배드리고 일찍 빠져 나오곤 했다.

어느 주일, 설교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다가 일어선 후퍼는 깜짝 놀랐다. 어느 새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있었다. 후퍼는 할 수 없이 그 행렬에 끼었다. 그때 교인들과 인사를 하던 목사님이 후퍼를 보더니 물었다. “아들아, 네 아버지가 누구지?”(Son, who’s your daddy?”) 갑자기 정적에 빠졌다.

그 목사님은 분위기를 직감하고 이렇게 말했단다. “아! 네가 누군지 알겠다. 이제 네가 닮은 점을 알겠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얘야, 너는 위대한 유산을 갖고 있다. 가서 그것을 주장하면서 살아라.”그 후로 후퍼는 누구든지 “니 에비가 누구냐?”라고 물으면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는데, 후에 테네시 주지사를 여러 번 연임하며 존경을 받았단다.

올바른 자기인식이 그렇게 중요하다. 자기 안의 불신앙적인 소돔과 고모라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지금 다짐하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의 편지로 살아가자!”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면 짠맛을 내지 못한 성령충만은 죽은 성령충만이다.

3) 나그네들(25)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유월절 연장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밝혀놓은 것인데 아주 특이한 참석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그네들이었다(םירגה 하게림 רג 게르 복수형, foreigner, stranger. 외국인들처럼 낯설고, 생소한 사람들을 전도한 셈! 자축잔치가 아니었다는 것).

무디가 어느 날 밤 시카고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가로등에 기대어 서 있는 어떤 청년을 보게 되었다. 무디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이렇게 물었다.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그때 그는 화를 내면서 때리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무디는 자신을 하수도에 처넣을까봐 두렵더란다. 그래서 무디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래도 나는 물어 볼 것을 물어 보았는데요.” 하였더니 “당신 일이나 걱정하세요.”하고 그 청년이 성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디는 “그게 바로 내 일인데요.” 하고 서로 헤어졌다.

그 후 서너 달이 지나 어느 추운 아침에 누군가 무디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예수님을 어떻게 믿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전에 가로등에 밑에서 맞아죽을 뻔했던 그 청년이었다. “선생님, 그때 헤어지고 나서 저는 밤마다 귀에 ‘예수님을 믿으시나요.’라는 음성이 들려서 잠들기 힘듭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찾아왔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 청년은 무디 선생님을 따라 예수님 영접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전도의 후원자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체험을!

자 이제 어떻게 하시려는가? 오늘 설교말씀에 잘 어울리는 멋진 반응을 결단해 보자. 오늘설교는 유월절 연장축제 현장이다. 신바람이 났다. 감사, 감동, 감격, 기도상달... 자원 때문! 제사장개혁! 나그네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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