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6일 설교
“보발꾼에게 순종을!” (대하 30:10-12 ‘히스기야 왕의 유월절 회복’) 19.5.26.
미국의 시인 중에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 1902.2.1~1967.5.22)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시를 많이 썼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주는 시’를 남겼다.
엄마가 아들에게 주는 시
아들아, 난 너에게 말하고 싶다./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다는 걸./ 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다./ 그리고 판자에는 구멍이 났지./ 바닥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다./ 맨바닥이었어.// 그러나 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다./ 층계참에도 도달하고/ 모퉁이도 돌고/ 때로는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까지 올라갔지.// 그러니 아들아, 너도 돌아서지 말아라./ 계단위에 주저앉지 말아라./ 왜냐하면 넌 지금/ 약간 힘든 것일 뿐이니까./ 지금 주저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애야, 나도 아직/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니까./ 난 아직도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지.//
‘인생’이라는 도로에는 ‘안전장치’만 되어있지 않다. 힘들더라도 불안과 함께 그 불안을 이겨내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삶의 쓴맛을 오히려 즐기는 거다. 고통을 즐기고, 염려도 지루함도 즐겁게 대한다. 훗날 성공을 불러들이고 형통과 짝하려면 흔들리는 삶을 잘 견뎌야 한다. 단맛만 찾아다니는 삶만큼 저질인생도 없다. 자신의 두뇌와 땀을 몽땅 쏟아낸 후에 함박웃음을 짓는 내일을 만난다면 잡부로 막일을 하는 노동판이라도 좋다. 삶의 쓴맛에 둔해지고 길들여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인생의 양약고구(良藥苦口)를 깨닫는 삶을 살아가고, 자만심을 다스릴 수 있기에, 인생시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고난은 실제로 우연이면서 필연인데, 고난을 우연으로만 생각하면 너무나 허겁대기 쉽고, 필연으로 단정하면 너무 체념하게 된다.
오늘 설교본문도 쓰라린 인생고난을 겪고 있을 때, 그 고난에 대처하는 모습을 대단히 아름답게 여기고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0). 지금 우리가 함께 읽어본 말씀은, 유월절 기념일을 기필코 복구시키려고 히스기야 왕이 보발꾼을 파송했는데(步撥꾼; 조선시대 급한 나라 일을 빠른 걸음으로 국민에게 알리는 일을 하던 사람), 그 보발꾼이 유월절 동참을 설득하는 중에 당하는 고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조롱’ מלעגים 말레이김 복수 분사, לעג 라아그 mock, stammer, speaking in a foreign or barbarous tongue. 여러 사람이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을 외국발음으로 하면서 놀려댔던 것임). 이렇게 조롱한 이유는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 왕의 공격을 받고 엄청난 파괴와 약탈, 포로... 전쟁패배로 재앙급 피눈물을 당했는데, 유다지파의 바로 북쪽에 에브라임이 있었고, 연달아서 북쪽으로 므낫세, 스불론이 있었음. 그럴 때 히스기야 왕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복구운동을 범 민족적으로 전개하면서, 북 이스라엘도 유월절 복구행사에 동참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 포로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하니까, 북쪽 이스라엘사람들이 콧방귀를 끼면서 보발꾼들을 비난하고 비아냥거렸다는 것이다. 근거되는 말씀을 보자(6, 9). 그런데 실제로 유월절기념행사는 예상과 달리 성대하게 민족적인 잔치로 이루어졌다(12 준행 עשׂה 창1장, 창조수준! 13, 18).
서로 친한 두 물동이가 우물에서 만났단다. 한 물동이가 기쁜 표정으로 친구 물동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얼굴이 그렇게 어두워?” “어휴! 나는 이제 질렸어. 매일 여기서 물을 가득 채워가도, 우물에 올 때는 꼭 빈 통이잖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나는 항상 빈 통으로 왔다가, 돌아갈 때는 가득 채워 가니까, 늘 기분 좋던데.”
두 물동이는 똑같은 여건인데 우물로 오는 자신의 빈 모습만 보니까 헛수고 같아 낙심에 빠지고, 샘물을 가득 채워서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성취감이요 감사 일색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두 물동이는 우리의 사고방식이요 가치관을 말해준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16). 조금 설명을 붙이면 현실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믿음 사고방식이란 것도 그렇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빈 통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빈 통에 가득할 귀가를 미리 보는 거다. 이 미리 봄은 특별한 초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늘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부끄러워하시지 않게, 생각하고 선택하며 동참하는 것이다. 믿음이 삶을 갖출 때, 그러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질 때, 성령충만이요 영적인 축복이며 은혜이다. 시편 128편 1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또 3~4절에서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걸어 다닐 때 아내와 아들 딸, 손자 손녀가 요긴한 인물로 오래 오래 살아가는 복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 복을 히스기야 왕이 예약해갔다. 아멘.
자 그러면 히스기야 왕이 복구한 유월절을 좀 세밀히 살피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을 함께 찾자.
1) 겸손(11)
히스기야 왕이 유월절 복구운동을 성공하는 일 중에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배워야할 게 ‘겸손한 몇 사람’이다. 이것은 한약방의 감초처럼 신구약 성경의 기적사건들에 꼭 포함되어 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8-9). 오병이어의 기적 때 있었던 ‘겸손한 몇 사람’이다. 또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4-6).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0-12, 14).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장승요(張僧繇)가 남경에 있는 안락사(安樂寺) 벽에 용 네 마리를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고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중 주지가 그 말을 허황한 말로 여기자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쳐 벽이 깨지고,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다운 허풍이지만 그래서 생긴 말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에서 화룡점정은 뭘까? 겸손이다. 어쩌든 겸손을 늘 챙기기를 축복한다. 아멘.
2) 감동(12)
‘하나님의 손이 ... 감동시키사’(היתה יד האלהים 하예타 야드 하엘로힘 ‘the hand of God was’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 하나님의 손은 창조주권과 그 권능을 의미함, 영향을 주고 있었음!). 바로 이 영향에 순반응 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대단히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보혜사 되심이다(‘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 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7-8, 13>).
19세기 후반에 당대 살아있는 역사가 중 가장 탁월하다고 명성을 얻었던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가 연구에 몰두하다 잠시 산책을 나갔는데, 골목에서 한 소년이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우유배달을 하다가 넘어져서 우유병을 깨뜨리고 배상걱정 때문이었다. 랑케가 “얘야. 걱정 말아라. 지금은 내가 산책하는 중이라 돈을 안 가지고 왔구나. 내일 이 시간에 여기에서 내가 우유 값을 주겠다.”하면서 그 소년을 격려하여 주었다. 랑케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편지 한통이 배달되어 있었다. 연구비 거액을 후원하겠으니 당장 내일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랑케의 입은 귀에 걸렸다. 하지만 소년과 약속이 문제였다. 랑케는 잠시 망설이다 답장을 썼다. “대단히 고맙지만 선약 때문에 당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독지가는 화났지만, 사정을 알아본 후에 랑케를 더욱 신뢰하고, 처음 제안했던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은 후원금을 전했다고 한다.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하심도 랑케처럼 순종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지전능하게 이루어진다. 아멘.
3) 말씀대로(12)
‘말씀대로 전한 명령’은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또 다른 표현이다(‘여호와의 열심’ 왕하 19:31- 32, 35. 우리 하나님이 창조수준으로 언약을 성취하심을 가리킴).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솟아 흘러내린 물이 모든 생물을 살리는데, 진펄과 개펄은 살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1.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겔 47:1, 9, 11 ‘진펄’ בצה 비차 진흙 수렁 ‘개펄’ גבא 게베 물웅덩이. 단절, 간혹 넘쳐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 ≠가끔!).
자 이제 오늘 설교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교정하자. 히스기야 왕의 유월절복구(겸손 감동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