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19년 5월 5일 설교

“엎드려 경배를!” (대하 29:20-29 ‘히스기야 왕의 제사’) 19.5.5.

이스라엘 백성이 400여 년 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을 끝내고 모세가 지도하는 대로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닌 일이 구약성경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였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하고 독려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스라엘백성은 먼저 정탐꾼을 보내자는 제안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탐꾼을 보내서 가나안을 미리미리 잘 조사해 보고 그 정보에 맞는 전략으로 침투해가자’는 의견이었다.

이 사실은 신명기 1장22절-24절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그들이 돌이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 곳을 정탐하고’

그 정탐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정탐보고는 공포심과 패배의식, 불신앙만 퍼지게 했다. 마음속에 잠복해 있던 불신앙은 불화와 혈기다툼을 서로 불 지르고 말았다. 그 잠복성 불신앙이 고개를 쳐들자 삽시간에 ‘메뚜기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 메뚜기패배의식이란 게 뭔가? 문제는 어려워 보이고 자신은 무능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의심스럽고, 세상풍조들만 돋보이는 게 바로 메뚜기 패배의식이다. ‘할 수 있다!’는 믿음중심이 ‘해도 안 될 것 같다’는 의심으로 바꾸어지니까 서로 원망과 불평, 탓으로 다투게 되는 것이다. 신명기 1: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2.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믿음과 의심은 알곡 밭에 가라지처럼 비슷비슷하다.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은 확실하게 구분하시고 믿음을 찾아내서 기뻐하신다.

오늘 설교본문도 히스기야 왕이 놀라우리만치 믿음의 법에 잘 맞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설교본문은 히스기야 왕이 성전정화 후에 곧바로 제사를 드린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21-22 ‘수송아지’ ‘숫양’ ‘어린 양’ ‘숫염소’ ‘일곱’ ‘속죄제물’ ‘제사장’ ‘제단’ ‘피’..... 모두 다 하나님의 제사법 레위기와 정확하게 일치한 사실들인데, 두말 할 것 없이 36절에 확증하여 놓았음. ‘예비하다’ הכין 헤킨 to prepare, to set up, adjust, upright.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순종을 중요하게 보고 반드시 배워서 반영해야 설교를 잘 듣고, 예배를 올바르게 드린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통하기 때문임.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2-23).

말씀을 ‘묵상한다’는 히브리어는 두개이다. 하나는 הגה(하가 murmur of dove, sigh of men, growling of lion over its prey. ‘중얼거림’), 다른 하나는 שׂיח (씨아흐 to meditate, speak, declare, complain. ‘숙고하다’). 두 단어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묵상하는 것은 ‘말씀이 의미하는 그 진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사 31:4)라고 하는 말씀에서 ‘으르렁 거린다’는 말이 ‘הגה’(하가)이다. 사자가 먹이를 잡아 물었을 때 어찌나 좋은지 어쩔 줄 몰라서 먹이를 입에 문 그대로 즐거워하는 소리가 ‘הגה’(하가)이다. 자신이 잡은 먹이가 입에 물려 있다. 상상도 가정도 아니다. 실체요 사실(fact)이다. 아는 것을 예배한다는 게 사자의 ‘הגה’(하가)처럼 실체가 있고 사실인지라 감격이, 즐거움이 솟구치는 것이다. 설교 중에! 찬송 중에, 기도 중에, 헌금 중에, 예배 중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행복의 조건을 세 가지로 말했는데,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고 감사하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할 그것을 탐내기 때문이다.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일들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소망을 그리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나 스스로 행복에 뛰어들고 만들면서 행복을 실감하자는 것이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다. 성읍의 귀인들을 설득해서 함께 해냈다. 아멘.

자 그러면 히스기야 왕이 드린 제사현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의 정답을 참께 찾아보자.

1) 속죄(24)

히스기야 왕은 성전정화 직후에 제사를 드릴 때 우선 속죄에 그 초점을 맞췄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사본질에 딱 맞아떨어지는 칭찬감이었다. 왜 그런지 다윗의 시를 보자.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51:9-13. 온전한 속죄가 이웃 영혼을 살리는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고 간구하였던 왕이 다윗이었음. 제목<밧세바 간음 때 = 최고의 축복이요 유일한 은혜를 바로 속죄로 보았다는 것임!>).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여인은 바로 러시아의 페오도르 바실리예프란다. 바실리예프는 자녀를 몇이나 두었을까? 무려 69명. 우리나라에서도 자녀를 7~8명씩 낳던 때가 있었지만 15명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바실리예프는 1725년에 첫 아이를 낳고, 1765년까지 40년 동안 27번이나 출산했는데 16번 쌍둥이, 7번 세쌍둥이, 4번의 네쌍둥이를 낳고, 그 중 2명만 젖먹이 때 죽었다고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태문을 엄청나게 열어주신 것이다! 히스기야 왕도 속죄를 통하여 넘쳐나는 축복을 받고 싶어 했다(21절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물로 삼고’). 저와 여러분도 넘치는 축복에 삶을 맞추자! 아멘.

2) 명령한 대로(25)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이 명령한 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런 게 진정한 순종이요 충성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을 불러서 음성으로, 환상으로, 꿈으로, 감동으로 미리 알려주고 전하게 하셨다. 그런 사람들을 ‘선지자’(ראה 로에 先知) ‘선견자’(הזח 호제 先見) ‘예언자’(נביא 나비 預言)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히스기야 왕이 25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자마자 이러한 선지자와 선견자를 따라 순종하고 충성하였다는 것인데, 저와 여러분도 힘들어도 이런 순종을 배우려고 기를 쓸 때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아멘!!!

여러 일꾼을 거느리고 농사를 짓던 미망인은 매일같이 새벽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꾼들을 깨워 논밭으로 보냈다. 그래서 하인들이 그 닭을 죽여 없애기로 하였다. 새벽에 주인님의 잠을 깨우니까 자기네들이 새벽부터 일터로 내쫓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들은 주인 몰래 닭을 죽여 묻었다. 그런데 닭이 없어진 후에 예상과 달리 더욱 고달파졌다. 닭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아차릴 수 없게 된 주인님은 예전보다 훨씬 더 새벽에 일꾼들을 깨우던 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촌지를 없애려고 스승의 날에 휴교를 했던 교장선생님이 계셨다. 하지만 스승의 날에 집에 있을 때마다 오히려 쑥스러워졌고, ‘스승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책하게 된다는 초등학교교사도 있었다. 스승은 학교 안에만 계신 게 아니다. 오히려 학교 밖의 은사님들에게 고마운 심정을 전할 수 있게 한다는 어느 학교장의 말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애당초 스승의 날은 학교선생님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었다. 그런 날을 학교장들이 제멋대로 없앨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승의 날에 휴교하니까 학생들은 하루를 앞당겨서 제각기 선물들을 싸들고 와서 선생님들에게 드리더란다. 선물주고 받기의 풍습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학교수업을 쉬는 날만 하루 늘어난 것이다.

이런 게 다 본질에 맞추지 않음으로 생긴 부작용이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제사를 본질에 딱 맞추고 드렸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만이라도 꼭 반영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마치기까지(28)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 말씀이 보여주는 그 현장을 자세히 보자.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경배하고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이 모두 복수형이다. 제사 중에 놀고 있는 자들이 없었다는 점을 착안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우리가 이러한 제사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 때문이다(36, 32:20-21 = 7:1).

이쁜 인물이 되지 말고 따뜻한 사람이 되세요. 이쁜 인물은 눈을 즐겁게 하지만, 따뜻한 사람은 마음을 데워준다. 잘난 인물이 되지 말고 진실한 사람이 되세요. 잘난 인물은 피하고 싶어지지만, 진실한 사람은 가까이 두고 싶어진다. 대단한 인물이 되지 말고 믿음 좋은 사람이 되세요. 대단한 인물은 어딘지 거북스럽지만, 믿음 좋은 사람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준다. 히스기야 왕이 따뜻하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하였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도 시도해보고 체험하자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춰보자.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 왕이 성전정화를 마치고 즉시 귀인들을 설득하여 번제를 드리는 모습이다. 히스기야 왕은 번제의 초점을 ‘속죄’와 ‘선지들의 명령한 대로’와 모두 ‘마치기까지’에 맞췄네요. 자주 생각나기를 축복한다. 아멘.

최근 게시물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