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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8일 설교

“성전 사랑을 이렇게!” (대하 29:12-19 ‘히스기야 왕의 성전정화’) 19.4.28.

미국 LA 북부에 넓이가 약 140만평이나 되는 ‘윌 로저스 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은, ‘윌 로저스’라는 미국의 코미디언이 기부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인들은 그를 웃음의 상징으로 인식할 정도로 웃음을 잘 선사했단다. 그렇기는 해도 울음도 공감하는 코미디언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LA에 있는 한 재활원에서 로저스가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 곳은 여러 신체장애자들을 재활치료해 주는 병원이었다. 거기서 로저스는 많은 환자들을 웃겼고, 그래서 그 환자들은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됐다. 그런데 로저스가 갑자기 무대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땀을 닦으려는 줄 알고 동료 한 사람이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려고 뒤따라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로저스는 벽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자유로운 몸으로 웃음을 선사하는 자신과,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웃는 환자들이 비교되어 복받쳐오는 아픔을 쏟아냈던 것이다. 잠시 후 로저스는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 익살스러운 얼굴로 다시 무대에 나타나 혼신을 다해 웃음을 만들더란다.

이 세상에는 이기적인 계산으로 굳어진 두뇌판을 가진 사람이 있다. 무슨 일을 해도 이익 되는 셈에 밝고 또 이익을 남긴다. 이러한 사람은 손해를 보는 일이나, 소외된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가슴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가나한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 눈물로 공감한다. 코미디언 로저스가 그랬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두뇌판 쪽인가? 가슴판 쪽인가? 아니 저와 여러분은 두뇌판 교인인가? 아니면 가슴판 신앙인인가? 삶의 무게중심을 천국에 둔다면 가슴판 신앙인이 되어 쉽게 감사와 소망, 헌신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삶의 무게중심을 이 세상에 두면 두뇌판 신앙인이 되어 공로의식이나 비교의식, 우월감, 열등감, 시기심에 사로잡힌다. 사랑도 두뇌로 하기 때문에 뜨거운 감동은 어렵다.

오늘 설교본문도 삶의 무게중심을 두뇌판에서 가슴판으로 바꾸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18-19). 좀 더 보충하려면 28:23, 29:10을 읽어보면 된다. 전자는 아하스 왕이 한 일이고, 후자는 아하스 왕의 아들 히스기야 왕이 계획한 일인데,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실은 아무래도 ‘망하게 하였더라’이다. 이것은 32:20-21<사 37:36. 적군 185,000명을 하루 밤에 일망타진하심>과 정 반대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관여하여 망하게 하셨고, 또 전지전능하게 도우시니 기적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삶에서 축복의 몫이 ‘망하게’로 둔갑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둔갑을 올바르게 바로 잡으려고 성전정화를 대대로 벌린 신앙인이 히스기야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날은 리모델링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새롭게 단장하는 것을 리모델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람들까지도 리모델링을 하고 있다. 머리염색, 피부관리, 성형수술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우뚝 코인 새 색시가 딸을 낳았는데 들창코더란다. 그 이유는 들창코 엄마가 우둑 코로 성형수술을 한 탓이었다. 이런 단장 말고 이제 신앙도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 신앙도 오랜 동안 그냥 놔두면 구태의연해지게 된다. 말씀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도를 회복하며, 설교에 반응하고, 생동하는 찬송을 올려야 감동받는 예배로 복구된다. 반응을 하지 않는 예배는 죽은 믿음인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설교 중에 “믿으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종종 듣게 한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기 때문에 굳어진 신앙중심이라서 반응을 강요하느라고 그렇다. 예배당은 천막으로 지어도 괜찮고, 의자는 가마니때기라도 상관없다. 다만 예배 중에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이 있고, 그 반응과 결단이 있다면 ‘영광의 박수를 치자’고 선동하지 않아도 좋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제자들과 함께 참석하신 일이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한국교회의 믿음정서에 따른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술독을 물독으로 바꾸실 것 같은데 실제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여섯 항아리나 바꾸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생활은 기쁨과 슬픔을 유익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독약도 약이 될 수 있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14:40). 하나님의 계획실현에 맞는 게 리모델링이고 아멘이며, 유익이요 덕이며, 품위이고 질서인 것이다. 히스기야 왕이 그런 시도를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게 도와주셨다.

자 그러면 히스기야 왕의 도우심을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이루어지게 하는 게 중요하다. 히스기야 왕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우리 신앙생활의 답을 찾아 활용하고 체험하자.

1) 일어나(12)

‘일어나니’ 이 말씀은 ‘게으르지 말라’(11)에 아멘하는 모습이다(שׁלה 솰라 to be quiet, at ease, careless, error, fault, failure. ‘do not lose any time’ -GN-<언제든지 시기를 잃지 말라>. 7x2 =14명<12-13절을 보면 레위족 집안별로 자원하는 모습! = 성막원리와 일치함<출 36:3, 40:34>).

1880년에 태어난 이세종이라는 머슴이 있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40이전에 그 지역의 부자가 되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정독하더니 자신의 재산을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줬단다. 마지막 재산은 면사무소에 가져가서 구제사업으로 기부하고 거지처럼 살았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살자, 그들에게 별 멸시를 다 받으며 계속 찾아가 전도했다. 결국 부인은 자꾸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리고 이세종은 호세아처럼 전도하고 결국 그 아내는 이세종의 전도에 동참하여 매진하였단다. 세종은 양보다 질, 겉모습보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본질을 깨달았던 성도였다. “주님, 나는 당신밖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던 프란시스코 성자처럼. 자원하는 믿음생활에 정통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모아(15)

‘형제들을 모아’ 레위인 14명이 성전정화작업을 위해서 다시 자기 친척들을 모아 성결공동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원함이 연합과 손을 잡을 때 그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16일 만에 성전정화작업을 완료하게 되었다고 17절에 기록되어 있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이 찬송을 노상 불러서 ‘거두리’로 불렸던 이보한이라는 사람이 별세하자 전주의 읍내 거지 200여 명이 몰려와 장례에 참석한 후에 비석까지 세워줬단다. 거두리가 생전에 집안 세도가인 진사님에게 예배에 참석해 보시라고 수시로 권면했다. 어느 날 진사님이 “자네 열성을 봐서라도 다음 주엔 나감세.”라고 약속하더니, 당일 옆 고을 절로 숨어버렸다. 사전에 그 사실을 들었던 거두리는 절까지 찾아갔다. 진사님이 “오늘은 눈길이라 무척 위험하니 다음에 가겠네.”라고 변명하였다. “제가 눈을 좀 쓸어 놓았으니 거기까지만 가주십시오.” 진사님이 따라나섰는데 절부터 예배당까지 수십 리 길을 쓸어놓았더란다. 거두리는 진사님이 절로 도망간 줄 알고 새벽부터 눈을 치웠던 것이다.

길을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길을 열어주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요즘 우리 교회의 길이 막히고 끊어져 있다. 길을 만들어주는 분이 필요하다. 소통을 시켜주는 대화, 관계를 맺어가는 만남, 공동체에 몸을 담게 하는 초대, 그런 길을 만들어 가는 신앙인 말이다. 자원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따라(15)

‘여호와의 말씀대로 명령한 것을 따라’(‘according to the Law of the LORD.’ -GN-) 이렇게 하는 것을 예수교전문용어로 ‘순종’이라고 한다.

성찬예식은 기도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다. 지극히 간단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엄청난 언약을 성찬식에 해 놓으셨다. 떡에 대한 언약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성찬 떡은 예수님이 지옥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각을 뜨신 화목제물이라는 것이다. 이 언약을 살리지 못하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고전 11:27).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을 명하셨다. 이것은 출애굽 기념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 기념일이 되면 반드시 누룩을 섞지 않는 떡, 무교병을 먹었다. 그 이유는 누룩성분 때문이었다. 본래 누룩은 발효식품이기에 빵을 부풀려서 부드러운 빵으로 변화시켜준다. 그러므로 누룩은 변형을 의미한다. “하나님, 이제 애굽를 떠났으니 어떠한 영향으로도 옛사람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애굽과 단절된 새로운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결단을 누룩 없는 떡으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단을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몸으로 하라고 완전히 새 언약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떡을 받아먹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왜 먹는가?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유월절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지방에 뿌렸다. 그리고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고자 할 때도 피를 성막제단에 뿌렸다.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친히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제단의 피는 종결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죄 사함과 천국백성을 정당화하시는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포도주로 언약하시고 마시게 하셨던 것이다. 한 마디로 성찬예식은 죄 사함의 언약에 몸과 마음으로 동참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히스기야 왕도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시켜 누리려고 성전정화작업을 했을 때 레위인들이 자원 순종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자 이제 오늘 설교의 핵심에 저와 우리의 믿음중심과 삶을 단단히 맞추자. 오늘 설교는 히스기야 왕이 추진한 성전정화작업 현장이다. 그 핵심은 자원과 성결공동체 형성과 말씀순종이었다. 늘 나침반이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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