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 설교
“정직한 신앙관을!” (대하 29:5-11 ‘히스기야 왕의 신앙중심’) 19.4.21.
미켈란젤로가 조각작품 ‘다비드 상’을 발표하던 날, 그 조각품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었단다. 드디어 커튼이 걷히고 5m 높이의 다비드상이 본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단다.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완벽한 조각상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같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단다. 사실인즉 ‘미켈란젤로’가 조각했던 대리석은 돌결이 특이해서 당대의 이름난 조각가들도 조각을 하다가 포기하자 여러 해 동안 방치해 놓았던 바위였다. 어느 부분은 푸석푸석하고 또 어떤 쪽은 아주 단단하여 조각하기엔 너무나 악조건이었다. 그 대리석으로, 그 고충을 다 극복하고, 최고의 명품을 만들어 낸 분이 미켈란젤로였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한 분이 물었다. “많은 작가들이 포기한 대리석인데 어떤 방법으로 조각을 하였기에 이렇게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런 대답을 하였단다. “나는 그 괴팍한 돌 속에 갇혀 있는 다비드만 보면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했을 뿐입니다.”
그 위대한 다비드 조각상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오로지 다비드만 남겨놓은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명 건강법은 몸에 좋은 보약을 자꾸 지어 먹는 것보다 자기 몸에 해로운 음식을 거절함을 지키는 거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만 많이 하기에 앞서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욕망을 채우려고만 하기보다 탐심을 제거하는 게 급선무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없애는 그 일부터 제대로 잘 해야 한다. 이게 올바른 회개요, 믿음중심이며, 첫 단추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설교본문은 히스기야 왕의 믿음중심을 가장 많이 잘 보이게 집약시켜 놓았다. 다시 말하면 역대기 성경기자는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라는 칭찬을 요시아 왕과 함께 히스기야 왕에게 붙였는데 그만큼 위대한 믿음중심을 보고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성경말씀을 우리가 만났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히스기야 왕의 특별 담화문(談話文)이요, 첫 정책연설문이며, 대국민성명서이었다. 히스기야 왕은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라고 특별 담화문을 시작하여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사 그 앞에 서서 수종들어 그를 섬기며 분향하게 하셨느니라.’라는 말로 끝마쳤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성전기능의 정상화’이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의 연설은 대 성공작이었다. 성전을 회복시키는 일이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레위인들이 일어나’(12), ‘첫째 달 십육 일에 마치고’(17),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29).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는 C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출생(Birthday)과 죽음(Die) 사이에서 선택(Choice)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오로지 우리 자신만의 판단이요 몫이다. 나 자신이 선택한대로 자신의 인생으로 결정되고 그 결정들이 자신의 이력서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 쉬운 성경은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현대어성경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현대인의 성경은 ‘쓸데없는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공동번역성경은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RSV성경은 ‘do not heap up empty phrase’ ‘알맹이 없는 문구를 쌓아올리지 말라.’ 그렇다면 ‘중언부언’(重言復言)은 의미 없는 말, 쓸데없는 말, 같은 말, 빈말, 헛된 말을 술 취한 사람처럼 귀찮게 반복하는 잔소리인가? 그 정도는 결코 아니다. 중심을 담아내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하는 기도를 중언부언이라고 우리 예수님이 가르쳤던 것이다.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시낭송처럼 오랫동안 기도를 할지라도 기도중심이 빠지면 그게 ‘중언부언’ 하는 기도인 것이다. 조금 어색한 비유지만 불교에도 ‘공염불’이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을 온통 집중할 때 지탄하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신앙고백으로 할 수 있고 공염불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만 그러겠는가? 예배도, 찬송도, 봉사도 전도까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경남 산청에서 소작농으로 살아가던 농부가 아들을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 1학년 8반, 1학기 석차는 68/68 꼴등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서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이웃들마다 “찬석이 공부를 잘 했더냐?”라고 물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앞으로 더 봐야 제. 이번만 1등 할런지.”라고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렸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강으로 달려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단다.
그 후로 그 충격이 아들의 머리에 맴돌았다. 그리고 17년 후 대학교수가 되었다. 45세 때 중학교 1학년 성적표를 실토하려고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하고 말을 꺼냈는데,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손자가 듣는다.”라고 하셨다. 자식이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하신 부모님이셨다. 전 경북대 총장 박찬석교수의 고백이다.
꼴등이라도 속 알맹이가 고쳐지고 아버지의 뜻에 맞춰질 때 현실은 엄청나게 달라져갔다는 거다. 히스기야도 유다 왕 첫 걸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맞추었다. 이것은 엄청난 기적을 예약하는 삶이었다(대하 32:20-21, 사 37:36). 자 그러면 히스기야 왕을 좀 더 분석하면서 저와 여러분의 정답을 찾자.
1) 현실 인식(6-7)
지금 함께 읽어 본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성전실태와 믿음생활의 실종을 적나라하게 입증해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선친 아버지의 죄악정책을 흉한 그 모습 그대로 인식했다는 사실도 잘 보여준다(28:24). 하나님의 자녀 삶에서 현실인식은 올바른 좁은 생명길로 들어서는 첫 단계인데, 히스기야 왕이 바로 그것을 제대로 해냈다는 것이다. 이런 게 중요하고 저와 여러분에게 필수품이다. 앞산과 뒷산에 사는 동물들끼리 전쟁이 일어났단다. 앞산의 총지휘관은 호랑이었고 뒷산은 사자였는데 호랑이가 동물들을 다 불러 모았다. 그럴 때 동물들이 서로 쳐다보며 한심해서 수군거렸다. “당나귀는 멍텅구리라서 전쟁에 장애물만 될 텐데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낫지.” “토끼 같은 겁쟁이를 데리고 무슨 전투를 한다고 참 한심하네.” “전쟁터에서 개미를 어디다 쓰겠어?” “코끼리는 덩치만 크고 둔해서 적에게 금방 들통 날 테고.”
그러자 총지휘관인 호랑이가 호통을 쳤다. “시끄럽다. 모두 조용히 해라! 당나귀는 입이 길어서 나팔수로 쓸 것이다. 그리고 토끼는 빨리 달릴 수 있으니 전령으로 쓸 것이며, 개미는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으니 게릴라병으로 침투시킬 것이고, 코끼리는 힘이 세니 군수품을 운반하는 일을 하면 된다.”
지혜라는 게 특별한 게 아니다. 단점을 장점으로 살려 쓰는 판단력이 바로 지혜인 것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누가 단점을 보이던가? 또 나 자신의 단점 때문에 좌절하곤 했나요? 나와 남들의 다른 점을 찾아내고 살려간다면 분명히 경쟁이라는 전투에서 멋지게 승리하게 된다. 히스기야 왕이 통치 첫 걸음부터 그랬다. 저와 여러분도 시도해보고 체험하게 되길 축복한다. 아멘.
2) 여호와께서(8-9)
이 말씀은 28:6-8에 기록된 것처럼, 히스기야 왕이 나라의 전쟁재난을 분석하고 판단한 말이다. 중요시할 점은 역지사지 특히 역신사지(易神思之)를 하였다는 것이다. ‘하신 일’을 영어로 표현하면 ‘He-story’(history 역사.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포함시키는 판단과 사고방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 14:1-9).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수 2:8-10, 12. 나와 여호와로 연결시켜 선대하게함! 이게 ‘믿음생활’이고 ‘잘 믿음’이며 ‘믿음이 큰 자’임).
미국 장로교 목사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1792.8.29.–875.8.16)는 현대 부흥운동의 아버지이다. 그는 이런 설교를 했단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 받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의 자리에서 본래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 또한 귀한 일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에게 시급한 것은 내게 강 같은 은혜를 유지하는 일이다. 강은 크게 두 종류인데 하나는 건천이고 다른 하나는 강물이 흐르는 강이다. 마찬가지로 은혜가 말라버린 영혼과 은혜 속에 있는 영혼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은혜를 냉정하게 점검해 보고 회복하자. 아멘.
3) 개혁신앙 삶(5, 10-11)
‘너희는 성결하게’(שׁודק 카도쉬 separate, set apart, sacred, holy. =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이유는 25, 레 11:45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함. = reforming faithful.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1-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헛되고’ ματαια ineffective, deceive, useless. 무효! ‘죄가운데 있을 것’<ἐστε 현재 2인칭. ‘you are still in your sins’ -NKJV, RSV, NIV->
영혼구원은 뜯어고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사는 것인데, 이것은 반성과 다른 회개요, 부활이다. 여기에 100% 은혜와 인간의 응답이 있을 뿐이다. 다만 믿음의 부활은 바로 시작되지만, 부활신앙 삶은 순종과정을 통해 점점 성숙되어진다. 부활권능 신앙인을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부활주일 말씀의 반석에 우리 영혼의 닻을 단단히 묶어두자. 우리는 히스기야 왕의 담화문을 보았다(믿음중심도 살펴보았다). 현실인식을! 易神思之를! 개혁시도를! 챙겨들기를 축복.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