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7일 설교
“하나님을 진노케 한 일!” (대하 28:22-27 ‘아하스 왕의 종말’) 19.4.7.
미국의 서부 텍사스 주에 ‘예이츠 풀’이라는 유전은 굉장히 교훈적인 사연을 갖고 있단다. 세계적 불경기로 대 공황을 겪었던 1930년대에 예이츠라는 사람이 목장을 경영하였는데, 점점 늘어나는 부채로 가족들의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해가는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석유회사가 사람을 보내 예이츠의 목장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확인하는 시추작업 계약서를 제안하였다. 예이츠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계약에 응했더니, 놀랍게도 석유가 펑펑 솟아나왔다. 하루에 8만 배럴 정도 석유를 뽑아낼 수 있게 되었는데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250만달러 약 30억 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고, 매장량은 약 30년 동안 계속 석유를 얻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이츠 목장을 ‘예이츠 풀’(Yates pool)이란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고, 예이츠는 저절로 어마어마한 갑부로 돌변하였다는 것이다.
잠시 예이츠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는 석유로 출렁이는 호수 샘 위에서 살면서도 가난에 쪼들려서 사시사철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겨우겨우 살아갔던 것이다. 왜 그토록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나요? 자기 목장 속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상 대부호였지만 현실은 형편없는 빈민으로 살아갔다. 만일 석유 시추작업을 거절하였더라면 그는 형편없이 가난한 삶만 계속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진정 안타까운 인생이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예이츠가 석유회사와 시추작업계약을 맺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성령체험을 뜨겁게 하고 방언은사도 받았더라도,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던 예이츠와 다를 바 없다. 저와 여러분도 엄청난 석유 호수샘 위에서 살지만 형편없이 초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설교본문도 가난뱅이 예이츠처럼 살아가는 신앙인 아하스 왕을 볼 수 있게 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23. 아하스 왕이 극단적으로 분노하고 망한 일을 기록해 놓은 말씀임).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23절처럼 했다면 거의 믿음의 이성을 잃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왕하 16:10-16.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사람들은 대체로 큰 것을 좋아한다. 큰 집, 큰 차, 큰 키, 큰 교회... 그래서 작은 것보다 큰 것이 더 훌륭하고 가치도 크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작은 것을 가치 있게 보고, 작은 일을 소중히 평가한다고 강조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또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잔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이 말씀은 하찮아 보이는 물 한 잔을 주면 심판 때 반드시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말씀은 지극히 작은 자와 하나님을 동일하게 보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하나님이 택하시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권력가나 뛰어난 가문, 고학력, 잘 생긴 사람보다, 그 반대라고 밝혔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8).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작다는 사람도 택하여 크게 쓰신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다시 아하스 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왜 하나님이란 호수 샘을 끝까지 활용하지 못하고 말았는지 그것을 알아보자. 아하스 왕은 일생마감을 초라하게 끝냈기 때문이다(27).
1) 곤고할 때(22)
‘곤고’(רצה 하첼 distress<곤궁, 비탄, 재난>, vex<안절부절 못함>, ‘범죄하여’ לעמ 마알 perversely<심술궂게, 외고집을 부림> treacherously<배반, 반역> 구체적으로 23절에 기록되어 있음). 그런데 시 50:14-15에 이런 말씀이 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경남 통영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김진홍 목사님을 찾아왔는데 앉은뱅이더란다. 몇 년 전에 염병에 걸리자 시댁에서 만일 예수를 믿지 않겠다면 병을 고쳐주고, 계속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고쳐주지 않겠다고 구박을 했단다. “나는 이 병으로 죽더라도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아예 내쫓아내서 예배당 마루바닥에 앉아서 밤낮으로 기도했더니 앉은뱅이가 되더란다. 그래서 천대를 받다가 김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이 목사님께 안수 받으면, 치료될 거다.”라는 감동을 받고 다섯 달 동안 수소문한 끝에 통화를 하고, 남편을 졸라서 목사님을 만났단다. 김 목사님은 그 환자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권하고 안수기도를 해주고 중보기도를 하면서, 채소죽도 끓여 먹이고 비타민도 사다 먹였더니 그 앉은뱅이 환자가 울부짖다가 일어나려고 했더니 일어서지더란다.
앉은뱅이라는 환난을 당해 목사님과 함께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아하스 왕이나 저와 여러분도 곤고할 때 부르짖는 게 정답이다. 아멘.
2) 아람 왕(23)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이 말씀은 아하스 왕이 한 말인데, 아람 왕이 믿은 신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패전 때문이었다(5-6). 그런데 5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또 9절을 보면 선지자 오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로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 문제의 정답은 히 5:13-14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렇다면 왕 아하스는 어린 아이 신앙인이었고, 선지자 오뎃은 장성한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신앙생활의 기간도 중요하지만 믿음수준은 더 주요하다는 것이다.
죠지 뮬러는 일생 5만 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조용한 아침에 기도한 후에 성경말씀을 연구하였는데 그의 삶은 기적응답들로 넘쳐났다는 것이다. 그가 했던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게 내가 해야 할 일들 중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였더니, 나의 마음은 안정되고 용기를 얻고 조심하게 되며 내 훈계를 받곤 하였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나의 마음은 주님과 체험적인 교제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씀을 읽은 후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마치 그 말씀으로 부터 축복을 얻어내듯이 말씀을 연구하였는데, 그 말씀이 나 자신의 영혼의 영양섭취이었다. 이것을 규칙적으로 하였더니 얼마 후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드리며 또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소원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곧 묵상하다가 나 자신은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뜨거운 기도이고 깊게 하는 기도인 것이다. 시도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진노하게(25)
‘여호와를 진노하게’ 아하스 왕이 곤고를 당했을 때 해결해 보겠다고 한 일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그러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상숭배였지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이렇게 180도로 달라지는 인생을 살게 된다.
엄마가 둘째 아들과 가족 사진첩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이 한 사진을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그 사진은 바로 자신을 임신한 엄마와 아버지, 형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째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어디 갔어? 왜 나만 빼놓고 이 사진을 찍은 거야?” 엄마는 손가락으로 불룩한 엄마의 배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응, 너는 엄마의 뱃속에 있었어.” 둘째 아들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엄마! 내가 왜 뱃속에 있어?” “글쎄...” “아니 엄마가 왜 나를 먹어버렸냐고?” 생각의 한계는 그저 답답할 뿐이다. 아하스 왕이!
자 이제 오늘 설교의 핵심을 간추리자. 아하스 왕의 비극일생을 잘 되새김질하자는 것이다. Yates pool처럼 아하스 pool을 놓쳤기 때문이다. 곤고할 때 외고집을 부렸기 때문! 어린 아이 신앙 때문!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