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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설교

“유익이 없더라!” (대하 28:16-21 ‘여호와의 낮추심’) 19.3.31.

우리 옛 할아버지들은 젊은 청년들에게 ‘철들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농사를 짓을 수 있는 청년을 두고 한 말이다. 옛적에 어떤 부잣집의 아들이 한자를 읽지 못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아들의 문맹자 딱지를 떼어주려고 특별히 저명한 서당훈장님을 모셨단다.

서당훈장은 붓으로 먼저 한 획을 가로로 그으며 아들에게 따라 해보도록 한 뒤 “이것이 ‘한 일(一)’이란 글자니라.”라고 가르치고 몇 번 더 써 보게 하였다. 그런 후에 한 일자를 세로로 두 번 쓰더니 “이것은 ‘두 이(二)’니라.”라고 가르치고 연습을 시켰다. 그러고 또 ‘석 삼(三)’이란 글씨를 가르쳤더니, 부잣집 아들이 붓을 놓고 손으로 무릎을 치더니 문을 박차고 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아버지, 글자를 깨우쳤습니다. 이젠 한자를 다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훈장님 없이 혼자서도 다 읽고 쓸 수 있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마냥 기뻐하더니 “역시 훌륭한 훈장님은 달라!” 하시고, 훈장님께 후한 인사를 차리고 돌려보내드렸단다. 그러고 며칠 후에 집안잔치 때 아버지는 아들의 글재주도 볼 겸 아들에게 “초청장을 쓸 수 있겠느냐?”하고 물었더니 아들은 “그것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요.”라고 하더니 아침부터 꼼짝도 않고 방안에 계속 틀어박혀 초청장을 작성하였다. 해가 지도록 아들이 꼼짝하지 않자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갔다가 아들을 보고 깜짝 놀랐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투덜대며 하는 말이 “왜 하필이면 ‘천(千)’씨였는지... 겨우 900까지밖에 쓰지 못했어요.” 아들은 한일(一)자 천개를 정성껏 그려가고 있더란다.

이 딱한 부잣집 아들의 모습을 혹시 우리가 한 적은 없나요? 성경 몇 장 읽고, 몇 구절 외우면서 교회 몇 년 다녀놓고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고 고집 부리지는 ‘철부지’ 말이다. 자기 이웃들에게 실망시키고 상처를 주는 교인들을 좀 자세히 살펴보면 부잣집 문맹자의 철부지 끼를 볼 수 있다. 인간은 세 가지 착각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언제나 청춘인 것처럼 안 늙을 것 같다는 착각이고, 아프거나 병들지 않을 거라는 착각, 마지막으로 자신은 좀처럼 교만하지 않다는 착각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좁은 소견에 따른 착각인 줄 모르고 왕고집으로 빗나가는 신앙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 장본인이 유다 왕 아하스이었다. 지금 저랑 같이 그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보자(16-18, ‘에돔’ ‘다시’ ‘블레셋’ 이 세 단어를 주시하면; 본문의 핵심이 술술 풀림. ‘다시’ = 아람 왕이 침공해서 하루 동안에 12만 명을 전사당했고<5-6>, 또 북 이스라엘에게 공격당해서 왕궁은 초토화됐고<7> 20만 명이 사로잡혔다 풀려났음<8> 그런데 또다시 에돔과 블레셋에게 침공을 당했음. 더구나 에돔과 블레셋은 유다의 속국 처지였음<17:11, 20:22, 25:11-12>).

이런 처지였는데 아하스 왕은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을 당하자 앗수르 왕에게 지원병을 간청했던 것이다! 그 당시 앗수르와 유다관계는 맹수 앞에 먹잇감 정도였다(왕하 15:19, 29, 16:7, 대하 28:20. 1900년 경 대한제국과 일본, 러시아. 6,25전쟁 때 낙동강 전선 정도라고 볼 수 있음).

지금까지 살펴본 자료들을 종합하여 아하스 왕이 당한 처지를 정리해 보면 한 마디로 풍전등화(風前燈火; 1차 2차에 걸쳐 주변나라들에게 물리고, 뜯기고, 빼앗기고... 그래서 침몰하는 세월호 같은 꼴로 몰리고 있었음!). 하나님을 믿은 교인들도 이 지경까지 처참해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욥 19:1-2, 6-7, 15-18).

성경에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꾀 많이 기록해 놓았다. 예를 들면, 노아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미리암의 문둥병, 땅 팔아 헌금하다가 즉사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런데 오늘날은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는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헌금을 잘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혼난다면 매주 예배 때마다 꽤 많은 사고들이 터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그런 사고소식은 없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잘못이 없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하나님의 진노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그 방법은 로마서 1장에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6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4, 26, 28).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5-6). 하나님의 진노는 없어진 게 아니다. 심판 때까지 내버려 두신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그 무서운 진노는 왜 당장 아하스 왕에게 생겼는지 살펴보자. 그게 저와 여러분에게도 정답이기 때문이다.

1) 여호와께서(19)

‘망령되이’와 ‘낮추심’ 이 두 단어가 가리키는 실체를 우리가 여기서 확인하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망령되이’ פרע 파라 to free, go out of control, disorder, lawless. 구체적으로 2-4절에 기록된 극단적인 우상숭배임. ‘낮추심’ הכניע 히케니아 be subdued, submitted, humbled. ‘The LORD had humbled Judah because of Ahaz king of the Israel, for he had promoted wickedness in Judah and had been most unfaithful to the LORD.’ -NIV- 그래서 하나님은 블레셋과 에돔에게 짓밟힘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조공을 바치던 속국에게!>. 최악의 수치와 굴욕을 당하도록 하신 것임.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도 징그러운 굴욕을 당하게 만드신다는 것임).

굴욕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니라 굴욕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굴욕이 많은 사회란 굴욕당할 일을 많이 하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 굴욕을 더 많이 시인하는 사회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굴욕을 금방 알아차려야 한다. 굴욕은 느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요 삶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참된 굴욕은 회개하는 삶으로 들어서게 하고, 인내를 만들고, 헌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종종 TV에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범죄를 들켜서 굴욕을 실감한다는 뜻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기주의를 들키면 얼굴을 숨겨야 한다. 기도와 예배에 게으른 것도 굴욕 짓이다. 전도하지 못한 것은 얼굴을 송두리째 가릴 만큼 굴욕이다. 굴욕이 살아있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유익이 없음(21)

아하스 왕이 에돔과 블레셋을 물리치기 위해 앗수르에게 지원군을 호소했더니 앗수르 지원군은 실전에서 적군으로 돌변해서 아하스 왕은 비상대책으로 성전과 왕궁, 방백들의 재물을 몽땅 갖다 주었지만 소용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애국행위가 왜 무용지물이 되었는가? 내용은 맞았는데 방향이 빗나갔다. 시 95:6-7에 설명이 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שׁחה 솨하 to bow down, worship. 허리를 굽혀서 머리를 땅에 대는 동작 + ערכ 카라아 to bend, bow<of reverence + ברך 바라크 to bend the knee, adore, praise, greet, bless. 존경의 극치! 최고 최상, 최대치로 바침). 우리나라 1세대 구약학박사 김정준 목사는 한국교회들이 의자예배를 시작하면서 이 예배를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의자를 치우라!”고 제안하면서 무릎 꿇고 굽혀 경배하는 예배로 돌아가자는 글을 썼다.

식사 후에 적극적으로 밥값을 계산 하는 이는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돈보다 관계’를 더 중히 생각하기 때문이고, 일할 때 주도적으로 하는 이는 바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다툰 후 먼저 사과하는 이는 잘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상대를 귀하게 보기 때문이다. 자주 나를 도와주시는 분은 빚진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정으로 나를 승리시키기 위함이며, 종종 우리를 망하게 하시는 그분은 한가하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임마누엘 언약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계시기 때문이다. 깨달으시길 축복한다. 아멘.

3) 앗수르 왕에게(16)

아하스 왕과 앗수르 왕은 바로 이웃이었다. 아하스 왕을 하와로 바꾸면 앗수르 왕은 선악과이고, 물위로 걷는 베드로로 바꾸면 바람인데, 아하스를 우리 자신으로 바꾸면 앗수르는 뭘까? 질병이고 사고이며 부도이다. 문제는 왜 이런 몹쓸 실패요인이 우리의 이웃으로 있느냐이다. 아예 없게 창조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것이다. 이 불만도 삿 2:22에 답이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삿 2:20-22).

1992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인의 사망원인을 조사했더니 1위는 암, 2위가 뇌혈관질환, 3위는 심장질환, 4위 당뇨, 5위가 자살이었단다. 그런데 젊은 층으로 내려가면 더욱 심각해진다. 20대의 사망원인 1위는 암이 아닌 자살인데 사망원인 30%가 자살이었단다. 92년에는 자살이 사망원인의 10위였고, 98년에는 7위, 그리고 2006년도에 5위로 올라왔다. 그러다 12년도에 1위를 차지했단다. 앞길이 구만리와 같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살아가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니 자살을 쉽게 선택하고 만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불행을 고치는 약은 이제 소망밖에 없다.”라고 했는데, 우리 한국사회는 이미 소기망근이 극심해졌는데 교회는 축복만 외치고 있어 안타깝다. 이제라도 축복 대신 하나님과 포개지는 회개로 돌아가야 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우리자신에게 보여준 저울눈금을 확인하자. 오늘 설교본문은 아하스 왕이 굴러가 박힌 천한 자리를 보게 하였다. 그 이유는 망령된 믿음생활 때문이고, 내용은 좋은데 방향이 빗나갔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찾지 않는 고집 부림 때문이었다. 우리 자신의 삶이 아닌지 돌아볼 때 성전 동쪽 문에서 흘러내린 생명수 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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