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7일 설교
“여호와 보시기에!” (대하 28:1-7 ‘아하스 왕의 고집과 화’) 19.3.17.
‘봄길’ - 정호승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눈보라가 훈풍으로 바뀌는 봄을 누구나 체험한다. 이러한 계절변화의 철칙이 갖고 있는 교훈을 강조함으로 ‘봄길’ 시는 공감시키는 진실이 있는데 뭔가? 절벽 같은 시련 앞에서 좌절을 극복시켜주는 지혜를 ‘길이 되는 사람’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정호승 시인은 ‘봄길’이라는 시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길이 끝난 ‘대 절망’ 앞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사람을 만나든지, 바로 그 사람으로 살아가든지 하자는 것이요. 사랑이 끝난 상황에서도 새로운 사랑으로 인도해주든지, 새 사랑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만나든지, 새 사랑 역할을 직접 하든지 그래서 봄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하직시킬 대 절망들도 계절변화의 봄처럼 바꾸는 길을 시인은 보아 확신하고 있다(있다 5회 반복함).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이 세상 하직을 결단’할 만큼 대 시련을 그리스도인들도 당할 수 있다. 그럴 때 ‘하직’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새 길로 인도해주거나 열어주는 사람을 만날 것이냐? 아예 본인이 새 길을 열어갈 것이냐? 이 세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이르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본문말씀을 기록하게 했던 그 현장을 조용히 생각을 집중하면서 바라보노라면, ‘아하스’라는 왕은 ‘길이 끝나는 곳’에 자주 이르곤 하는데 번번이 ‘길이 되는 사람’ ‘사랑으로 남아 있는 가람을’ 만나지 못하고 말아 참으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2-4 ‘만들고’ ‘분향하고’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이러한 기록들은 모조리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나머지 참으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줌.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안타까운 선택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설교본문에 기록해 놓았음. ‘정지' ישׁר 야샬 to be straight, upright, approve.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임). 2-4절에 기록되어 있는 일들은 전부 아하스 왕이 하였던 믿음행위들이다.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은 인정할 게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을 좀 해 보자. 만들었지요, 골짜기로 가고, 또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고, 그러고 또 푸른 나무를 찾아다녔다. 뉴킹제임스 성경에 ‘우상’(images), ‘자녀들을 불사르고’(burned his children),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on the high places, on the hills, every green tree)라고 복수로 번역해 놓았다. 보통 열정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하나님은 믿음행위로 인정한 게 없었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착각할 수 있고, 또 그 착각을 고집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 2절에 잘 밝혀놓았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세 살 된 아들이 엄마에게 말을 한다면 그 말은 십 중 팔구 문법에 맞지 않겠지요. 하지만 자기 아들의 말이 문법에 맞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엄마는 없다. 3살 아이가 말을 걸었다. “어마, 사라해.” 엄마는 “아들아, 단어가 틀렸잖아.” 이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어마도 너를 사라해.”라고 따라하고 얼른 안아주고 얼굴을 비벼준다.
그리스도인들도 각자 자신의 영혼수준대로 말로 행위로 표현을 한다. 물론 그러한 언행이 유치하겠지만 그 수준으로 낮추어서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왕을 선발하라고 했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무엘 상 16장 7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도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셨던 일을 복음서에 기록하여 놓은 것이 여러 군데 있다. 그 중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백부장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던 것도 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헬라인이었고 백부장은 로마군인이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양심과 동기를 중요하게 보셨지, 그들의 말이 문법에 맞지 않는다고 외면하신 적은 없다. 사랑함이 동기라면 주님은 다 알아듣고 누구나 기쁘게 받아주셨다. 하지만 중심에 사랑함이 없을 때 우리 주님은 아무리 유식한 바리새인이라도 호되게 책망하셨다. 설교본문에도 무섭게 버리셨다고 밝혀 놓았다(5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6下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7 ‘왕의 아들’ ‘궁내대신’ ‘총리대신’ ‘죽였더라’ 설명이 필요 없지요? 밑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참패해버렸다.
자 그러면 우리 자신을 본문에 비춰보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정답을 함께 찾아보자.
1) 여호와 보시기에(1)
‘여호와 보시기에’(בעיני יהוה 베예이네 야훼, in the eyes of Jehovah, 여호와 하나님의 두 눈에, 하나님이 보는데서 아하스 왕은 만들고 골짜기로 가고, 또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고, 푸른 나무를 찾아다녔다는 것임).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4, 8).
하버드대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환영은커녕 박사님이 만나주지도 않았다. 잔뜩 실망만 하고 귀국준비를 하는데, 큰 비가 내려서 마을이 온통 물난리이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덕이는데 그 청년이 흙탕물에 뛰어 들어가 구해주었다. 그 모습을 본 슈바이처 박사가 그 청년을 불러서 이런 말을 해주었단다. “내가 며칠 동안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볼 가치도 없더군. 그런데 아이를 구해준 것을 볼 때 자네의 마음에 긍휼이 있는 것을 보았네. 이 세상을 치료하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이지.”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유하고 환경을 변화시키시는 기적을 베푸신 사건을 기록해 놓은 성경을 좀 자세히 살펴보면 꼭 긍휼이 있다. 이 긍휼을 하나님이 하시면 ‘불쌍히’ ‘사랑’ ‘십자가’이다. 이 불쌍히 마음이야말로 강퍅한 이 사회에서 꼭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다. 아멘.
2) 바알숭배(2)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바알 신앙인이라는 것임). 그런데 이 말씀에서 저와 여러분이 놓치면 안타까워질 말씀이 ‘부어’이다(מסכות 마세코트 주조된 형상. 틀에 부어서 만들어낸 물건. 어원 נסך 나사크 to melt, pour out. = 하나 둘만 하는 게 아니고 많이 만듬!). 성전의 미화 좋고 필요하다. 그렇지만 믿음의 진보를 방해할 수 있다(‘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5-6>. 왜 그러실까? 요 20: 29에 대답해 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고층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 새 한 쌍을 선물로 받아서 매일 아침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받으라고 새를 베란다에 걸었다가 저녁이면 들여놓곤 하였단다. 그러면서 어미 새는 알을 낳고 품더니 예쁜 새끼 두 마리와 함께 4가족이 되었다. 영하의 날씨가 며칠 간 계속되는데 베란다에 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아침에야 새가 생각나 허둥지둥 살펴보니까 어미 새는 얼어 죽어 있더란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죽은 어미 새를 집었더니, 얼어 죽은 어미 새 밑에 두 마리 새끼는 살아있더란다. 어미 새의 지극한 헌신을 목격한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무 말도 못했단다.
그때 지독한 로마의 한파, 죄악세상의 눈보라가 몰아닥칠 때 십자가에 몸을 던져 차갑게 식어지면서 세상을 덮었던 어미 새의 사랑,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지극한 사랑사건 십자가이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사랑을 간직한 중심을 찾으시지 화려한 장식, 예쁜 인테리어가 아니다. 십자가가 있는 예배, 기도, 찬양, 봉사! 명심하자. 아멘.
3) 불사르고(3)
‘자녀를 불사르고’ 소름끼치게 하는 장면이다. 신앙관에 따라 이토록 빗나갈 수 있다.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 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신 28:53-55),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 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왕하 6:28-29).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언젠가 어떤 아가씨가 여기저기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 사고를 당한 줄 알았더니 그것이 유행이었다. 배꼽을 내놓고 시내를 활보하는 처녀가 있어서 미친 여자인 줄 알았더니 그게 유행이었다. 이제는 아가씨의 팬티가 보여도 그게 유행이라고 한다. 어둡고 혼미한 영들이 유행이란 변칙으로 이 세상을 좀먹고 있다. 그럴지라도 신앙관이 올바르다면 단정함과 사랑스러움을 거룩함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낼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가 가리키는 주님의 손가락을 보자. 설교본문은 아하스 왕의 고집(만들고 골짜기로 산꼭대기로, 푸른 나무로 찾아다님).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길이 되는 사람’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정답 되는 저울이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