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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설교

“정직한 자도 나병에!” (대하 26:16-21 ‘웃시야 왕의 말로’) 19.2.24.

나병환자 시인 한하운(韓何雲, 1920~1975)이 지은 ‘벌(罰)’이라는 시이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한하운 시인은 또 ‘파랑새’란 시를 지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이 두 시는 문둥병이 주는 사무치는 서러움과 고독이 녹아 흐른다. 그 흉해진 몸뚱이를 내밀 수 없어 소록도 외딴섬에 꼭꼭 숨어 살아야 했던 시인은, 죽어서라도 파랑새가 되어 창공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어 ‘푸른 노래 푸른 울음’라고 노래하였다.

한하운 시인은 1920년 함경남도 함주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한태영인데, 16살 때 나병에 걸렸지만 치료받고, 23살 때 중국 배이징(北京)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에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했단다. 그렇지만 파랑새라는 한 덩어리를 만들어주었던 나병은 25살 때 재발함으로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이름도 하운(何雲 어찌하여 떠도는 구름인생인가?)이라 했단다. 그는 그토록 비참한 삶속에서도 시를 지어 시집(‘한하운 詩抄<1949년 29살>’ ‘보리피리’<1955년 35살>)를 내놓자, 사람들은 ‘천형의 시인’이라 불렀단다. 영화 ‘벤허’도 나병환자들이 겪는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지요. 그래서 나병은 어찌나 무서운 병이던지 천형(天刑 하늘이 내린 벌)으로 여기기도 했다.

오늘 설교본문도 한하운 시인처럼 나병 때문에 축복에서 처참함으로 곤두박질 친 인생을 살다간 황제폐하 웃시야를 보여주는데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이다(21, 23). 구약성경 레위기는 13장에 나병의 증상, 진단과 대처방법 등을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면서 나병환자를 격리시키라고 가르친다.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44. 이는 나병 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이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은 그 환부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3, 44-46).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못한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한 덩이를 쌓곤 했는지... 나병환자 한하운 시인 역시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어져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대면서 가리라’라고 울부짖었다. 그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마음을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저 안타까움 거기까지만 공감할 뿐이다.

웃시야 왕에게 나병 발병은 그 누구보다도 쓰라림이었다고 보는 것은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대하 26:15.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8>) 이 사실 때문이다. 요즘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기적, 여호와의 은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으면서 살아간 황제이었다는 것이다. 이토록 부럽게 하던 웃시야 왕이 하루아침에 문둥병 환자로 돌변하게 되더니, 죽는 날까지 별궁에 감금당하다가, 죽어서도 격리 당했다. ‘그는 나병환자라 하여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하니라.’(23).

멀쩡하게 큰 나무가 시름시름 시들어 가는데, 물만 주고 비료만 주고 있을 일이 아니다. 그 나무속을 갉아먹는 벌레를 확인하는 일도 해야 한다. 의사들도 피검사, 소변검사, x레이사진을 찍어서 병균을 검사한다. 그러한 병 벌레를 성경방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다. 싫어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에게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서서히 시들어가게 되어 예배도, 기도도, 찬송도, 봉사도 하품하면서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쏟아 붓는 은혜만 막연하게 기다린다고 해결될 영혼이 아니다. 싫어함이 뒤집어지도록 통회자복을 하는 게 특효약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처리해야 한다. 회개가 하나님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DNA 사랑을 생성하게 한다. 자녀는 부모의 DNA를 지니고 태어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의 본질DNA가 믿음의 세포 속에 내재되어 있는 법이다. 사랑이라는 DNA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움은 마귀의 DNA이다. 아름다운 포도원을 허무는 것은, 맹수가 아니라 작은 여우 한 마리라고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영혼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몰아내는 비결은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을 백신으로 삼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실제로 마귀의 놀이터인 것이다. 하나님의 DNA를 간직하는 은혜생활을 축복한다. 아멘. 웃시야 왕은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을 백신으로 삼는데 실패하자 나병환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 그러면 웃시야 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생활의 답을 함께 찾아내자.

1) 악? 분향?(16)

‘분향하려’;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려고 하였다는 것인데, 이 일이 문둥병에 걸릴 정도로 그렇게까지 흉악한 일일까? 분향은 성전에서 향불을 피우는 것이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에 해당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려버린 자가 웃시야 왕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우리 하나님의 평가는 ‘악을 행하여’(שׁחת 솨하트 to act corruptly, destroy, ruin)이었다. 왜 그런 평가를 하셨는가? 하나님이 정해놓은 향불규칙은 엄격하였다(‘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출 30:34- 35, 7-10,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 10:1-2). 하나님의 법칙준수가 순종이요 충성이라는 것임!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웃시야 왕은 분향했지만 하나님은 שׁחת (솨하트 to act corruptly, destroy).

2) 나가소서(18)

‘나가소서’ 이 말은 제사장 아사랴가 분향을 하려는 웃시야 왕에게 행한 강력한 퇴각조치이었다(‘곁에’ על 알 near, by, in front of, on, up, over, onto, against. ‘They confronted him’ -NIV- ‘to resist him’ -GN- ‘They opposed King’ -Amf- ‘그들이 웃시야 왕을 가로막으며’ -현대어 성경-). 오늘날 우리의 믿음생활 상황에 견준다면 예배시간에 얼굴 붉어지도록 지적하는 설교 정도 된다. 따끔한 충고지요. 봉사도 헌신도 사명감동도 아니니 당장에 중단하라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하는 것은 모두 다 봉사만 되는 게 아니다. 불순종도 있고, 방해도 있으며, 범죄도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는 현대 가치관으로 보면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성공한 인물이다. 꼭 사업적인 성공 외에 직장이나 학문, 기술, 예술, 스포츠..... 다 포함된다. 그는 만족하였고 표창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다. ① ‘하나님이 보시기에’라는 의식이 없었다. ② 심판대를 무시했다. ③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 사랑함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데 이웃이 없었다. ④ 영혼이 육에게 지는 인생이었다. 참 삶은 영혼이 깨어있는 것인데 껍데기 가짜 육체 목숨만을 살아 있었다. 저와 여러분은 강력한 퇴각조치 설교에 정신 차리길 축복한다. 아멘.

3) 화(19)

‘화를 내니’ 강력한 퇴각조치에 대하여 웃시야 왕이 반응한 것을 기록해 놓은 말씀이다. ‘화’라는 글자만 보지 말고 그 현장을 자세히 보자. 웃시야 왕을 성전에서 분향향로를 잡고 있고, 그 앞에는 제사장 아사랴와 용사제사장 80명이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웃시야의 분노는 제사장 81명을 꺾어버리겠다는 고집 부림이었다. 그래서 이 고집을 막아내는데 문둥병이 제격이라는 판단을 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 1:7-8).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3-17). 헛 열심! 안 열심! 못 열심!! 안 할수록 참 열심!!! 분별해주시는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에 순종하는데 익숙해지기를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이 가리키는 각자 신호등을 다시 확인하자. 오늘 말씀은 ‘기이한 도우심’을 받아 승승장구하던 웃시야 왕이 하루아침에 나병환자로 몰락하는 그 현장을 목격하게 하였다. 진짜 안타까워 통곡을 터뜨리게 한 신세이었지만 참으로 사소한, 그까짓 거, 아니 오히려 순종하고 충성하려는 봉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강력퇴치 말씀을 무시하였기 때문이었고, 착각을 고집 부리느라고 혈기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축복시간, 자리, 일 선택 때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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