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7일 설교
“정직하였지만!” (대하 25:1-4 ‘아마샤 왕의 믿음생애’) 19.1.27.
영국의 캐리라는 사람은 죠지와 윌리엄 두 아들의 아버지로 평범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두 아들 모두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매사에 성실하여 공부도 열심히 하더니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했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런 두 아들에게 기대를 잔뜩 걸었다. 이 두 아들이 캐리 가문에 명예를 한층 더 높여주는 대단한 두 기둥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소원대로 큰아들 죠지는 국회의원이 되더니, 사업수완도 있어서 돈을 많이 벌어들였다. 그래서 큰 아들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러한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입은 항상 귀에 걸려 있게 되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윌리엄은 엉뚱하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사로 인도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고, 강력하게 만류했다. 왜 하필이면 선교사냐? 왜 그 미개인들 속에서 한평생을 살려고 하느냐? 하면서 말렸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윌리엄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는 선교사로 떠났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이제 두 형제가 다 별세하였다. ‘Encyclopedia Britannica’(엔사이클러피디아 브리티어니커 대영백과사전)에 두 형제의 이름이 다 기록되어 있는데, 동생 윌리엄 캐리에 대하여 무려 한 페이지 반을 설명해 놓았고 핵심은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형인 죠지에 대한 기록은 ‘윌리엄 캐리의 형’이라고 간단히 기록해 놓았다. 누가 대단한 기둥인가? 대영 백과사전 측은 동생 윌리엄이 형 죠지보다 훨씬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문화선진국일수록 사람이 자신의 부와 출세 위주로 살아가는 삶보다, 반대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선택하는 삶을 더 크게 본다. 그런데 특별하게 하나님의 계획실현을 위해 시간과 지식, 재능, 재물을 기부하고 살다 죽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심판대에서 춤판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은혜로 교회는 심판대에서 춤추게 되는 믿음생활 코스로 인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아멘!
오늘 설교본문에도 우리 하나님께서 심판대 평점으로 일생을 총평하신 일을 기록하여 놓았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2). 지금 우리가 함께 읽어본 말씀은 대충 그런대로 무난한 평점이라 할 수 있지만 조금만 분석해 보면 참 딱하고 안타까운 견해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타깝게 하는 점이 무엇인지 아직 확실하게 보지 못한 분들은 본문에서 ‘하였으나’라는 말씀에 주목하자. ‘하였다’와 ‘그러나’를 합하여 줄인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나’에 해당한 히브리어는 라크(רק only, surely, alone 우리 하나님께서 아마샤 왕의 믿음일생을 총평하셨는데, 아마샤 왕이 확신을 가지고 혼자 독단적으로 한 게 없어서 안타까워하셨다는 것임)이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은 일을 기록해 놓았다. 같이 확인하여 보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5:3-7. ‘우리들’은 여러 어부들이 있었다는 것이요, ‘내가’는 혼자를 의미함,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는 확신이요, 결단임. 우리 하나님은 믿음으로 하는 결단을 이렇게 귀하게 보신다는 것임! 그런데 이렇게 귀하고 큰 믿음행위를 했던 주인공이 누구였나? ‘시몬이 대답하여’<5> ‘시몬’은 예수님을 믿기 전 이름이었음!).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26-27).
사람이 살아있으나, 감각까지 마비되었다면 식물인간이라 부른다. 심장이 뛰고 맥박도 잡힌다면 살아있는 게 분명하지요, 하지만 사람이 운동신경도, 언어능력도, 인지능력도, 학습능력도, 정지된 상태로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사람의 영혼이 식물인간인 교인을 없을까? 설교를 듣고 성경을 쓰고 감사해서 자원하여 기도나 봉사, 전도를 하던 성도들이 많던가요?
후각이 마비된 경찰견은 경찰작전에 제외되고 만다. 붕괴된 건물더미 속에서 피 흘리는 희생자를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신자 이웃을 알아보지 못하는 교인은 후각을 잃은 신앙경찰견과 다를 바 없다. 그 교인이 게으르기 보다는 성령님이 감동하심에 무뎌져서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 믿는 사람이 이럴 수 있나?’ ‘목사님이 저럴 수 있을까?’ 저럴 수 있다. 그러나 영적 감각이 살아 있다면 긍휼히 여기시는 감동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칼집을 잃은 칼도 심각하지만 무뎌진 칼이 칼집 속에 꽂혀있는 것은 안전함 보다 한심할 뿐이다. 사과도 못 깎는 칼이라면 언제 어디에 쓰겠는가? 못생겼더라도 예리하게 날 선, 칼날이 영감이요 영성이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무뎌진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급선무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날마다 ‘교회골목’마다 들려주신다. “칼~ 갈아요. 칼!” 하시고.
자 그러면 아마샤 왕을 좀 더 살펴보면서 아마샤가 왜 확신을 갖고 결단하지 못해 우리 하나님을 안타깝게 하고 말았는지 그것을 알아보자.
1) 부왕을 죽인 신하들(3)
3절 말씀은 4:25사건에 대한 복수를 말해준다. 그러니까 아마샤 왕의 아버지 요아스 왕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을 처형한 일로 신하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래서 아마샤 왕은 부친의 암살을 복수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갚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
‘해가 있으면 갚되’(ואם-אסון יהיה 워임-아손 이흐예 But if injury occurs. ‘But if there is serious injury,’ -NIV- = 이러한 번역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합당하려면 ‘하라’를 ‘말라’까지 생활할 줄 알아야 하고 동시에 ‘말라’도 ‘하라’까지 할 줄 알아야 함을 반영함 것임. 무슨 의미인가 하면, 십계명의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너는 나를 사랑하라’는 뜻이고, ‘살인하지 말라’는 ‘사랑하라’이며,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기 때문임.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단어 자체에만 국한되어 갇히면 엉뚱하게 빗나가기 쉽다는 것임). 아마샤 왕이 문자주의에 갇혀들고 말아 확신을 소신껏 행동하지 못해서 우리 하나님을 안타깝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2) 신하의 자녀들(4)
아마샤 왕은 부친의 암살을 갚아줄 때 부친을 암살했던 그 신하들의 자녀들은 모두 살려주었는데 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느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כי 키 because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16).
조금 전에 설명했지요. ‘하라’를 ‘말라’까지 반영할 줄 알아야 하나님의 뜻에 온당하진다고. 그렇다면 자녀를 죽이지 않는 살인복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참 뜻이었을까? 우리 예수님의 설명을 들어보자(마 5:7.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우리 ‘하나님이 긍휼히 여김으로’ 갚아주시는데 이게 복! ελεημονες 엘레에모네스 merciful, pitiful, compassionate. 상대방의 고충을 공감함으로 동정심이 발동하는 게 긍휼임).
요셉의 믿음중심을 보자. 바로 왕의 친위대장 저택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침실이었지만 그의 믿음중심 감각센서는 나침반 바늘처럼 떨고 있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쳐 이겨냈다. 이 믿음중심은 20여년 후에도 살아있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 7).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 49:22, 25).
아마샤 왕은 요셉의 복을 놓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다. 명심하길 축복한다. 아멘.
3) 어머니(1)
아마샤 왕은 어머니에 대한 기록(예루살렘 사람, 여호앗단)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는 몇몇 왕에게만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어머니의 기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영향력 때문이다. 유대인이 국제결혼을 하였을 때 정신적으로 그의 자녀들을 어느 나라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지요. 유대인들은 간단하게 판단기준을 갖고 있는데,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의 자녀들은 유대인이 틀림없고,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면 그의 자녀들도 유대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다. 그만큼 유대인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절대적 수준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마샤의 어머니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히브리인 사상을 아들에게 잔뜩 심었겠지요. 그런데 아마샤는 유일신 신앙심이 흐지부지하였다(14<‘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저기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고 분향한지라’ = 에돔 신 우상숭배!> 27 ‘아마샤가 돌아와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그런데 신앙관이란 게 이럴 수 있다. 다윗을 보자. 목욕하는 어느 부인을 보는 순간, 다윗은 발동되는 정욕을 다스리지 못해 마침내 사고를 저질렀다. 영적 감동에 무뎌진 삼손은 두 눈을 뽑힌 채 맷돌을 돌리며 조롱을 당하고 말았다. 한국교회들의 무뎌진 믿음감각은 세상뉴스거리로 자주 씹힌 지 오래 되었다. 하지만 믿음의 사회가 침몰할 때 예레미야는 눈물선지자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예레미야의 영혼센서는 정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경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작동하는 감동하심에 민간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나 자신에게만 울려온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챙겨들자. 오늘 설교는 아마샤 왕의 믿음일생 총평이었다.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2%부족처럼 라크(רק only, surely, alone) 부족! 문자주의! 긍휼까지! 어머니 교훈! 우리자신은 어떠한지 점검해 보고 진보되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