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0일
“여호와께서 징벌을!” (대하 24:22-27 ‘요아스 왕의 거짓 믿음’) 19.1.20.
마요네즈와 피클 그리고 케첩 등으로 전 세계를 석권한 하인즈 식품회사를 창업한 헨리 존 하인즈(Henry J. Heinz 1844-1919)는 191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자신의 어머니인 애너 마거레타 하인즈를 위한 예배당을 건축하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겼단다. 그래서 하인즈의 자녀들은 5년 동안 대공사로 피츠버그 대학캠퍼스 안에 멋진 예배당을 완공하고, ‘하인즈 기념 예배당’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그 예배당은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지금까지도 피츠버그의 상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단다. 그런데 그 예배당을 직접 찾아가 곳곳을 둘러보고, 심지어는 교회안내서까지도 예수님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목사님이 있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사방팔방을 보아도 그 예배당은 이름 그대로 주님과 상관없이 오직 하인즈의 예배당으로 존재하고 있단다. 하인즈의 예배당은, 예배당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모시기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을 주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창조주 하나님은 무시당하고 밀려났기에 예배중이나 기도, 찬양 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무엇에 의미와 가치를 두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대도시의 상징물로 손꼽힐 만큼 돋보인 예배당이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바보짓일 수 있다. 바벨탑이의 교훈은 지금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뜻과 이웃사랑에는 무관심하고 자신만을 위해 점점 크게 곡간을 증축하였던 대 성공을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눅 12:20). 저와 여러분은 심판주 하나님을 믿지요. 물론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타가 인정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알곡일지? 헛 쭉정이일지? 우리의 삶은 소원대로 천국이요 면류관에 맞춰져 있는 게 틀림없는지? 오늘 설교본문이 그 진단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오늘 설교본문은 요아스 왕이 횡사한 장면을 기록해 놓은 말씀이다(1. 47세). 그리고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에게 암살당했다고 밝혀놓았다(25.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래서 요아스 왕은 당연한데도 ‘왕들의 묘실’에 장사하지 않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아무튼 요아스 왕은 천하고 천한 죽음 그것도 암살로 횡사 당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수영을 하는 것과 물에 빠지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난다. 생존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깊은 강물에 빠져도 수영을 하면 살고, 조그만 한 웅덩이지만 빠져 죽는 것은 수영을 못하기 때문이다. 별로 위험하지도 않는 물인데도 빠지면 사투를 벌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험천만한 바다인데도 바닷물에 떠서 눕고 즐기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을 누리는 신앙생활과 암기하는 것도 천지차이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의 출발은 ‘믿음’이지만, 믿음생활의 절정은 ‘누림’이다. 믿음이라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성도가 있고, 믿음 듬벙에 빠져 허우적대는 교인도 많다. 누구나 바닷가에 갈 수 있겠지만 아무나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교회에 다닐 수 있고 예배도 드리지만 아무나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교회에 다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결되어 있으냐가 핵심이다. 수영을 전혀 못할지라도 배를 타거나, 구명조끼나 튜부를 지녔으면 바다를 즐기지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도 신앙생활을 노동하는 사람처럼, 찡그리고 하는 사람이 있고, 놀이를 즐기는 사람처럼, 싱글벙글하며 하는 성도가 있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수영을 못해도 가만히 있으면 부력 때문에 몸이 뜨게 된단다. 그런데도 사람이 익사하는 이유는 수영을 못하니까 조바심으로 허우적거리다 지쳐서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잡고 허우적거리면 피곤한 교회생활로 빠지게 된다. “얼마나 ‘좋은 수영장’을 다니느냐”보다, “얼마나 ‘명품수영복’을 입었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산골개천에서 반바지만 입고 개구리헤엄이라도 치고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수영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교인은 믿음의 바다를 떠나거나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보다 예수님 안에서 ‘은혜의 파도타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좀 추워도 괜찮고 세집에 살면서 라면을 끓여먹고 살아도 괜찮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타가 인정하고, 소문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이제는 소문 때문에 그분들을 선망부터 할 게 아니라, 그분들의 믿음중심을 주목하여 봐야 한다.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는데, 성경을 쓰고 산다는데, 오래 믿었다는데, 믿음중심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흉년이라면 진품이 아니요, 리콜 대상인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에 나오는 요아스 왕이 그러다 망했다.
자 그러면 요아스 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헛 쑥정이 믿음생활을 예방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자.
1) 배은망덕(22)?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져버리는 행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22:11과 23:11, 24:2에 기록되어 있다. 목숨을 건져준 은덕(22:11), 임금으로 세워준 후원(23:11), 왕권을 유지 강화시켜준 지도편달(24:2-3)이었다. 이 정도라면 요아스 왕의 47년 일생의 99% 생명의 은인이었다. 의식주를 도맡은 부모님 역할, 제왕수업, 믿음생활의 환경, 중보기도..... 하지만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자 곧바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처형시키고 말았다.
어느 날 몸의 지체들이 비상회의를 열었는데, 먼저 코가 말했단다. “여러분, 장사는 점점 바닥을 치는데 우리 중에 놀고먹는 못된 백수가 있습니다. 바로 제 옆에 사는 입이라는 놈인데, 그 놈은 하고 싶은 말은 혼자 다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혼자 다 먹습니다. 이렇게 의리 없는 입을 어떻게 처벌할까요?” 그러자 발이 맞장구를 쳤다. “저도 입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 주인이 얼마나 뚱뚱합니까? 그 무거운 몸을 몸짱 만들겠다고 매일아침 뛰어대니 내발바닥은 물집투성이 입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하고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저 입놈이 혼자만 쳐먹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어서 손도 말했다. “또 입은 게으릅니다. 소나 닭을 보세요. 그들은 입 혼자 잘 먹는데, 우리 입은 날 보고 꼭 이것저것 갖다 달라고 심부름을 시키고 자기만 먹습니다. 정말 환장하겠습니다.” 그때 눈이 말했다. “이렇게 비난만 하지 말고 당장 실천을 합시다. 지금부터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절대로 보지 말고, 냄새도 맡지 말고, 입에게 갖다 주지 맙시다.”
입을 굶기자는 제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사흘 후에 코는 사방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로 미칠 지경이었고, 눈은 앞이 가물가물해지는데 손과 발은 후들후들 떨렸다. 한참동안 침묵하던 입이 말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함께 죽게 됐습니다. 제가 혼자만 먹었던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겁니다. 먹는 일도 힘들었습니다. 입술도 깨물고, 돌도 깨물고, 혀도 깨물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시고 서로 협력하며 살아갑시다.”
그렇다. 요아스 왕은 불평불만에 동조하다 배은망덕으로 치달았고 암살로 끝장났다. 늘 생각나길!
2) 피(25)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무지막지한 살해를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21.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 23:6, 눅 11:50-53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진저.’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무죄한 살인을 돌로 했던 것을 질타하셨음!).
신랑이 외눈이라는 사실을 신부는 첫날밤에 비로소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신부가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애꾸라는 사실을 나한테 숨겼군요.” 신랑이 대답하였다. “아니지요. 내가 당신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 고백하지 않았소?” 신부는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신랑에게 받은 연애편지 뭉치를 꺼내서 그 문제의 편지를 찾아내 읽어보았다. 그 편지에 이렇게 써 놓았더란다. “한 눈에 반했소.”
‘한 눈’은 ‘눈 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한 번 얼핏 보고 대충 판단하는 것도 한 눈이고, 한 번에 전부 보이는 시야. 아직 볼 데가 더 있다는 뜻으로 딴 데만 보는 눈도 한 눈이다. 그래서 “한 눈에 반했소.”라고 우기는 신랑 같은 사람을 세상은 머리 좋다고 칭찬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책망하신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요아스 왕이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무수히 들었고, 보았고, 지적당했지만 한 눈으로 하다 망했다.
3) 여호와께서(24)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차이를 잘 보자. ‘적은’과 ‘심히 큰’ 또 ‘무리’와 ‘군대’이다. 그런데도 패배하고 부상당하고 암살당했다. 왜 그랬나? ‘여호와께서’ 하나님께서 이토록 진노하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밝혀놓았다. ‘유다 사람들이 ...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 ‘유다 방백들’(17) ≠ 23:1(‘언약’파와 반대인 소외파, 바알파란 심증. 요아스 왕이 급속도로 배신함을 볼 때!).
덕(德)은 보이지 않는 깨달음(道)이 중심에 있다가 적시에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꽃이 피어나면 향기를 토하는 것처럼! 북극성은 이리저리 옮기지 않는 붙박이별이다. 그래서 북극성은 항상 절대이다. 북극성은 춘하추동 한 결 같이 제 자리를 지킨다. 그런데 북극성은 과연 절대 붙박이별인가? 아니다! 자전과 공전으로 빙글뱅글 돌고 있는 지구에서 볼 때 북극성은 언제나 똑같이 그 자리에 있다면 그 위치는 바뀌게 된다. 그런데도 북극성이 절대로 붙박이별인 까닭은 절대로 한자리에만 박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수시로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하나님과 일직선을 유지하는 법을 깨닫고 익숙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보물찾기처럼 찾아낸 하나님의 화살표를 챙기자. 오늘 설교본문은 요아스 왕의 횡사 장면이다. 요아스왕은 특별한 혜택을 누렸다. 특별구출 특별 구조 툭별구원 ,,, 그런데도 배은망덕! 때문이었다. 성전에서 피 흘림! 때문이었다. 버림받음! 때문이었다. 삶을 만드는 나침반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