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6일 설교
“여호야다의 개혁신앙작업!” (대하 23:16-21 ‘여호와 신앙의 회복’) 19.1.6.
미국은 상당히 색다른 성탄절 예배가 드려진지 13년을 넘겼단다. 대부분 성탄절을 기쁘고 즐거운 날로 기억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밝고 즐거운 분위기로 보낸다. 하지만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점을 감안해 성탄절을 통하여 슬픔당한 사람들을 위한 예배 즉 ‘블루 크리스마스’(blue christmas)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교회마다 빨간색이나 금색으로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데 대신에 슬픔을 상징하여 파란색으로 장식을 하고, 초록색 나무 대신에 죽은 나뭇가지로 장식을 하며... 이게 소위 ‘블루 크리스마스 예배’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했거나 이혼 등으로 생긴 빈자리를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예배란다. 참석자들끼리 부둥켜안고 마음껏 우는 순서도 있단다. ‘빈 의자 신드롬’(empty chair syndrome)에 시달리는 분들을 위로하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주위의 들뜬 분위기에도 심리적으로 고충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인지라, 통상 동짓날 저녁에 예배를 드린단다. 한해 중 가장 긴 밤, 저녁에 드리는 예배라는 뜻으로 ‘가장 긴 밤 예배’(Longest Night worship)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그렇다. 진정한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사건발생이었다. 주님께서 우리인생에 개입해 오셔서 함께 하시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맛 볼 수 없는 참된 평안을 얻고 위로받는 사건이다. 그래서 성탄만큼 참된 기쁨의 좋은 소식을 체험하는 기회는 없다. 이 점을 집중하여 강조한 영어가 ‘merry christmas’이다. 이 ‘merry christmas’를 실제화 시키자는 게 ‘블루 크리스마스’인 것이다.
암으로 부인과 사별한지 몇 개월 된 미국인 할아버지는(77)는 “저 천국의 아내가 더욱 그리워서 크리스마스가 너무 싫었는데 ‘블루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해 다소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고, 12월 초에 40년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사별했다는 한 여성도 “올해 성탄절은 외롭게 보낼 것을 각오했는데, 블루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하여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예배가 마음에 들었다,”라고 말했단다. 이렇게 슬픔을 안고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위안을 준다는 평을 듣고 있단다.
오늘 설교본문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실감하고 즐겁게 반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1 ‘평온하더라’(שׁקטה 샤카타 to rest, free from, undisturbed, silent.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강!). 제사장 여호야다는 바알종교의 나라를 여호와종교의 나라로 바로잡고자 반역하여 성공함으로, 아달랴 왕의 바알신앙 통치를 다윗 왕의 언약통치로 바꿔놓기 위하여 7살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달랴 왕의 6년 통치는 온 나라에 바알신앙이 물들어져 있었다(24:7). 그래서 제사장 여호야다는 그 바알신앙을 철저하게 뿌리 뽑기를 시도하였는데, 그 뿌리 뽑는 모습을 기록하여 놓은 게 오늘 설교본문이다.
우리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살아가시는 첫 걸음 때에 첫 마디가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이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맞추는 것인데 마음과 사상, 삶까지 몽땅 하나님과 일치시키는 대개혁이다. 이 일치시키는 개혁을 얼마나 온전하게 삶으로 이루어 가는지 그 모습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은 믿음수준을 평가하신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9-20).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보훈 가운데 있는 말씀이다.
울랄라 세션의 임윤택 군이 교회에 다니다 중단하고 암 투병 중일 때 매니저가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님에게 전화했다. “윤택이를 좀 만나주세요. 많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이성미 집사는 고 김자옥 집사님과 함께 갔는데, 주로 김자옥 집사님이 자신도 암 투병 중이라면서 위로와 권면을 하였단다. 이성미 집사님은 집에 와서 기도했단다. “하나님, 저는 암 안 걸려서 참 대화를 못하고 빈 말만 했습니다. 윤택이는 어리니까 윤택이를 살려주시고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 주세요. 저는 데려가도 상관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그리고 윤택이랑 문자를 계속했는데 건강검진 결과 암 판정이었다. 이성미 집사님은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윤택아, 나 너랑 암 친구 됐다. 이제 네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야.” “집사님, 교회에 같이 가요.” “그래, 함께 다니자.” 윤택이가 “집사님, 예배드리고 싶어요. 제가 집사님 만난 후에 교회 다니던 사람들을 오해 풀었어요. 제가 힘들다면 집사님은 뛰어오셨고, 같이 우셨고... 집사님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어요.” 병원에서 울랄라 세션 친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 다음 날 별세전화를 받았단다.
그래서 이성미 집사님이 즉시 기도했단다. “하나님, 제가 분명히 윤택이는 살려주시고 나는 데려가도 된다고 기도했는데 반대로 하셨잖아요.” 기도를 마치고 곧바로 병원으로 가서 윤택이를 보니 아주 평온하게 웃고 있는 얼굴로 숨져있더란다. 그 순간 이성임 집사님이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내가 우겨서 고통인생을 살아가는 게 기도응답이 아니구나.” 그 후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바꿨단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나라를 맞추고 평온을 찾았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여호야다와 비교해보면서 평온을 이루게 조정해 보자. 아멘.
1) 언약실현(16)
제사장 여호야다는 반역혁명을 성공한 후에 곧바로 실행한 것은 언약실천 운동이었다. ‘자기와 모든 백성과 왕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재확인하는 일이었는데 모세의 믿음전통을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내는 믿음선언이었다.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9-10).
그렇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바리새인 종교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교회로 새롭게 개혁하여 바로잡으실 때 십자가 보혈로 언약하셨는데 그게 성찬예식이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맞다. 믿음의 생명력은 하나님과 관계맺음에 있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능은 하나님과 관계유지를 얼마나 신실하게 지속해 가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맺음과 관계유지를 흔히 ‘믿음중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알프스 산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13일 동안 방황하다가 구출되었는데, 그 사람은 매일 12시간씩 걸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을 잃은 장소를 중심으로 불과 6Km 안에서 돌아다녔더란다. 사람이 똑바로 걷으려면 눈을 가리지 말아야 한단다. 사람이 자기 발만 보고 20m을 걸으면 약 4m 이내의 간격이 생기고, 100m을 걸어가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윤형방황(輪形彷徨)이라고 한다. 눈을 가리고 빗나가지 않게 계속 걸어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30보쯤 걸어간 후에 잠깐 멈추고 기분을 새롭게 하여 30보를 걷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과감하게 성큼성큼 걷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인생도 윤형방황이 적용되는데 빗나가는 것은 눈을 가리고 걷는 것처럼 한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신앙관대로 과감하게 생활하면 평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체험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산당제거(17)
제사장 여호야다는 신당과 제단과 형상들과 바알 제사장을 없앴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청소하는 모습이다. 언약맺음을 신앙결단이라고 한다면 우상숭배 청소는 신앙관 유지에 해당한다. 신앙결단도 중요하지만 신앙관을 유지하게 환경을 정리하는 것은 곧 신앙삶이요 신앙색깔임으로 순종과 충성을 좌우한다.
어느 선교사님이 전도하러 가는데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가 보니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팔아주세요. 저희 모자가 함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안 돼!” “엄마!” 알고 보니 아들노예를 팔러 가니까 그 엄마가 노예의 주인에게 애원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었다. 한번 팔리면 영원히 생이별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모든 돈을 모아서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단다.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선교사님이 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다. 실신한 선교사님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엄마 노예는 입으로 선교사님의 뒷발을 빨고 또 빨았다. 얼마 후에 선교사님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 노예가 입이 퉁퉁 부어 신음하고 있었다. 엄마 노예는 자기 모자를 사 준 선교사님을 위하여 목숨 걸고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이다. 사랑이 살아있는 믿음은 오직 주인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여호야다는 이런 믿음 삶을 위해 신당청소를 했다. 아멘.
3) 여호와께(18)
제사장 여호야다는 언약확인과 신당청소를 마치고 이어서 여호와께 번제를 국가적인 행사규모로 드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6년 동안 금지당한 예배를 회복시키고 정례화한 것이다. 예배는 믿음 삶의 심장과 같다. 심장은 온 몸에 피를 순환시켜 생명을 유지하지요. 예배를 쉬면 심장이 멈춘 격이며, 예배를 대충 부실하게 드리면 심장이 비실비실 뛰기 때문에 얼굴이 퍼렇고 걷는 것도 힘들어 하는 환자 꼴로 겨우 믿음을 이어가게 된다. 그만큼 예배는 믿음의 본질이요 믿음생활의 엔진이다.
알렉산더 왕이 군병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전진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패잔병처럼 힘없이 행군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더 왕은 그 이유를 재빠르게 분석하여 알아냈단다. 병사들이 전투마다 노획물을 얻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행군하니까 무거운 짐이었다. 알렉산더는 즉시 병사들의 행군을 멈추게 하고 노획물들을 모두 모와 불태웠다. 물론 병사들은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결국 페르시아 전투를 승리로 끝내고 더 많은 전리품을 얻었단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군병이다. 하지만 알렉산더 병사들처럼 억지로 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세상 욕심에 믿음중심을 맞췄기 때문이다. 예배시간에 생명수를 채워야 한다(겔 47:1, 9. 요 7:38).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 중에 발견한 신호등을 다시 확인하자. 저와 여러분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믿음개혁을 보았다. 언약확인과 신당청소, 여호와께 번제가 핵심이었다. 언약은 신앙중심을 재확인함이요, 신당청소는 신앙중심을 유지함이며, 번제는 신앙의 힘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저와 여러분도 믿음개혁으로 올 해를 보내길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