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5일 성탄감사 설교

December 25, 2018

 

                                    “영광돌리는 성탄절입니까?” (눅 2:8-20 ‘올바른 성탄 반응’ 2018.12.25.)

   2차 세계대전 때 성탄절 전날 밤에 네덜란드의 국경근처에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사람을 볼 수 없는데, 미군의 한 분대가 정찰을 나갔다가 눈보라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단다. 밤이 되어 희미한 불빛을 보고 산간 외딴 집을 찾아갔다. 다행히 할머니 한 분이 그들을 맞아들였다. 거실 벽난로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는데, 난로 위에 감자 몇 개를 올려놓았더란다. 강추위에 굶주린 병사들은 감자에 시선을 빼앗기고 군침을 삼키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감자들을 그릇에 담아내놓고 먹으라고 한 후에, 마루로 가서 소쿠리에 가득 감자를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병사들이 정신없이 감자를 구워먹었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미군 병사들은 먹던 감자를 내려놓고 벽으로 붙어 서서 총을 겨누었다. 할머니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밖에 추위에 지친 독일군 병사들이 서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할머니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여기는 내 집이요.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오늘밤만큼은 내 집에서 사람을 죽이는 야만인 짓을 삼가해 주시오. 오늘밤 내 집에는 미국군도 없고 독일군도 없소. 자! 총들을 내려놓고 들어오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 사람 한 사람 할머니에게 총을 맡겼다. 미군들도 총을 할머니에게 맡겼다. 그러고 벽난로를 중심으로 섞여 앉았다. 어느 편으로 구분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영어로, 또 더듬거리는 독일어로, 손짓으로 대화를 하면서 성탄절 전야를 보냈다. 성탄절 전야에 칠면조 고기도 없고 와인 한 잔도 없이, 그저 구운 감자와 따뜻한 물이 전부인데, 두 나라 병사들은 성탄절의 추억과 고향 이야기로 서로 웃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고향에서 성실한 농민이나 노동자이었고, 학교 선생님, 화가였기에 그들이 서로가 죽이기까지 미워할 일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 모두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부모형제와 친구들이 있음을 공감하였기에, 다음날 아침 각자의 총을 챙겨 자기 부대로 돌아가면서 함께 건강을 빌었단다.

   우리는 올 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이했다. 누구나 비슷한 일상으로 올 해 성탄절을 보낸다면 사실상 성탄에 대한 의미나, 고백도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설교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준 대로 목자들은 성탄반응을 삶으로 하였다는 것이다(15-17, 20. ‘인하여’ ‘영광’ ‘찬송’ = 변화!).

   우리는 구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말이나 소가 밥 먹을 때 쓰는 밥그릇이다. 그런데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태어나서 짐승 밥그릇에 누워있었던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도 없었다. 그렇지만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만 태어나서 가난의 극치로 구유에 누어있었다. 사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이니까 궁궐이나 파이프오르간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전이 제격이었다. 그렇다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무슨 교훈을 가르치는가? 말 밥통에 누우신 예수님은 인류의 밥으로 오셨음을 웅변한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도 그 뜻이 빵집(בית לחם)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성탄절은 영어로 표기하면 ‘X-mass’인데, ‘크리스마스’라고 읽는 사람들도 있고 ‘엑스마스’라고 읽는 사람도 꽤 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지만, ‘엑스마스’는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누구를, 누구에게 예배하는지 모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치 밥을 먹어도 누가 그 밥을 주었는지 모르면서 그저 밥이 있으니까 먹는다는 식인데, 이런 경우에 우리 선조들은 ‘밥을 처먹는다’고 평가하였다. 감사를 모르니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셨던 믿음은 머리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에서 살아있는 지식이었다. 사실 믿음은 지식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지식신앙이 머리에 저장되어 있지 않고 가슴에서 머물고 있을 때, 생명을 살리는 헌신을 하게 된다. 머리에 머무는 지식신앙은 나의 삶에 영향력을 주기보다 교만하게 한다. 성령임이 그리스도인에게 감동감화 시키는 바는 지식이 아니라, 행함이란 순종이다. 그래서 순교신앙은 두뇌계산이 아닌, 가슴으로 순종함을 말한다. 들었던 설교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96명이 남중국바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면서 금방 뒤집힐 것 같은 배를 발견한 선박은 25척이나 됐지만 다 외면하였다. 1985년 11월 14일 선장 전재용 씨(45세)가 난민을 발견했다고 한국본사에 전송했더니 괜히 국제문제를 만들지 말고 그냥 돌아오라는 답신을 받았다. 월남이 패망하여 공산국이 되자 보트 같은 배로 탈출한 난민들인데, 인접나라가 입국거부 했고 강제송환 등 국제적인 문제로 복잡했다. 하지만 전 선장은 ‘모든 책임을 선장인 내가 진다’는 각오로 난민 96명을 모두 태웠다. 난민들은 이미 사흘을 굶었다. 부산까지 10일 동안 노인과 아이들, 여성에게 침실을 내주고 환자를 치료해 주며, 선원 25명의 열흘 식량과 생수를 96명과 나눠 먹으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전 선장은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바로 해고당하고, 고향 통영에서 멍게 양식업을 하고 있다. 전 선장은 난민들을 구조한 일에 대하여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뱃머리를 돌릴 때 모든 고난을 각오하였기 때문이란다. 삶을 만드는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보물이다. 전재용 선장처럼 난민을 태우는 신앙인들이 있는데 설교본문의 목자들도 그랬다.

   자 그러면 목자들을 좀 더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믿음교훈을 챙기자.

   1) 이루어진 일(15)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이 말씀은 목자들끼리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목자들이 했던 대화 중에 ‘주께서’라는 말을 놓치지 않고 읽으면 ‘이 이루어진 일’은 하나님의 언약성취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차리고, 중요시 하며, 준비해, 동참할 때, 우리 예수님이 칭찬하셨던 ‘네 믿음이 크도다’에 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 속독보다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관심을 가지고 또 깨달아 활용할 수 있어야 믿음의 진보를 이뤄가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고대 희랍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는 회의론자답게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단다. “배가 난파당해서 사람들이 바닷물에서 허우적거렸다. 한 남자가 용케 널빤지를 붙잡고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을 때, 거기에 다른 사람이 다가와 그 판자에 매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판자는 한 사람만 태울 수 있었다. 먼저 매달려 있던 사람은 두 사람이 판자에 매달리면 널빤지가 가라앉기 때문에 둘 다 죽게 된다고 판단하고 그 사람을 밀어내 빠져 죽게 만들었다. 그러고 그는 구조되어 재판을 받게 됐는데,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 이론으로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란다. 반대로 나중 사람이 살기 위해 먼저 판자에 올라탄 사람을 떠밀어 죽게 해도 무죄이다. ‘긴급피난’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가르쳤는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마 5:38-42).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는 게 명품 성탄반응이다. 아멘.

   2) 빨리(16)

   ‘빨리 가서’ 핑계를 이겨내는 엄청난 순종이다(8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그날 밤에! 들판인데! 양떼의 위험을 무릎 쓰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기적 도우심을 많이 기록해 놓았는데 공통점은 보통이상으로 결단한 헌신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20세기 미국의 오 헨리(O. Henry 1862.9.11.~1910.6.5.)가 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단편소설은 이런 내용이다. “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서로 걱정을 하게 되었다. 서로가 선물을 주고 싶은데 어찌나 가난했던지 선물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 짐은 갖고 있던 시계를 팔아서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 주기로 결심하였다. 아내 델라도 남편에게 시계 줄을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두 부부는 시장으로 갔다. 남편 짐은 예쁜 머리핀을 샀다. 아내 델라도 긴 머리를 잘라 팔아 시계 줄을 샀다. 짐과 델라는 기쁘게 해주려고 바삐 집으로 왔다. 짐은 아내의 깎인 머리를 보고 머리핀만 만지작거렸고, 델라 역시 시계가 사라진 팔을 보고 시계 줄만 들고 아쉬워하였다. 준비된 선물은 서로에게 쓸모없게 됐지만, 두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눈물로 녹아 흐르는 사랑은 위대함을 넘어서 숭고하다. 목자들이 숭고한 사랑을 목격하고 영광으로 찬송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저와 여러분의 성탄반응도 목자들처럼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전하니(17)

   ‘말한 것을 전하니’ 목자들은 그 밤에 즉시 전도하였다는 것이다. ‘말한 것’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준 말이니, 하나님의 언약성취에 대한 설명이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말하면 성경말씀이요 설교이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전도가 하찮아 보여도 귀하게 알고 마음판에 새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전도자의 실력보다 성령님께서 보혜사가 되시어 감동감화 시키시고 깨닫게 하시며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경건한 축복과 은혜로 넘쳐나는 금고가 되지 말고, 불신자를 초대하여 예수님을 소개하는 중개소여야 하고, 또 천국을 깨우치는 부화기 역할을 하여야 한다. 아멘.

   茶山 정약용이 이 글을 썼단다.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 없으니, 그댄 자신을 꽃으로 보시게. 털려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 들면 못 덮을 허물이 없으니, 누군가의 눈에 들긴 힘들어도 눈 밖에 나기는 한 순간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도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도 바위처럼 무겁네. 사려 깊은 그대여! 남의 말을 할 땐, 자신의 말처럼 조심하여 해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너그러움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은 정은 사람을 감동케 하나니, 마음이 아름다운 그대여! 그대의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 지리라.” 이렇게 하면 전도되고도 남을 것 같다. 시도해 보자.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의 뼈대를 간추리자. 목자들의 명품 성탄반응! 이루어진 일! 빨리! 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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