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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일

“배반당하는 나라로!” (대하 21:1-10 ‘여호사밧 왕의 유산분배 실패’) 18.12.2.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그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구축해갔던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B.C.100-44)가 원정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마로 돌아와 시민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단다. 그러나 그는 왕궁으로 들어간 직후에 월계관을 집어 던지며 화를 내 이렇게 말했단다. “죽을 고생을 해서 얻은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이냐? 많은 사람들이 고작 이런 관을 얻으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단 말인가?” 또 시저는 기원전 47년 젤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 보낸 승전보를 이렇게 썼다고 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간단하지만 군사력과 내전승리에 대하여 시저 자신의 확신에 찬 자신감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시저는 내전을 승리로 끝낸 후에 정적 폼페이우스 편에 가담한 키케로, 마르쿠스, 브루투스 등등 많은 적군을 사면해주었고 직위나 재산도 몰수하지 않았단다. 시저가 왕위를 장악해 가고 있을 때 시저의 반대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브루투스가 그 중심에 서더니 브루투스는 44년 3월 15일 반란자들과 함께 시저를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하고 말았는데, 그때 시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이었단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황금의 입술’이라고 부를 만큼 세상을 바르게 가도록 명 설교를 하였던 요한 크리소스톰 주교는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타락한 정치를 하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언하다가 유배를 당하였는데, 그는 그동안 쌓은 모든 것들을 잃게 된 상황에서, 이러한 고백을 했단다. “내 목숨을 빼앗는다 해도 상관없다. 내 재산을 빼앗는다 해도 상관없다. 나를 먼 지역으로 쫓아내도 상관없다. 매를 때리고 고문을 해도 상관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란 어차피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예레미야같이, 엘리야같이, 요나같이, 사도 바울과 같이 그 어떤 고난을 당해도, 어떤 것을 빼앗겨도 나를 두렵게 만들 수는 없다. 나의 모든 고난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게 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시저와 크리소스톰 이 두 사람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지요. 성경이 말해주는 하나님을 모르면 결코 세상을 현실적이고 육적인 욕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한다면 성경을 통하여 창조의 법칙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되고, 종말의식과 영생의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은 왕이냐 신하냐, 목사냐 장로냐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가치관을 보게 하는 안경을 쓰고 읽고 있으면 만감이 교차되면서 끝내 안타까움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3). 지금 함께 읽어본 말씀은 여호사밧 왕이 아들 7명에게 유산을 분배하여 준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특히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축복과 진노를 드라마처럼 체험해 본 왕이었다(17:3, 10, 19:2-3, 20:12, 22, 37). 그렇다면 여호사밧 왕은 유산분배를 통하여 왕권강화와 자식들의 화목단결을 소망했을 것이고, 그래서 심사숙고하여 하나님체험을 반영하면서 일생마무리를 지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결과는 여호사밧 왕의 의도대로 되었나요? 전혀 다르게 되었고, 기절초풍할 일이었다(4-5. 이방원의 왕자 난처럼 6왕자들을 정적으로 몰아 참변을 일으키더니, 왕권도 8년으로 단명하였음).

‘미운 오리새끼’라는 동화는 유명한 한스 안데르센이 썼다. 그는 1805년 덴마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으로 살아갈 정도로 배움이 짧았다. 그러나 문학과 연극을 좋아했기에 어린 아들에게 여러 문학작품을 읽어줬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열한 살 때 아버지가 별세하자,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다 말고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안데르센은 배우를 소원했지만, 얼굴이 받쳐주지 못해 탈락하였다. 그래서 소설가를 시도했지만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벌거숭이 임금님’ ‘미운 오리새끼’ 등등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 인본주의적인 인간애를 진하게 감동시키는 동화작가로 살아가게 됐다.

어느 연못가에 이상한 오리새끼가 태어났다. 외모가 차별난 아기 오리는 다른 오리들에게 외면을 당했다. 그러나 못생긴 그 오리가 나중에 백조로 자라났다. 왕따로 서럽던 미운 오리새끼가 단연 호수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백조여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백조는 오리들과 함께 있을 때 군계일학(群鷄一鶴)이지만 백조 혼자 있으면 쓸쓸한 외톨이일 뿐이다. 여호사밧 왕의 맏아들이 이 이치를 몰라 왕자의 난을 저질렀던 것이다.

불행한 어린 시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자꾸 꿈이 좌절될지라도 인생을 실패한 것도 아니다. 값진 권능을 천한 사람에게 주시고 공동체로 살아가게 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1).

자 그러면 여호사밧 왕의 유산분배를 저와 여러분의 거울로 삼아보자. 그 거울에 보이는 게 뭔가?

1) 아내(6)

‘아합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아합의 딸(아달랴 22:2)이 저지른 죄를 구체적으로 밝히면 음행과 왕자의 난이다(13).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할 수밖에 없다. 여호사밧 왕의 맏아들 여호람 왕은 아버지의 유언적인 유산분배의 유지(遺旨 죽은 사람이 생전에 가진 생각)를 송두리째 꺾어버린 불효막심한 패륜아로 변질된 이유는 뭘까요? 아내의 충동질이다(22:3. 그래서 ‘베갯머리 송사’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 잠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여러 말로 남편의 마음을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이르는 말).

어느 산골에 새들이 모여 사는데 그 곳 새들은 먹이를 잡으면 마을 복판에 모여 다 같이 나눠먹고 살았단다. 어느 날 펠리컨이 사냥을 나갔다가 숭어 한 마리를 횡재하였다. 펠리컨은 숭어를 물고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힘들게 숭어를 잡아오는데 아무도 주지 말고 나 혼자 먹어야지. 그런데 어디에 이 숭어를 숨기지?” 펠리컨은 혼자 골몰하다가 결국 자신의 입 속에 감추기로 했다. 펠리컨은 몰래 숨어서 숭어를 맛있게 먹다가 남은 숭어를 입속에 감췄다. 그래서 친구 새들이 말을 걸어도 대답을 못해 피했다. 결국 혼자 숭어를 독식한 펠리컨은 먹을 것만 생기면 입속에 감추는 바람에 친구들은 떠났고 턱만 길게 늘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은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사람들이 어렵지만 다 함께 살아가면 서로 돕고 친구로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하고 여유를 누리게 되면 친구들과 경쟁한다. 탐심을 채우느라고 친구 새들을 잃은 외톨이 펠리컨 신세가 된 여호람은 8년짜리 외톨이 왕으로 끝났다. 명심하자. 아멘.

2) 세력(4-6)

여호람은 왕위를 유산의 선물로 받은 후에 왕권강화를 달성하자 곧바로 왕자들을 정적으로 몰아 피바다를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욕심이 자라 불안을 새끼 쳤음을 입증해준다. 아우들과 방백들이 다 자기자리를 노리는 적군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헤롯 왕도 아기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 위하여 두 살까지 애들을 몽땅 살해했고, 세조도 조카 단종을 따르는 신하들을 사육신, 생육신으로 몰아 참형시키는 미친 짓을 단행하였다. 그래서 돈 탐욕은 형제라도 재판을 하고,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칼부림을 하는 것을 우리가 수없이 목격해 왔다.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1902.6.11)는 드류신학교를 졸업했을 때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가 조선선교를 결정하자 1885년 4월 2일 신혼부부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와서 전도하면서 배재학당을 세우고 신약성경을 번역하여 배포했단다. 44살 때(1902) 목포에서 성경변역자협의회가 열렸는데 참석하려고 배로 가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사고로 일생을 마쳤단다. 당시 생존자들이 증언하기를 아펜젤러는 충분히 구조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화학당 재학생 2명을 구하느라고 배에서 탈출을 마다하고 끝까지 침몰하는 배에 남았다는 것이다. 아펜젤러의 나이가 44세이었다면 육체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수많은 사명을 남겨둔 인생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자.”라고 가르쳤고, 일생의 최후순간에 그 가르침을 손수 섬김으로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설명은 잘하나 삶을 다르게 살아가는 신앙인보다 설명과 삶을 일치시키는 신앙인을 따라 해보자는 것이다. 아멘.

3) 믿음변질(10)

‘여호와를 버렸음이라’(עזב 아잡 to leave, set free or loose, give up, forsake. ‘조상들’ אבתיו 아보타이우 his fathers. 오히려 아버지와 할아버지 쪽임). 기문지학(記問之學 不足以爲人師 암기만 잘하는 학문은 많아도 스승이기에는 부족하다<禮記>)을 조심해야 한다(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마음의 중심을 꿰뚫는 설교로 유명했던 윌버 채프만 목사님이 처음 개척시절 엄청난 고생을 계속 했단다. 미국의 중부지역 한 시골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여 사례비도 받다말다 하는 실정인데, 먼 서부에 살던 어머님이 갑자기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당장 가봐야 하는 처지이었지만 항공료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좌불안석하던 목사님을 교회에서 은행을 다니던 집사님이 어떻게 그 사정을 알고 찾아와서 백지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목사님은 백지수표를 처음 봐서 그게 수표인 줄 모르고 멍하니 천정만 쳐다보셨다. 그때 집사님이 눈치를 채고 설명했다. “목사님, 여기 비어있는 공란에 여행경비를 필요한 만큼 적으시면 됩니다. 제가 이미 서명을 해놓았기 때문에 얼마를 쓰던 은행이 돈을 지불할 겁니다.”

그래서 채프만 목사님은 넉넉하게 어머님을 찾아 뵐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를 실감나게 간증하더란다. 우리의 모든 기도에 하나님은 초환경으로 응답하실 수 있다. 믿음으로 주님께 아뢰는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한다면 베드로의 그물처럼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정답이 있고 그 해답은 결국 복되고 형통한 방법으로 입증된다. 여호람 왕이 여기까지 깨닫지 못해 ‘여호와를 버렸음’(בזע 아잡)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늘 생각나길 축복한다.

자 이제 오늘설교가 가리키는 당구장 표시를 확인하자. 여호사밧 왕의 유산분배 실패. 며느리! 탐욕! 믿음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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