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5일 설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대하 20:31-37 ‘승리하는 믿음생활’) 18.11.25.
여러분은 ‘때문에’라는 말과 ‘덕분에’라는 말의 차이를 알고 잘 계시겠지요?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샤모니’라는 마을이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단다. 샤모니 마을은 프랑스의 론알프 지방에 있는데 알프스 몽블랑 산 아래 해발 4,000m의 산기슭에 자리 잡고 인구 만여 명이 살고 있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란다. 정식 명칭은 샤모니 몽 블랑(Chamonix-Mont-Blanc)이다. 그런데 샤모니 마을은 1900년이 되어도 왕래하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는 외딴 산간 마을이었는데, 그 이유는 산비탈과 척박한 토지, 그것도 눈으로 덮여있는 긴 겨울 때문에 주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샤모니 마을에 갑자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1924년 그 곳에서 동계올림픽이 최초로 열렸고, 1960년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이 곳에서 열리더니, 1965년에는 이탈리아의 꾸르마예르와 연결되는 몽블랑 터널이 완공되었다. 그러면서 스키어들과 관광객들이 샤모니 마을로 몰려들게 되어 유명한 관광지로 돌변하였다. 한 때는 눈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행군이었던 산골 마을이 지금은 눈 ‘덕분에’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해 살판났다는 것이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것 때문에’가 ‘누구 덕분에’ ‘무엇 덕분에’ ‘이것 덕분에’로 바꿀 수 있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 아닌가? 악조건을 핑계로 탓만 하고 손을 놓고 불평에 빠져있을 게 아니라 핑계를 개혁할 아이디어를 찾고 활용해서 처지를 바꾸는 인생으로 살아갈 때 ‘긍정적’이요 ‘소망적’이며 신앙적인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일생을 살아오면서 좋은 것을 많이 놓치고 겨우 합격선을 넘어선 모습을 상당히 안타까워하는 나머지 필히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34). 지금 우리가 함께 읽어본 말씀은 여호사밧 왕의 인생살이는 세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세 책은 선지자 예후의 글과 이스라엘 역사책 왕조실록과 그리고 성경이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것은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라고 기록해 놓았단다.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5-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6)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옛날 제가 어렸을 때는 한 겨울이 되면 참으로 행복해졌다. 설날을 기다기는 재미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날을 기다리다 2-3주 전이 되면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보람이 톡톡하게 나타난다. 어머님께서 사 주신 설날에 입을 새 옷을 날마다 매만질 수 있고, 또 설날 아침에 받을 세뱃돈과 별미음식들을 예상하며 기다리는 즐거움은 청량제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누가복음 2장에 후반부에 안나라는 여선지자의 인생이 기록되어있는데 그녀는 결혼하여 남편과 7년을 살고 사별했다. 그러고 84년 동안 수절하며 살면서 성전에서 금식기도 하다가 마침 결례를 하려고 성전에 온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께 감격에 겨운 감사를 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하였다고 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도 믿음으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하며 기도하다가 성령님께 ‘구세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감동을 받았는데, 마침내 결례예식을 하려고 성전에 온 아기 예수님을 시므온이 품에 안고서 감동감격으로 이렇게 찬송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 말은 “이제는 이 민족의 앞날에 대하여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하셨으니 이제는 제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뜻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님 폴리캅이 불에 타 죽게 되어 이렇게 유혹을 당했다. “로마황제도 신이라는 말 한마디만 하라. 그러고 죽음을 모면한 다음 회개하면 하나님이 너의 입장을 참작하지 않으시겠느냐?” 그때, 폴리캅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의연하게 죽음의 길을 택하겠다.” 그러고 그는 초연한 모습으로 불에 타 죽어갔단다. 그런 용기와 기다림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은 성경의 본보기를 보면서 챙긴 언약들이었다. 그렇지만 교인들마다 안나 선지자나 시므온, 폴리캅처럼 기다림과 용기 넘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 삶을 안나처럼, 시므온처럼, 폴리캅처럼 하려면 무엇을 착안하면 되는가? 오늘 설교본문에 답이 있다. 저와 함께 찾아보고 챙기자.
1) 산당(33)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말씀은 바로 앞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와 함께 읽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앞절 말씀은 조금도 잘못이 없는 온전한 평가라는 사실을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씀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렇다면 합격인데 산당철거가 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17:6절에 보면 여호사밧 왕은 산당철거를 했다고 밝혀놓았다. 그러면 어느 말씀이 옳은가?
정답은 ‘여전히 마음을 정하여’(ועוד העם לא םבבל הכינו לבבם לאלהי 웨아오드 하암 로헤키누 러밤 레랄로헤 for God/ for heart/ set up/ not/ yet. ‘The people still not set their hearts on the God’ -NIV- ‘The people still did not turn wholeheartedly to the worship of the God’-GN- 산당철거를 했는데 겉모양은 분명하였고, 사실이었다. 하지만 속내용은 여전히, 아직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게 문제였다는 것임!)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보셨나?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23:27-28).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21:5- 6)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눅19:45-47).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 너뿐인가 하노라.” 약관 16세에 문과 급제한 이직(李稷 1362-1441)의 시조다. 고려 말의 신하로써 조선개국에 공을 세우자, 그를 변절자라고 비판해 대서 자신의 입장과 당위성을 밝힌 시이다. 저와 여러분도 그리스도인답게 정직하고 당당한 신앙의 좁은 생명 길로 가길 축복한다. 아멘.
2) 교제(37)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חבר 하발 join, to be bound, charm. 그냥 얼굴 정도 기억하고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묶여 있는 관계를 가리킴). 그런데 아하시야는 어떤 사람이고 왜 연합했는가?(‘아합의 아들’<왕상 22:40>, ‘선박을 제조하여 오빌의 금을 구하러’ ‘파선하였으므로’<48>). 여호사밧 왕은 아합 왕과 결혼동맹을 맺고 연합전쟁에 참전했다가 구사일생하여 귀국하다가 선견자 예후에게 수모를 당하면서 지적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국책사업으로 신앙개혁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또 아합 왕의 아들과 묶인 것이다. 사탄의 유혹작전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링컨 대통령이 젊은 변호사 시절에 어느 형사사건에서 피고측 변호를 맡았는데, 원고측 변호사가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기에 충분할만큼 논리정연하게 변론하더란다. 링컨이 생각해봐도 승산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변론내용은 사건의 실체와 달랐다. 최후 변론에 나선 링컨은 배심원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단다. “원고측이 주장을 빈틈없이 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런 얘기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아빠, 누나하고 일꾼이 마구간에 같이 있었는데요. 누나는 옷을 걷어 올리고 있었고요, 일꾼은 바지를 내리고 있었어요. 아마 건풀에다 오줌을 싸려고 했나 봐요.” 그러자 아버지가 “너는 현장을 사실대로 봤지만 결론을 잘못 내렸다.”라고 지적해 주었답니다. 판사는 링컨의 변호를 받아들여 피고를 무죄로 판결했다는 것이다.
똑같은 사실이라도 분석하고 이해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엉뚱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호사밧 왕도 쓰는 안경이 자꾸 바뀌니까 판단도 뒤집어지곤 했던 것이다. 명심하길 바란다. 아멘.
3) 나중에(35)
오늘 설교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말씀은 ‘나중에’이다. ‘나중에’라는 말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after, afterward, in the future인데, 본문 말씀은 여러 상황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런 이치를 설명하셨는데 씨 뿌리는 비유로 ‘길 가’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라 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말씀을 듣고 기쁨하며 받되 즉시 잊어버린 사람, 환난이나 박해를 당하면 중단하는 교인,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교인, 이 세 경우를 다 이겨내고 끝까지 순종하는 성도가 있다는 것인데, 여호사밧 왕은 금에 걸려 넘어졌으니 가시밭 교인이었다.
과거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입시 면접시험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유적지나 유물을 말해 보라”고 면접관이 물었더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적지에 가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단다. 남대문도 가보지 못했느냐고 하니까 학생들은 가보긴 하였지만 관심 있게 관찰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국보1호가 뭣이냐니까 남대문이라고 대답했단다. 남대문에 가 조사해 볼 여유도 없을 만큼 수험공부에 매달린 학생들은 우수한 입시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비록 국보1호에 가보지 못해도 합격한다. 국보1호에도 무관심하지만 암기성적이 우수함은 국사학을 공부할 자질이 병약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도 주 관심이 첫 단추를 결정하게 된다. 여호사밧의 변덕이 늘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의 뼈대를 간추리자. 여호사밧 왕의 합격과 그 아쉬움이다. 속 중심, 교제대상, 꺾임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