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8일 설교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 (대하 19:1-3 ‘믿음의 충고’) 18.10.28.
어느 수학교수님이 수업을 시작하면서 먼저 칠판에 ‘2, 4, 8’이라고 쓴 다음 학생들에게 물었단다. “이 세 숫자들을 써놓았는데 그 답을 알겠는가?” 여러 학생들이 손을 들고 대답하기를, “14입니다. 세 숫자를 모두 더한 값입니다.” “세 숫자를 곱하면 64가 정답입니다.” “제가 보기엔 수열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올 수는 16입니다.” 이제 학생들이 잠잠해지자 교수님이 설명하였다. “모두가 답만 찾으려고 몰두했는데, 자네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네. 도대체 무엇을 묻느냐고 물어본 사람이 어째서 한 명도 없을까? 문제를 모르는데 어떻게 정답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올바른 답을 찾으려면 먼저 올바른 질문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부신 성공작, 자수성가로 성취한 부귀, 눈물겨운 인간승리, 모두가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자랑감들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것들이 왜 필요한지이다. 지금 무엇을 위한 노력이며,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 대답을 갖추는 게 필수라는 것이다.
성경을 순진하게 읽는 사람들이 있다. 제가 순진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현장을 보지 않고 성경글자만 읽는 것을 말한다. 성경저자들이 남겨둔 묵상부분들을 생략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냥 그대로 읽는다? 사실 창파로 노 젓기는 포기한 셈이다! 특히 역대기 기록자는 대단한 문장가답게 남겨둔 부분이 많다. 설교본문은 ‘역설’(paradox)의 표현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 역설까지 읽어보지 않는다면 본문의 뜻은 반타작도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설교본문에 활용해 놓은 역설은 어디에 얼마나 담겨져 있는지 먼저 1절을 함께 읽어보자.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빼앗긴 길르앗 라못(왕상22:3)을 탈환하려고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이 연합군을 결성한 후에 출전했다. 아합 왕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지만 오히려 왕복은 여호사밧만 입었다. 그래서 아람의 장병들이 여호사밧을 총공격하였다. 여호사밧 왕이 비명을 질러댈 때 하나님께서 적군을 감동시켜 여호사밧을 구사일생(九死一生)하게 하였다.
일꾼이 직책을 만드는가? 아니면 직책이 일꾼을 만드는가? 개척교회를 하다보면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은 없고... 할 수 없이 많이 부족해 보여도 그 교인에게 일을 맡기게 된다. 그런데 그 교인이 직분을 아예 망쳐놓는다. 여호사밧 왕이 전투현장에서 졸장부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생각해 보자. 전투장은 단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곳이다. 전쟁놀이가 아니다. 출전하면서 아합 왕은 왕복을 벗고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었다면 명목상 최고지휘관은 여호사밧 왕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게 아합 왕의 전술이었지만... 그런데 그 전투장에서 여호사밧은 어떤 장수였던가? 적병들이 총공격하자 비명만 질러댄 무능한 장수였다. 그 전투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날의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왕이 병거에서 겨우 지탱하며 저녁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었더라.’(18:34)
그 처참한 전투장에서 여호사밧 왕이 예루살렘으로 귀국하는 모습을 ‘평안히’라고 설교본문 1절에 기록해 놓았으니 역설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전투장에서 여호사밧은 병사들을 격려하며 승전을 위하여 맹장으로 통솔했던가? 길르앗 라못 탈환작전은 여지없이 참패로 끝났다. 전투장은 병사들의 숱한 시신으로 난장판이었다. 전사한 자국병사들을 몽땅 방치하고 도망친 소인배 여호사밧 왕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귀국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본문은 그 누구도 환영하러 나가지 않았음을 역설로 표현하길 ‘평안히’라고 1절에 기록해 놓았다. 여호사밧 왕은 굴욕적인 장수로 귀국하였음을 성경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이다.
‘평안히’(בשׁלומ 버샬롬 in peace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안전, 평화, 번영, 질서... ‘평안히’는아합 왕과 결혼동맹이나 아합 왕과 연합군 출전은 어색하고 억지였다는 것임. 오히려 부끄러움을 깨달을 만큼 여호사밧 왕은 충분히 다 보고 듣고 확인되었기 때문임!<18:1-2, 21, 27>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 29:1).
1984년 부산 월내교회의 김도범 목사님이 운전실수로 사람을 치어서 몇 달간 구치소에 있었는데,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조금씩 적응해가다 감방장이 되었단다. 그는 “나는 목사입니다. 우리 감방은 서열 같은 거 없습니다. 나부터 똥통 옆에서 잡니다.”라고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함께 예배드리고 다 예수님을 믿게 되어, 감옥의 부조리도 없애고 서로 섬기면서 천국감방으로 변화시켜 모범구치소로 소문냈단다.
김도범 목사는 1992년도 60세에 교회를 사임하고 선교사로 자원하여 고신총회 선교부에 신청했더니 많은 나이 탓으로 허락받지 못하다가 부산 사상교회 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키르키즈 선교사로 나가서 지금까지 85세가 넘도록 선교를 하고 있단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서 말 가루를 부풀게 하는 참된 예수님의 누룩이 분명하다. 저와 여러분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하지만 여호사밧 왕은 그러지 못했다. 사실은 여호사밧 왕처럼 믿음생활을 하는 교인이 많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선견자 예후를 보내서 따끔하게 지적해 주었다.
자 그러면 예후의 채찍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챙기자.
1) 옳으니까(2)
‘옳으니까’; 이 말씀은 요즈음 여호사밧 왕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다운 모습인가라는 반어법 질문인데, 히브리어성경에는 없는 말이다(הלרשׁע לעזר ולשׂנא יהוה תאהב ובזר ‘사악한 자를 돕는 것과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 이것에 의하여’ ‘Should you help the wicked and love those who hate the Lord? Therefore’ -NKJV- ‘Should you help the wicked and love those who hate the Lord? Because of this,’ -NIV-).
영국이 17,18세기에 노예무역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죄를 지었다. 당시에 아프리카에서 붙잡아 온 흑인들을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 1/4이 넘게 사망했다. 하지만 노예산업의 수입은 영국국가재정의 1/3이 되어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부상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21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주장하자 주위의 비웃음 속에 7년 후에야 법안을 상정하였는데, 노예무역금지법은 결국 11번 부결당하고 12번 만에 1807년 의회에서 통과됐다. 20년 동안 투쟁한 결과였다. 윌버포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국 내의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노예제도 완전폐지 운동을 벌여나갔다. 그리고 1833년 7월 26일, 노예해방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윌버포스는 이 소식을 들은 지 사흘 후에 눈을 감았단다. 영국은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선물을 한 윌버포스의 공로를 높이 기리며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했단다. 삶을 만드는 신앙관은 이렇게 중요하다. 아멘.
2) 나가서(2)
‘나가서’( יצא 야차아 to go out, to produce, lead, spring up<plant, water. 生>, 비난이 아니라 지적과 경고, 책망으로 깨우치고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는 것임!. 형식은 ‘치는 설교’같지만 목적은 회개임).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환궁 길에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 앞에 나타나 엄중히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 또 이게 역설이었다. 왜 그런가? 여호사밧이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야 할 여호사밧 왕이 선지자에게서 심판을 들었다. 우리도 성경을 읽고 쓰고 외우면서도 그 성경내용을 범하고 책망을 듣게 될 때가 있잖아요. 아멘 할렐루야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어느새 세상을 닮아버린 교인들... 그래서 불신자들이 교회를 비웃고 있다.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를 세상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선견자 예후에게 책망을 들었던 여호사밧 왕을 곱씹어 보자는 것이다. 그게 오늘의 한국교회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우리끼리 귓속말로 말해보자. 표절논문, 표절박사, 표절설교까지..... 과연 학자 겸 제사장의 냄새를 풍기는 교회는 어디에 숨어 있나요? 우리 자화상을 시인하고 용감하게 회개하고 옛 1907년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1867년 아직 식인습관이 사라지지 않던 피지에서 베이커 선교사는 순교했단다. 그때 피지인들은 신체의 일부만 가린 나체생활, 불분명한 가족개념, 일부다처, 빈번한 종족 간 싸움..... 피지인들은 베이커 선교사와 그를 따르던 피지인 8명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그 시신을 나눠먹었는데, 그러고 그 마을에 136년 동안 질병과 환란, 재난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마을 사람들은 베이커 선교사의 살육식인사건이 가져온 저주라는 생각 끝에 그 일을 사과하는 의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 날이 바로 2003년 11월 13일이었다. 베이커 선교사의 후손 10여 명을 포함한 600명의 원주민들이 모여서 화해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화해예배를 드리고 나자 풀이 자라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병도 사라졌단다. 151년 지난 지금, 피지의 그 마을은 전도율 80% 이상이란다. 아멘.
3) 선한 일(3)
‘선한 일’(דברים טובים 다발림 토빔 ‘good things are found in you’ -NKJV- = 아세라 목상을 없애고 하나님을 찾음. ‘which people worshiped and you have tried to follow God’s will.’ -GN-). 선견자 예후가 3절에서 ‘그러나’로 전해준 말은 역설을 넘어 대반전의 극치이었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다는 믿음생활의 그 ‘어떻게’라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 소 열 마리를 물가로 끌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열 사람이 소 한 마리에게 물을 먹일 수 없는 법이다. 명심하고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는 미국의 ‘그리피스 조이너’였다. 1988년 미국에서 기록한 100m(10.49초) 세계기록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기록한 200m(21.34초) 세계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서울올림픽에서 100m, 200m, 400m계주에서 금메달을 당당하게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가 취재경쟁을 벌였다. 그 가운데 미국 NBC방송의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으로써 내 자신과 싸움에서 이긴 후 그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헌신과 순종, 충성이 선한 일이다. 아멘.
자 이제 우리 다 같이 오늘 설교에 대한 명품 반응을 삶으로 하기 위해 진솔하게 결단해 보자. 오늘 설교는 선견자 예후가 빗나간 여호사밧 왕을 깨우친 장면이었다. ‘옳으니까?’로, ‘자각하게!’로, ‘선한 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