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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1일 설교

“정말 우연일까요?” (대하 18:28-34 ‘거짓의 한계’) 18.10.21.

출애굽기 12장 4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만에 애굽 종살이를 마감하고 해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는데 무려 40년이나 황무지와 사막 길을 행진한 후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그 40년을 행진하는 동안 농사도, 병원도, 약국도 없이 양떼를 몰고 다녔다. 그런다고 백성 중에 병자가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렇다면 4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또 신명기 8장 4절에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런 말씀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출애굽 한 백성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시며 돌보셨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간섭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성경전문용어로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은 출애굽 때만 아니라 창조이후로 지금까지도 역시 인도, 간섭,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밝혀주고 있다.

마태복음 9장 35절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의 3대 사역(교육과 전도, 치유)을 밝히 보여주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의 이런 3대 사역은 12제자들에게 계승되었음이 초기교회 때 대단한 권능으로 입증되었다.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말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 예수님의 교회가, 그 당시에 세계의 변방이었던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로마제국을 부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2가지 힘을 가진 누룩 때문이었는데, 첫째 초기교회 교인들의 높은 도덕성이요, 둘째는 병든 자와 약한 자들을 치유회복 시키는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바로 그 도덕성과 치유의 능력이 현대교회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되어 있고 똑같이 필요한데,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나 상실해 가고 있어서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 교회만이라도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아보고 깊이 반성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작은 불씨로 쓰시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오늘 설교본문을 보물찾기 하듯이 세밀하게 살펴보자. 설교본문은 남쪽 유대 여호사밧 왕이 북쪽 이스라엘 아합 왕의 가문과 혼인동맹을 맺고, 그 후에 아합 왕의 전쟁에 참전하여 장수로 출전까지 하였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29). ‘둘이 전쟁터로 들어 가니라.’ 이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호사밧 왕을 공감하기 어렵지 않는가? 여호사밧 왕은 얼마 전에 여호와의 참 선지자 미가야가 예언을 전한 그 현장에 있었다(18-27; 23-24을 보면, 미가야는 거짓 어영선지자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아가면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날에 보리라’ = ‘네가 골방으로 들어가 숨는 바로 그날에, 너는 모든 것을 알리라’ -새 번역- 27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고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 ‘여기 있는 모든 백성들은, 내 말을 잘 기억하여 두시오.’ -새 번역-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틀림없이 성취된다고 확신만점 하였음!).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미가야의 확신만점을 여호사밧 왕이 전혀 반영하지 않고 출전하였다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점은 17:10과 모순이다(감점 신앙생활). 그렇다면 여호사밧 왕처럼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고 쓰는 교인들이, 지금도 의의로 흔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윤동주는 27살 인생으로 짧게 마감하였다. 그런데 그의 시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대한민족이 쓰라린 고난을 당하고 피눈물을 흘리자, 그것을 그는 한 자 한 자에 알차게 담아 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에서 소재를 얻어 쓴 시도 몇 편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팔복(八福)-마태福音 5:13-22’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永遠)히 슬플 것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한 다음에 ‘저희가 永遠(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마무리 지었다. 1940년 12월에 쓴 시라고 한다. 조선에서 일제의 폭압과 강탈이 극심했던 그때였다. 그 어떤 기대도 말하기 힘들었던 절망 앞에서 시인은 ‘애통하는 자는 위로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산상보훈도 감히 밀쳐내며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라고 절규한 것이다. 그러고 이 절망의 고뇌에서 윤동주 시인은 5개월 후에 쓴 ‘십자가’라는 시 끝부분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 ․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3·1독립만세의 주역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1600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 교인은 20만 명(1.3%도 안 됨)이었다. 하지만 이 적은 교인 중에 참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해냈다. 그래서 교회가 독립운동의 혈맥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자 그러면 여호사밧 왕을 다시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이 빛과 소금으로 믿음생활을 하게 하는 그 가르침을 함께 찾아보자.

1) 변장(29)

전쟁터로 나가면서 아합 왕은 변장을 하고 여호사밧 왕은 왕복을 입고 출전하자는데, 여호사밧은 합의하고 그대로 출전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이 왕인데 이토록 바보짓 제안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또 뭐였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성경은 일체 그 이유를 기록해 놓지 않았다. 다만 왕상 20:1, 16, 21. 26, 29-30, 22:3, 29-30을 종합해 보면 3번째 전쟁임으로 변장은 잘 드러난 얼굴을 좀 숨기자는 전술이었을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렇더라도 전투장에서 왕복착용은 탄알받이나 다름없는 전술이었다. 사돈은 차마 거절하기 어려운 법이다!

영국정부가 중국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골든 장군을 포상하기 위하여 많은 상금과 직위를 주려고 하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다 거절하고 33회 교전이 기록된 금메달 만 받았단다. 금메달이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하였겠지요, 그의 전투승전보를 기록한 것이니 그의 인생축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분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메달을 찾았으나 없었다. 나중에 밝혀졌는데 심한 흉년 때 멘체스타로 보내 녹여 금으로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사주도록 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메달을 보낸 날짜에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써 놓았더란다. “이 지상에서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마지막 보물을 오늘 주 예수님께 바쳤다.” 가장 값진 것, 가장 값진 부분, 가장 값진 시간을, 가장 귀한 분에게 바치는 것, 그게 아름다운 헌신이다.

여호사밧 왕은 거절부터 걸려들어서 값진 헌신을 하지도 못했다. 거절을 잘하게 되길 축복한다. 아멘.

2) 소리 지름(31)

여호사밧 왕은 혼자 왕복을 입었으니, 전투장에서 적군에게 집중공격을 받아 바로 독안에 든 쥐 신세였다. 이제 전사당하는 일은 뻔했다. 그럴 때 여호사밧 왕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זעק 자악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cry out. 울부짖어 요구하다. 아벨이 형 가인에게 맞아 죽고 그 피가 ‘호소’했던 것, 에서가 동생에게 축복권을 빼앗겼을 때 ‘소리 질러 슬피 우는’ 것, 다말이 이복 오빠 암논에게 처녀성을 빼앗기고 ‘크게 울부짖는’ 것...).

기도응답은 말을 많이, 유창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6-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την αναιδειαν αυτου 텐 아나이데이안 his(the) importunity ὅσων χρηζει 호손 크레제이 as many as he need. want가 아님).

은퇴한 선교사 부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단다. “아버님 어머님, 제가 이번에 잡지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또 가능하면 돈을 좀 많이 보내주세요.” 선교사 부부는 아들에게 사업밑천을 보내줄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틈틈이 저금해둔 600달러를 아들이 요긴하게 쓸 줄 믿고 보내주었다. 그러고 그날부터 사랑하는 아들의 사업을 위하여 하나 더 투자했다. 그것은 기도였다.

아들은 부모님께서 보내준 600달러는 다른 어떤 사람의 600만 달러보다도 귀중하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믿어준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잡지사에 최선을 다하였다. 결국 아들의 사업은 세계적인 잡지사로 성장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헨리 루스(Henry Robinson Luce, 1898.4.3.~1967.2.28). 세계 정상의 잡지인 타임(TIME)지의 창업자이다. 기도하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삶의 응원단장을 모시고 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자녀를 위한 부모의 기도만큼은 어지간해서는 외면하지 않으신다. 필요를 구하기 때문이다.

3) 무심코(32)

‘무심코’는 전투 중에 화살로 아합 왕을 맞혔을 때, 그 병사의 모습을 말하는데, ‘마구 쏘아대던’(공동번역) ‘어떤 사병이 되는 대로 쏜 화살 하나가 이스라엘 왕의 갑옷 흉갑과 비늘조각들이 이어진 사이를 꿰뚫고 들어가 꽂혔다.’(현대어 胸甲. ‘무심코’로 보이지만 심오하게 기획된 일었다는 것!). =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삼상 17:49.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학교 앞에서 도시락가방을 파는 아저씨가 겉은 멀쩡해도 불량품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학생들에게 팔았단다. 하루는 아들의 생일이라 아저씨는 일찍 집으로 돌아왔는데, 생일축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받은 생일선물 중에 바로 자기가 팔았던 도시락가방의 불량품이 있더란다.

자기 아들에게 줄 선물을 알았다면 그 아저씨가 불량품 가방을 팔았을까? 욕심이 거짓을 하게 하고, 알고 보면 그 독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다윗 왕이 축복 누린 한 비결!).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 할 교훈을 확인하자. 거짓은 속셈 때문에 행해지지만, 하나님은 필경 망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빼내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거짓과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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