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7일 설교
“사백이냐? 하나냐?”(대하 18 : 1 - 11 ‘참과 거짓’) 18.10.7.
왕명따우는 1900년, 중국이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던 해에 태어나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교육도 받으면서 자랐는데, ‘중국의 링컨’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 되는 꿈을 꾸었지 목사는 생각지도 않았단다. 그 이유는 목사는 월급도 적고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18살 때 알 수 없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자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제 일생을 바쳐 주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왕명따우는 몰라보게 건강을 되찾고, 결국 그는 신학을 하고 북경에서 몇 사람을 모아 성경공부 위주로 하는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단다.
1949년 왕밍따우 목사님은 공산당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견딜 수 없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릅니다’라고 부인하고 석방됐는데, 그는 주님을 배신한 양심에 두통으로 시달리게 되었고, 약을 먹어도 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기도를 하면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옥에 갇혀서 핍박으로 고난 중인데,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 고난을 피한 후에 태연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현실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서 기도 중에 중대한 결심을 하고, 목에 간판을 걸고 북경 정부청사 앞으로 가서 “제 이름은 배신자 베드로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라고 눈물로 외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니자, 그는 다시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래서 그는 19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험한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는 재소자들을 전도하며 세례도 주었단다.
왕명따우 목사님은 80살에 석방되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 감옥에서 죽을 것 같아 석방시켰단다. 감옥에서 나오던 날, 라비 재커라이스(Ravi Zacharias)라는 인도 선교사님이 찾아와 물었다. “어떻게 그 지독한 감옥생활을 이겨냈습니까?” 그러자 그는 늙은 몸이었지만 빛나는 눈동자로 먼저 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하고 찬송을 불렀는데,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이 찬송을 끝까지 부르고 나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저는 감옥에서 이 찬송을 잊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저에게 임했기에 19년 동안 감옥생활은 저에게 작은 천국 같았답니다.”
왕명따우 목사님은 7월 28일 오전 9시 상해의 자택에서, 91세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결국 그는 모택동 시절에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로 불렸단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믿음색깔을 의롭게 지속해 간다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어려운지 잘 보여준 간증이었다.
오늘 설교본문에도 유대 왕 여호사밧이 믿음색깔을 잘 이어가며 축복을 누리다가 불신자의 골수 아합 왕을 만나 삶을 섞더니 그만 망쳐버리게 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선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1)라는 이 말씀은 17장의 세 절을 한 문장으로 종합하여 표현해 놓은 축복을 가리킨다(‘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3>,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17:5>, ‘여호와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17:10>. 또 설교본문 ‘당신과 싸우리라’(3)는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의 전투에 연합군으로 지원해 주겠다는 승낙이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함이었다(19:2, 22:3-4 = 21:1, 22:1. 왕하 8:16-18).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축복을 한참 누리다가 그 축복을 보류, 연기, 중단, 심지어 취소당하는 길로 빗나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을 분명하게 인도하고 계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의 손길을 따르기는커녕, 아예 하나님을 망각하고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으냐는 것이다. 출 12: 26-27을 보면,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신 6:20-24을 보면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믿음의 눈(신앙관)이 틀려지면 그 사람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져 기이한 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으로 배우고 신앙관을 맞추는 게 급선무이다. 그렇게 되면 위기와 고난, 실패 중에도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다리며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아멘.
자 그러면 여호사밧이 실수한 안타까움을 다시 살펴보면서 오늘날 저와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저울을 마련하자.
1) 많이(2)
‘양과 소를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였더라’ 이 말씀은 아합 왕이 ‘많이 잡고’를 하였던 것은 ‘권하였더라’ 때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물량공세로 ‘꼬시는 것’이다. 5절에도 선지자를 400명이나 불러 모았다고 하였다. 마음보다 육신에 맞추고, 진실보다 눈에 잘 보이는 외모나 물량으로 속이는 사람이 아합 왕이었다. 한 마디로 아합은 육에 속하고 세속적이며 속임수에 익숙하다.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식 때 성경에 손을 얹고 헌법을 준수한다고 서약을 한다. 그런데 미국헌법에는 ‘Swear or Affirm’(맹세한다 또는 선언한다)로 되어있단다. 곧 맹세 대신 선언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기독교 가운데 맹세를 거부하는 종파들이 있는데 그 종파에서 대통령이 나올 것에 대비한 것이다. 마태복음 ‘산상의 보훈’에 있는 말씀 때문에 맹세를 거부한다고 한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인간이 맹세를 악용할 수 있다. 그래서 아예 하나님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못 박아 놓은 가르침이다.
‘옷 로비 사건’이 있었다. 1999년, 당시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 씨가 남편을 구명하려고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에게 고가의 옷을 뇌물로 준 일이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회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청문회 때 연정희(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아내) 씨와 배정숙(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아내) 씨의 증언은 정반대이었다. 두 당사자는 진실을 강조하려고 ‘하늘에 맹서하고’ ‘성경에 손을 얹고’라는 말을 자주하면서 기독교인이라 했다. 사실 그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거짓말로 짜깁기했고 이구동성으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게 그리스도인의 탈을 쓴 아합족들이지요. 아합 족은 충동질로 속임수를 쓴다. 명심하자. 아멘.
2) 미워하나이다(7)
‘미워하나이다’ 아합 왕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싫어하였음을 표현한 말씀이다. 아합 족들은 성경을 무시한다. 성경을 통하여 밝혀지는 하나님의 법칙과 언약성취에 관심도 없고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좋은 것(טוב 톱 agreeable, rightly)만 원하고(언행 불일치), 긍적적인 칭찬만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합족을 쉽게 선별할 수 있고 믿음색깔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은 바닷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빛이 흐려지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위치를 판단하는 방법은 있다고 한다. 바로 물방울을 보는 것이다. 물방울은 항상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물방울을 보고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단다. 물방울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다. 아무리 앞뒤좌우가 캄캄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피고 따라가면 좁고 협착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게 된다. 성경은 그러한 것을 순종이요 충성이라고 한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순종에 익숙해지기를 축복한다. 아멘.
3) 혼인함(1)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관계를 맺었더라’(חתן 하탄 to marry, to contract affinity by marriage. 혼인이라는 방법으로 아주 밀접한 계약관계를 달성함! ‘and by marriage he allied himself with Ahab’ -NKJV- ‘and he allied himself with Ahab by marriage’ -NIV-).
그런데 친밀한 관계는 꼭 혼인밖에 없는 게 아니다. 계약문서로도 하고 무상원조로도 한다. 하지만 혼인은 유전인자(DNA)를 변질시키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기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 여호사밧 왕은 너무 경솔하게 결혼에 응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아합족은 여호사밧 왕에게처럼 무서운 독을 품고 접근해 와서 결국 천추의 한을 시작한다(28-29). 자주 생각나기를 축복한다.
부끄럽다는 말의 본래 뜻은 ‘붓 그리다’이고, 여기서 ‘붓’은 ‘얼굴’이라는 고어이니, 부끄럽다는 말은 ‘얼굴에 그린다’는 뜻이다. 부끄러운 사람은 얼굴색이 빨개지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얼굴에 철판을 깔아서 아무런 그림도 나타나지 않게 된다.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무리를 이루어서 집단으로 살았다. 그리하여 무리를 위해 봉사를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였단다. 왜냐면 자기만 위한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다 보면 그 집단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망조를 예방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이다. 끊임없이 서로 시기하고 속이고 미워하고 남을 짓밟아야 내가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 세상은 살아남기(survival)에 미쳐있는 욕심주의가 판을 친다. 그렇지만 희망을 걸게 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때이다. 부끄러움을 알아차리는 사람과 가까이 하세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은 돼지나 개새끼랑 똑같은 짐승이다. 짐승은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나에게 가리킨 나침반 바늘을 확인할 시간이 됐다. 오늘 설교는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축복을 잘 누리다가 그만 아합 왕과 혼인함으로 망조로 빠져들었음을 보게 하였다. 외모 물량공세에 속아서, 하나님의 법칙을 싫어하다가, 계약을 혼인으로 하다가.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 그러한 아합은 널려 있다. 특히 엿새 동안에, 우리의 일터에, 대인관계에... 여호사밧 왕처럼 되지 않기를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