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6일 설교

September 16, 2018

                                                  “돌아오는 자가 많게!” (대하 15:8-17 ‘아사 왕의 신앙개혁’) 18.9.9.

   사도 바울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이 사랑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물론 불신자들의 가정에도 사랑의 대헌장이 틀림없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사랑의 핵심은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해야지, 하는 실체가 없는데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성분이 종합개념이지요. 그 중에 무례함이 없다는 사랑의 성분은 진정 중요하다. 무례함은 성질이 거칠 뿐만 아니라 공손하지 않은 모습이다. 무례한 여자가 아내 되면 그 가정은 깊은 불신의 수렁으로 변하게 된다. 수렁을 묻어야 할 사람이 수렁을 파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무례히 행하지 않는 자가 되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 ① 나는 남의 단점을 빈정대거나 이웃에게 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 ② 내가 비록 화나는 일을 당해도 예의를 저버리지 않겠다. ③ 나는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④ 자녀들에게 중요한 가정교육이 예절교육임을 알고 기도하면서 실천하겠다. ⑤ 지위가 낮고 가난한 사람도 업신여기는 태도로 대하지 않겠다.

   자신의 만족을 이루려고 상대방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하고,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게 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영웅’은 될지언정, ‘신앙의 영웅’은 될 수 없다. 신앙의 영웅은 오히려 남을 위해 땀을 흘리고 피도 흘리는 일을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 어떤 일에 득과 실을 따진 후에 자기에게 득이 되는 쪽만 골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 9절 끝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란 말씀이 있다. 이 사실은 굉장한 칭찬이요 자랑이며 모범이다. 진정으로 얼마든지 부러워해도 지나치지 않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11:15에 그 답이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불신자들이 돌아오는 ‘삶으로 전도하기’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나라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이미 다양하게 보아왔다. 인쇄물 나눠주기, 구호 외치기, 예배당이나 목사님 자랑하기, 선물주기, 반 강제로 데려오기... 그런데 전도결실은 아주 빈약한 현실이다. 그 이유는 뭘까? 전도행위와 하나님의 자녀생활이 너무나 차이나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어물전에서 장사하던 사람이 그 복장 그대로 까페에 와서 함께 차를 마시는 꼴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이다. 좀 더 설명하면 전도하기 이전의 삶과, 전도하는 모습과, 전도된 후에, 신앙공동체로 살아가는 삶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 전도결실을 실패하게 하는 이유라는 것이고 이러한 실패는 결국 예배당의 빈자리(空席化)를 초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벌써 유럽이 그랬고, 지금 미국이 그러고 있으며, 한국이 뒤따르고 있는 셈이다.

   2010년3월26일 밤 9시22분께 백령도근처 해상에서 해군 1200톤급 천안함이 갑자기 침몰했지요.

그때 29일 김덕규라는 네티즌은 해군 공식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772함 수병은 귀환(歸還)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는데(772는 천안함의 고유 식별번호였음);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천안함 실종군인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라고 군사작전명령을 내리고 있어서 온 국민의 눈물샘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실종된 천안함 군사들의 이름을 다 부르면서 그들의 생환명령을 내림으로 간곡히 염원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는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 끝나기 전에 귀대하라.”라고 적어놓았다. 또 “대한민국을 보우하시는 하나님,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하소서. 우리 마흔 여섯 명의 대한의 아들들을 차가운 해저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 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으로 생환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옵소서.” 이 글을 본 네티즌들은 “한 글자 한 글자가 가슴을 후벼 파네요. 정말로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천번만번 그랬다. 하지만 천안함 수병들에게 대한민국이 내리는 마지막 명령은 영원히 사라지는 메아리 같았고 그래서 더욱 서글픈 피눈물만 흘리게 할 뿐이었다. 마찬가지이다. ‘삶으로 전도하기’에 빗나간 그리스도인의 삶도 천안함 사건처럼 서글퍼서 피눈물만 흘리게 될 그날이 오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라는 주인공 아사 왕은 참으로 박수 받을 일이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돌아와서, 아사 왕과 비교하여 보자. 아사 왕이 누린 축복 때문에 그렇다(‘사방에 평안’<15>,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19>를 우리의 것으로!).

   1) 없애고(8)

   아사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방해되는 물건들을 전국적으로 과감하게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였다고 했다(‘재건’ חדשׁ 하다쉬 renew, restore, recent. =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던 것임! 변질, 빗나감, 타락을 바로잡았던 것임. 쉽지 않음). 그렇지만 아사 왕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언에 맞춘 것! 오늘날 우리의 처리라면 성경말씀이나 설교를 따라 순종하는 모습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라고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교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불믿음”이라고 대답했단다. 하기야 ‘신앙’의 반대말이 ‘불신앙’이니 믿음의 반대말도 ‘불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믿음’이라는 말은 ‘불처럼 타오르는 믿음’이라는 선입감도 주기 때문에 오히려 더 충성하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짜로 ‘믿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우리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믿음의 반대말’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난외주기에 써 놓기를 ‘어떤 사본에 어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은 큰 광풍으로 죽게 되었다고 배 뒤편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에게 그때 하신 것이다. 그렇다. 믿음의 반대말은 ‘무서워서 떨면서 물러남’이다. 믿음이 있어야 할 마음에 무서움이 차지하고 있으면 덜덜 떨고, 물러난다.        참 믿음의 사람은 무서워서 떨고, 망설이고, 흔들리고, 물러서지 않는다. 자기 믿음의 크기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는 어떤 일에서 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얼마나 무서워하고, 망설이고, 결국 물러나는지 그 수준을 보면 된다. 믿음은 행함만큼 이다. 아멘.

    2) 모았으니(9)

    아사 왕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인데, 이들은 본래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에 해당한 일종의 ‘탈북 새터민들’이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인하고 중대한 결단을 실행해 낸 신앙인들이었다. 우리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믿음은 유혹과 환란, 핍박을 이겨내고 삶을 만드는 믿음이다. 말로는, 글로는, 설명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삶을 따로 하면 죽은 믿음으로 제쳐놓는다. 한 마디로 알고 신행일치(信行一致)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마하트마 간디 등 세계의 명사들이 쓴 친필편지 1000여 통이 들어있는 보물함이, 스위스의 한 세탁소에 있는 캐비닛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몇 년 전 발견되어서, 세계 수집가들이 관심을 집중시켰단다. 이 보물함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은 수집가 알빈 슈람인데 2005년에 죽었고, 그의 친척들이 최근에 그 편지들을 들고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편지들 중에 가장 비싼 값으로 팔린 것은 영국 시인 존 돈이 남편을 잃은 킹스밀 부인에게 1624년에 보낸 위로편지였다고 한다. 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더란다. “하나님의 집에는 맨션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모델이 없고 그 건물의 디자인형태도 모르는지라, 당신 남편의 어떤 물건을 갖고 가야 할지 의아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맞다. 우리는 사후에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 우리가 거할 곳을 준비해주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믿음으로 판단하고 삶으로 이어가는 게 가장 현명한 인생인 것을 다시 다짐해 두자. 아멘.

   3) 찾았으므로(15)

   ‘찾았으므로’(בקשׁ 바카쉬 to seek, to apply to him by acts of worship). 그런데 12절의 ‘찾다’(דרשׁ 다라쉬 to search for, visit, ask. = 하나님과 ‘만나고’ ‘묻고 확인함’이 이루어지는 게 ‘찾다’이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겉모양만 있지만 속 알맹이가 없다면 완전히 ‘다른 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보통 우리의 기도나 예배, 찬송, 헌금, 봉사, 전도, 엿새생활, 문화 등등으로 ‘찾음’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 깨닫고, 그것을 반영하여 예배하고 찬양하는 행위요 삶이 ‘찾았으므로’인 것이다.

    인도 뭄바이의 베르소바 해변은 모래사장에 유리병, 플라스틱, 버려진 옷가지, 각종 페기물 등등 비공식 쓰레기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프로즈 샤라는 청년이 2015년 이 곳 해변 아파트 근처로 이사를 오고 21개월 지나자 완전히 다른 해변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그 해변을 아프로즈 샤 혼자 청소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약 2.5km에 달하는 해변은 쓰레기 높이가 무려 약 168cm에 달했고 무게로는 530만kg이었다. 그는 공중화장실 52곳도 청소하였고, 코코넛나무를 50그루나 심어놓았다. 물론 이 결실은 혼자 한 일은 아니었다. 몇 개월 동안 혼자 꾸준히 청소하니까 지역회사의 직원, 학생, 연애인들 그래서 1,000여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동참하더란다. 유엔 환경계획(UNEP)은 인도인 최초로 해변정화작업을 통해 공동체조직까지 이뤄낸 그 공로를 치하해 지구환경상을 줬단다.

   시도해봤자 안될 거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방치하고 포기한 적은 없었나요? 엄두를 내지 못해 시작도 못한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시도하지 않으면 변화는 0%이다. 모든 기적은 도전이라는 첫발을 내딛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법이다. 아사 왕은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서 ‘찾았으므로’를 했다.

   자 이제 오늘설교가 가리키는 푯대에 우리 삶을 맞추자. 아사 왕이 누린 평안!(없앰, 신앙공동체, 하나님체험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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