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18년 8월 26일 설교

“형통하는 건축을!” (대하 14:1-7 ‘축복을 누리는 통치’) 18.8.26.

조선시대 호조(재무, 경제 담당 부처)의 관리들은 사대부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단다. 그만큼 부정부패가 묵인되었던 것이다. 김수팽(金壽彭)은 영조 때 사람인데, 막강한 호조의 관리가 되었지만,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나 영조에게 칭찬을 받았단다.

어느 날 낮에 김수팽이 서류결재를 받으려고 출근도 하지 않은 호조판서의 자택으로 찾아갔더니, 마침 판서는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더란다. 김수팽이 결재해 달라고 청하자 판서는 머리만 끄덕일 뿐 여전히 바둑을 둘 뿐이었다. 그러자 수팽은 섬돌로 뛰어올라가 한 손으로 바둑판을 쓸어버리고, 뜰로 내려와 무릎 꿇고 아뢰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죽을 죄입니다. 그렇지만 나랏일을 늦출 수는 없었습니다. 저를 파직시키시고 다른 관리를 시켜서 결재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단다. 호조판서가 쫓아와서 그를 붙들고 사과했단다.

김수팽은 동생들과 함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단다. 주택은 허름한 초가삼간이라서 어머니가 종종 흔들리는 서까래를 직접 고치곤 하였다. 여름 날, 김수팽의 어머니는 집 기둥을 고치느라고 땀을 흘리면서 기둥주변을 호미로 파고 있었는데, 기둥 밑에 항아리가 보이기에 파 보니까 엽전이 가득 차 있더란다. 그 순간 김수팽의 어머니는 욕심이 생겼다. 기와집, 비단옷, 고기반찬... 하지만 이 돈이면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주경야독하는 아들이 좋은 환경에서 하고 싶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단다. 잠시 후에 김수팽 어머니는 돈 항아리를 다시 땅에 묻어버렸다.

그러고 나중에 김수팽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갈 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돈 항아리 사연을 처음으로 설명하였단다. “그 돈을 가졌으면 몸은 편하게 살았을 거다. 하지만 횡재로 얻은 돈으로 편리한들 거기에 무슨 복락이 있었겠느냐? 나는 오히려 내 자식이 횡재나 바라고 그 횡재를 기뻐하는 게으름뱅이가 되는 게 더 무섭고 두려웠다. 그 돈에 손을 대지 않았기에 오늘 같이 좋은날이 온 것 같구나.” 김수팽은 어머니의 가치관을 마음판에 새겼고 그래서 청렴하고 충직한 청백리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주인공이지만, 행운은 다 만들어진 것을 그냥 얻으려 하기 때문에 자신은 항상 상대이고 손님이다. 김수팽의 출생이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그만큼 김수팽은 인물님이 아닌 호조의 하급벼슬아치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 관한 청백리 일화들이 여러 개로 전해지고 있더군요. 노력하지 않고 뇌물로 얻는 재물이나 권세를 무서워하고 땅에 파 묻어버릴 수 있는 양심을 심어주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훌륭한 가치관이다.

오늘 설교본문을 고요한 마음으로 읽고 있으면 우리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게 잘 보인다. 두 주 전에 예고하였으니까 읽어본 사람은 쉽게 공감할 테인데 2절을 보자.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다윗 왕의 4대손 아사 왕의 신앙중심임. טוב 톱 agreeable, to act rightly, what is good. ישׁר 야솰 direct straight, upright.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느냐? 일치하는 그것을 똑바르게 행할 수 있느냐? 할 수 있다면 몇%나? 방해를 얼마나 이겨내고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할 수 있느냐?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평가하시고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고 기적수준의 창조권능으로 도와주신다! 우리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하셨던 말씀 중에도 잘 나타나 있지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해석하였음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행 13:21-22).

뇌사환자의 각막을 하나만 구입하려 해도 1억 원이란다. 두 눈을 갈아 끼운다면 2억 원이 필요하겠지요, 신장을 바꾸는 데는 3천만 원, 심장은 5억 원, 간을 이식하려면 7천만 원, 팔다리를 의수와 의족으로 하려면 억대까지도 든단다. 갑작스런 사고로 앰블런스에 실려 갈 때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면 한 시간에 36만 원을 지불한단다. 자기 코로 숨 쉬면서 두 다리로 걸어 다닌다면 그 분은 하루에 860만 원씩 버는 셈이다.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은 약 51억 원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셈이란다.

요즘 자수 불나는 BMW 자동차보다 훨씬 비싸고 안전한 자가용을 가지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감사한 생활환경인가요? 그런데도 자주 불행하다고 비관하는 비장애인들이 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욕심으로 비교하기 때문이다. 욕심쟁이는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뻐하기 어렵다.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부분 불평하고 너무 쉽게 불행을 끌어안는다. 아사 왕의 중심은 선과 정의를 행하는 엔진을 마음에 갖췄기에 우리 하나님이 짝꿍(partner)으로 삼았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 삶을 들여다보자. 아사 왕처럼 선과 정의를 행하여 하나님이 사방의 평안을 주시는(7) 신앙 삶인지? 아사 왕의 선과 정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본문을 보면서 직접 확인해 보자.

1) 없애고(3)

아사 왕의 삶에서 선과 정의라고 우리 하나님이 집어 낸 것은 우상제거이었다. 우상제거를 우리 하나님께서 그토록 크게 평가하신 것은 출 20장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4-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1938년9월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 총대 188명이 모여 제27회 장로회 총회를 시작하였다. 다음날 10시50분 방청을 금지하고 이날 각 총대 곁에는 일본형사가 붙어 앉아있었고, 결국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신사참배는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박응률 목사가 찬성발언을 하고, 사회를 본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평양경찰서장의 각본대로 신사참배를 찬성하기로 가결해 버렸다.

일본경찰은 총대전원에게 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할 것, 그렇지 않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을 사전에 강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7년 후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는 원자폭탄이 터져 불바다가 됐고 또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져서 일본은 죽다 겨우 살아났다. 우상숭배는 최대 최악의 죄이다.

2) 찾게(4)

‘하나님을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아사 왕의 통치모습을 기록한 말씀이다. 철저한 신앙 삶, 믿음생활을 하는 나라로 만들어갔다는 것이다(‘찾게’ דרשׁ 다라쉬 to visit, ask, search for, acquire about any thing. promote).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설득하려고 써 보냈던 시조이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고져.”

그러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고려에 대한 충성으로 대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자기나라를 사랑하는 충심이 정몽주의 마음에 불타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도 믿음생활을 이방원처럼 세상 풍조와 온갖 타협을 하면서 할 수 있고 또 정몽주처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성경은 정몽주처럼 하는 것을 순교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아사 왕이 행하였던 ‘정의’(ישׁר 야솰 direct straight, upright)를 우리 하나님은 크게 보셨다니까요! 저와 여러분도 우리 하나님이 보시고 ‘정의’(ישׁר 야솰 direct straight, upright)를 발견하게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건축(6)

아사 왕은 전국에 성읍을 건축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설교본문 6절은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라고 기록하여 그 이유를 밝혀놓았다(‘평안’ נוּח 누아흐 abide. settle down, rest). 아사 왕은 소위 잘 나갈 때, 태평세월 시절에 철저한 방비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게 근면이요, 지혜이며, 有備無患이다. ‘아사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왕상 15:16>).

영국 버밍엄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사과 2개를 꺼내더니 아이들에게 겉모양이 삐뚤고 상처 난 사과를 보여주며 소감을 말해보라고 하였단다. 아이들은 제각기 “나쁜 사과” “넌 못생겼구나.” “정말 보기 싫게 생겼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시 이번엔 둥글고 잘 익은 사과를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소감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완전히 정반대로 사과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제 선생님은 사과를 둘 다 반으로 자르자 비난을 받은 사과는 아주 싱싱하였고, 칭찬을 들은 사과는 속이 썩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겉으로만 봤을 때 이쁘게 보이는 사과는 썩는 속이었다. 사람도 그럴 수가 있단다. 우리가 놀리고 무시하는 친구들도 속은 깨끗하고 아름다울 수 있단다. 이 못난 사과처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삶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은 그 사람의 판단에 나타나고 특히 근심걱정을 당하면 골방을 찾아 하나님과 의논한다. 그러고 나면 여전히 불안과 초조한 현실인데도 담담해 한다. 그래서 환경 때문에 행동이 환하거나 어둡게 되지는 않는다. 저와 여러분도 신앙관 때문에 꾸준하고 초지일관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에 담겨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자.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함으로 다윗 왕의 4대손 아사 왕의 신앙색깔을 총평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셨다. 한 마디로 ‘선과 정의’이었다. 그것은 우상들을 없앴기 때문이었고, 여호와를 찾게 하는 통치 때문이었으며, 평안을 누릴 때 성을 건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이것을 우리도 살려가는 신앙생활을 잘 해내기를 축복한다. 아멘.

최근 게시물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