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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9일 설교

“하나님이 도우시게!” (대하 13:13-22 ‘기적을 이루는 기도’) 18.8.19.

우리는 올 여름 폭염으로 얼마나 시달렸던지 아직 33-4도인데도 시원하게 느끼고 있을 정도이다. 아무튼 가을은 문밖에 거의 다 와 있는 것 같다. 고산 윤선도는 인생의 가을을 이렇게 서럽게 노래하기도 하였다.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라고 고산이 울부짖었던 ‘그 바위’는 결국 무엇이었을꼬? 추측하건데 고산이 지성으로 섬기려던 ‘불사이군’(不事二君 인조, 효종)이나, 자신의 조국 ‘조선’, 아니 그것들을 넘어서서 ‘자신의 지조’가 아니었을지? 윤선도의 ‘그 바위’를 그려보노라면 ‘봄꽃’은 이미 사라졌고, ‘봄풀’도 누렇게 시든 가을임을 실감하게 된다. ‘꽃’이라는 낱말을 ‘성도’로 바꾸고, ‘풀’이라는 낱말도 ‘민중의 대변자’로 바꾸어 생각한들 괜찮을 것 같다. 성도가 변절한다는 사실은 저 개인으로는 암 투병 같은 고충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종종 현실 뉴스로도 보도되곤 하지요. ‘민중의 대변자’로 다짐할 때 그 자리만큼은 ‘그 민중’이란 힘이 하늘이요 주권재민(主權在民)이다. 그래서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고 예찬해도 다 공감한다. 그러나 그 ‘민중 힘’도 권(大韓民國의 權)과 돈(大韓民國의 金) 앞에서는 금방 무릎을 꿇고 시들어버린다.

옛 독립투사들의 군가 ‘피 솟는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졌네/ 독립군 가슴에서 피 흘러 풀밭 적셔/ 공중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2절 하늘 아래 외로운 몸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섰는 나무 아래 힘없이 쓰려졌네/ 나의 사랑 대한독립 피를 많이 마시려나/ 피를 많이 마시려면 나의 피도 마셔다오/ 이 애국충정이 그리워진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조선이 일본에게서 반드시 해방할 것이라는 확신만 살아있었다면 감옥에 가는 게 무엇이 두렵고, 그들에게 바른 말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확신이 없었던 이들이 친일파로 돌변하였을 것이고, 또 그들이 위안부를 팔아먹는 집단이 되었으리라. 우리 자신의 신앙중심에 담겨진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국 애국과 매국의 길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안중근 의사가 바로 체포당해 있을 때, 일본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토 히로부미인 줄 모르고 쏘았다 하면 살려주라는 것이었단다. 그 제안에 안중근 의사는 “무슨 소리냐. 저 이토 히로부미란 놈이 우리 대한독립을 가로막고 동양평화도 위협하는 놈이다. 내가 해치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나는 일개 자객이 아니다. 대한제국의 참모요, 장군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네모반듯한 믿음중심을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요긴하게 보셨는지 잘 입증해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직접 확인하여 보자(15-16). 지금 함께 읽어본 대로 오늘 설교본문은 이스라엘의 남북 간에 벌어진 첫 전쟁을 기록하여 놓은 것인데, 주일 낮 예배시간이면 계속 이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혀 불필요한 일을 괜히 당하게 된 장면이었다.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솔로몬 왕이 우상숭배에 빠짐으로 불행하게 된 하나님의 진노실현이었던 것이다(‘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왕상 11:9, 11-13).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3대만에 전쟁으로 이루어졌으니 진정 안타까울 뿐이다. 놀랍게도 이 안타까운 현장에서 기적 기도응답이 이루어졌다는 게 15절이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준 과제물인데,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에 살고 있는 청소년 200명에 대하여 생활환경을 조사하고 평가하여 제출하는 일이었다. 평가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이 아이들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25년이 지났는데, 그 대학 또 다른 사회학과 교수가 그 조사평가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었다. 그 200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을 보낸 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적조사 하여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는 놀라운 결과이었다. 사망을 하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이 그 지역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 176명이나 건실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상류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직업도 상당수 되었다.

교수님은 궁금해져서 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만나 물어보았단다. “당신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똑같은 대답이었다. “교회학교 여선생님께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교수님은 그 여교사를 찾아가 만나봤다. “전혀 미래가 없던 청소년들에게 도대체 어떤 비결로 가르쳤기에 이처럼 건전한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할머니 여교사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그게 비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난 그 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꼭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였으며, 그것을 위한 기도하자고 약속하였지요. 난 진심으로 기도해왔고요.”

자 그러면 안타까운 현장에서도 응답되는 기적을 저와 여러분도 재현하기 위해 그 원리나 법칙을 찾아보자.

1) 적병으로 말미암아(14)

‘적병으로 말미암아’는 ‘패전확실시’를 웅변해주고 있다(우선 앞 뒤 복병함정에 걸려들었음, 또 40만 명 대 80만 명의 전투이었고<3>, 이정도 되면 항복하거나 자기 장수의 목을 잘라 적군에게 바치고 투항하기 십상임. 그런데 유다군은 그러지 않았고 기도를 선택하였음<‘여호와께 부르짖고> 그 결과는 기적승리이었다는 것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기적승리를 이루지 못하는 기도가 흔하다는 사실을!(‘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사 59:1-3).

그렇다면 설교본문의 기도는 어떠한 차이점을 갖고 있나요? 3가지인데; ‘여호와께’ + ‘부르짖고’ +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니라’ ‘여호와께’는 하나님 인식(실력, 전지전능하심, 창조주)을, 그리고 ‘부르짖고’(צעק 차악)는 기도의 위력을 시인함이다(하나님이 기도시간에 무엇을 하시는지 알고 반영함<‘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13>,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니라’는 합심이다<‘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19>).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한 기도법칙을 살리는 기도에 익숙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의지(18) כי

유다 40만이 북쪽 80만을 이긴 비결을 밝혀주는 말씀으로 ‘이는’(כי 키 for)이란 단어로 18절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שׁען 솨안 rely on, trust in, recline. 기대고 눕는 모습. 그만큼 신뢰하고 맡기는 것임).

이순신 장군은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졸병으로 강등되어 싸움터로 나간 적도 있었다지요. 그래서 난중일기에 ‘나는 죽고 싶다’라고 표현해 놓았을 때, 왜놈들이 쳐들어오는지라 선조 왕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복직시키고 적을 패전시키지는 못할지라도 후퇴만이라도 시켜보라 하자, 이순신 장군이 그 명령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배 열두 척이 남아있고 이 미천한 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사옵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패전시키고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확신을 내비쳤던 대답이었으리라.

간신배들이 아무리 모함을 해 대도 묵묵히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장군의 몸이었든 졸병의 몸이었든 변함없이 희생심으로 꽉 차있는 이순신의 충성심을 보고 이방인의 중심이었지만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저와 여러분도 기도하게 몰렸을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함과 충성심 때문에 기적응답을 체험하게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쫓아가(19)

‘쫓아가서’(דרף 라다프 persue, to follow after, driven away. = 남쪽 왕 아비야는 북쪽 왕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에게 속한 성읍들을 빼앗았다고 했음. 그러자 우리 하나님은 여로보암 왕에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시다가 결국 없애주셨다는 것임<20>. 그래서 아비야는 마음 편하게 점점 강성해갈 수 있었음<21>. 아비야 왕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확신하였기에 감나무 밑에 누워서 팔짱끼고 입만 벌리고 감을 기다리지 않았음. 이런 것을 우리가 배우고 갖추는 게 중요함. 왜냐하면 아비야 왕의 통치기간은 삼년밖에 되지 않았음<2> 아내 14에 22남 16녀를 낳을 정도인데도 삼년 통치는 너무나 짧았음. 우리 하나님은 통치기간을 겨우 삼년밖에 줄 수 없는 왕이었는데도, 40만 대 80만의 전쟁을 기적승리로 응답해 주셨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명심하자는 것임!).

'높은 산봉우리만큼 우뚝 솟은 사람을 만들자’ 이 말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수도 Sacramento의 주 의사당에 써져있단다. 높은 산봉우리는 수많은 골짜기와 굴곡 이야기를 지나가야 만나게 되어 있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Arnold Toynbee)는 모든 위대한 문명은 역경의 산물이라고 단정하고 역경설을 내세웠다. 그런 점에서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그리스도인에게도 시련은 바람직한 것일 수 있다. 꿈을 가진 사람이 그 꿈을 실현하기까지 숱한 시련을 이겨 나오는 법이다. 우리 하나님의 기적도 알고 보면 대부분 험한 시련들 그 위에 봉우리처럼 마련돼 있다. 그래서 기적이 희귀한 것이다. 늘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비춰보자. 누가 볼까봐 부끄럽게 보인 그게 바로 오늘의 만나이다. 귀하게 챙기고 값지게 활용하시길 축복한다. 아비야 왕은 자타가 시인하는 패전, 패국, 멸망상황에서 기적승리를 거두었다. 기도 선택 때문, 하나님 의지 때문, 쫓아갔기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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