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9일 설교
“겸비함을 보신지라!” (대하 12:5-12 ‘하나님의 축복원리’) 18.7.29.
반갑다고 꼬리를 치는 강아지에게 활짝 웃으면서 “너, 올 여름 말복에 잡아먹을 테니 각오하렸다!”라고 말하면, 강아지는 ‘좋아라!’ 하면서 계속 꼬리를 치고 쳐다 볼 것이다. 강아지가 ‘잡아먹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반대로 막대기를 들고 몹시 분노한 동작으로 “강아지야, 아이 예뻐! 내가 너를 참으로 사랑한단다.” 라고 말하면서 사랑하는 진심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아무리 애써도 강아지는 으르렁거릴 것이다.
성경읽기나 설교듣기도 비슷하다. 글자나 겉 표정보다는 속 내용이나 언약을 알아차릴 때 독자나 청중은 감동을 받지만,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면 졸리기 마련이다. 아무리 명문장으로 유창하게 설교를 중계하며 전해도 그 속 내용을 모르면 하품하다 고개를 떨구고 침을 흘리게 된다. 그래서 레위기를 싫어하는 교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더듬거린 어조로 설교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정한 계획을 알아들을 때 교우들은 눈물을 흘리며 순종을 다짐하게 된다.
심장에서 보내지는 혈액의 1/3정도는 두뇌활동에 사용되고 그 중에 절반은 언어사용에 사용된단다. 언어는 1초에 14,000개나 되는 신경근육을 움직이게 하는데, 적절한 언어를 표현하려면 뇌가 호흡과 발성, 공명, 성대, 호흡기관, 후두, 비강, 눈, 귀, 입, 횡경막, 폐장을 종합적으로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듯이 조정한단다. 이렇게 뇌가 여러 가지 기능을 잘 조정할 때 그 조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순음’이라 하고, 하지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조정이 서로 틀리게 전해지면 듣는 사람의 뇌는 적절히 순음 되게 조정하다가 결국 ‘역음’으로 연결시키는데, 그게 듣는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설교자)이 ‘서로 사랑하라’라고 알리고 있을 때, 읽는(듣는) 사람의 마음이 사랑을 거부하는 상태라면 그 사람의 뇌는 고민을 하다가 ‘역음’으로 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곳에서 설교해도 어떤 사람은 감동으로 듣지만 바로 옆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첫 외침을 ‘회개하라’라고 하셨던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하나님과 차이 나는 공감 때문에 안타까운 쓰라림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7). ‘조금 구원’(כמעט 키메아트, 시간적으로<soon, shortly> 수량적으로<as a little, some>. ‘some deliverance’ -NKJV, Amf - ‘barely survive’ -GN-. ‘대강’ -개역-.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때 크게 두 가지로 하심: ① 하나님의 실력을 체험시켜 믿음생활하게 하심<출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홍해건너기> ② ‘네 믿음대로 되라’<예수님이 많이 하셨지요.>. 확인하여 보자.
①출 14:10-11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צעק)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기도 + 혈기다툼).
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하나님의 평가. ‘어찌하여’ = 기도와 삶의 불일치함을 지적하심)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간절히 합심통성기도 하다가 기도판을 뒤엎어버려도 최고급 기적으로 응답하셨음! ≠ ‘믿음대로 되라’의 기적).
야곱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이삭과 형, 하나님을 속이고 축복기도를 받고 외가로 도피 중인데도 하나님은 벧엘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통해 번성을 언약하셨다(‘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창 28:13-14. 믿음수준은 형편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막대했음).
②수 3: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8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 15下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불평불만, 혈기다툼이 없는 절대순종이었음!)
6:15‘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10:7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자손에게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 ‘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9:18. 원망할 일이 있었고 하다가도 결정적인 때 안할 줄 아는 믿음수준이었음! 욥!).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시키는 기적과 믿음대로 기적이 있는데 르호보암 왕국은 ‘네 믿음대로 되라’에 따라 ‘조금 구원’을 받고 쓰라림에 빠졌던 것이다(9-11 애굽 왕 시삭에게 왕궁과 성전까지 털림, 황금방패를 뺏기고 대신 놋 방패로! 성전에 드나들 때마다! 얼마나 치욕이었을꼬?). 왜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됐을까?
1) 겸비(7)
르호보암 왕과 그 방백들은 나라가 강성해가다가 애굽 왕 시삭에게 침략을 당하자 정신을 차리고 그 원인분석과 대책마련에 골몰했고, 하나님은 선지자 스마야를 보내 율법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랬더니 르호보암 왕과 방백들이 겸비하였고 우리 하나님은 ‘조금 구원’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겸비’라고 하는가?(כנע 카나아 to bow down, submit, humble. 하나님께 잘못함을 시인하고 철저히 반성하며 고치는 태도임. 신앙적으로 대단히 잘하는 칭찬감! 그런데 중요시할 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해야 함임.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13>. 졸속으로 대충대충 해치우지 말라는 것임).
초등학교 6학년 쯤 되는 두 학생이 서로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다가 한 아이가 대응에 좀 밀리더니 음성을 높이며 하는 말이 “너 말을 잘하는 걸 보니 교회 다니는가 보네...”하더란다. 또 중학생 둘이 말씨름을 하던 중에 한 학생이 말하기를 “넌 말솜씨가 목사하면 잘 하겠구나.”하였단다. 이 두 경우는 하나님 자녀생활의 모순을 잘 대변해주는 실례들이다.
예수교는 ‘말씀의 종교’라 하고, 신도들의 믿음을 ‘말씀신앙’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뜻도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예배당에서 설교도 말씀을 해설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씀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지 못하고 암기한 지식만 떠벌린 설교를 조롱하는 말이 “목사하면 잘하겠다.” 아니었을까요? 이런 조롱이 ‘조금 구원’을 만들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길! 아멘.
2) 알게(8)
르호보암 왕국이 겸비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보고도 일부러 할례 받지 못한 애굽 왕에게 짓밟히게 허락하셨고 그 부끄러움을 톡톡히 당하고 또 오래 되씹게 하셨다(8)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충 겉으로만 하는 그러니까 ‘설익은’ 신앙생활의 버릇을 지적하여 명심(銘心)시키고 근절시키기 위함이었다(‘알게’ ידע 야다 experience).
일본정부는 명치유신 이래 오늘의 일본으로 건국함에 공로를 세운 선각자 20명을 뽑아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이었다. 그는 안수 받은 목사도 아니고 신학교수도 아니었다. 평생 평신도로 살았다. 그런데 그를 뽑은 이유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일치시킨 업적’이라고 설명하였단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로 중국으로 연전연승을 해갈 때 그는 외쳤단다. “일본이 동양의 평화에 기여할 일이지 지금처럼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그 백성을 괴롭히면 하나님께서 일본하늘에 불벼락을 내리실 것이다. 일본이 지금 할 일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회개이다.” 그래서 그는 핍박 중에 교사직에서 추방을 당하였고, 할 일이 없자 6평방에서 청년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면서 패전일본의 건국일꾼을 양성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무덤 앞에 비문은 본인이 죽기 전에 작성한 것인데 일본어와 영어로 써 있단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World for the Christ And all for the God.”(나는 일본을 위한 것이고, 일본은 세계를 위한 것이며,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의 비문이 그의 믿음을 분명한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르호보암 왕국에게 이러한 삶신앙을 기다리셨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시삭 침략을 체험시키고 그 차이를 뼈에 사무치게 하셨다는 것이다. 늘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3) 선한 일(12)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מיבוט מירבד 다발림 토빔 good things). ‘겸비’는 회개행위, 예배당에서 볼 수 있는 일에 해당하고, ‘선한 일’은 엿새 동안이며 일상 삶이다. 우리 하나님은 주일, 예배당에서, 믿음행위만 보신 게 아니라, 엿새 동안 신앙의 생활화도 중요하게 보시고 ‘조금 구원’을 결정하신다는 점이다.
드보르작(1841.9.8-1904.5.1)은 자기 고국 체코에서 특별히 큰 사랑을 받은 작곡가였단다. 한 번은 그의 연주회장에 시민들이 많은 꽃다발을 보냈는데 그 꽃다발 중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님에게 드립니다.”라고 쓴 리본이 있더란다. 드보르작은 그 꽃다발을 받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집에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그 꽃다발을 볼 때마다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하지만 연주회는 이미 끝난 지 오래 됐고, 되돌려주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버리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꽃다발을 들고 자신의 작업실로 가서 베토벤의 초상화 밑에 두었단다. 베토벤은 드보르작이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였기 때문이었다. 체코사람들에게 받은 최고의 존경을 드보르작이 냉정하고 합당하면서도 겸손하게 받아들였던 것처럼 우리가 믿음생활을 그렇게 한다면 ‘조금 구원’을 넉넉하게 멀리 떼어놓을 수 있게 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가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준 믿음푯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오늘 설교본문은 르호보암 왕국이 강성하다가 애굽의 침략을 받고 ‘조금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족한 겸비, 하나님의 인식 부족, 선한 일 부족이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나침반이 되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