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일 설교
“순종되는 헌신!” (대하 6:1-11 ‘솔로몬 성전 감사’) 18. 4. 1.
우리가 천국백성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다가 춤 출 일로 응답되기를 바랄 때가 종종 있지요. 우리의 현실이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기적도움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교회의 전문용어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축복이 지속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순간에 우리의 춤을 그치게 만들고 박수치던 손으로 가슴을 치게 만드는 아픔이 덮쳐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달에 일본식민지 36년을 기억하며 3·1절을 보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당한 한일합방은 우리 민족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오점이 아닐 수 없다. 3·1절은 이러한 수모를 바로잡느라고 항거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의 애국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난의 멍에를 메고 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 고난 때 고난수업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도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이후로 6·25, 4·19, 5·16, 촛불집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진정으로 질문할 바는 이것이다. 왜 고난의 멍에를 계속 메게 되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성전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네마다 십자가를 세워놓고 십자가 보혈을 찬송하는데도 한반도는 두 동강나 있고 고통은 여전히 반복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하나님 자녀생활의 희비극 중에 춤을 추게 하는 경우에 해당한데, 솔로몬 왕이 실제로 경험한 바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설교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여기에서 ‘그 때’는 바로 앞부분 5장 14절을 가리킨다.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러한 경우라면 대부분 입이 귀에 걸리고 마음도 지갑도 열리게 된다.
주님이 부활하심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춤추게 하는 일이지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이런 말씀을 기록하여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헛되고’ ματαια vain, ineffective, useless, deceptive ‘있을’ εστε. ειμι<‘있다’, ‘이다’, be>의 현재형, 복수 2인칭. ‘있을 것’이 아닌 ‘있는 것’으로 번역해야 맞음. = 알맹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속이고, 그래서 무효한 상태로 계속 진행되고 있는 모습. ‘you are still in your sins!’ -NKJV- ≠ ‘you will be still in your sins!’).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을 애지중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성공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을 가진 것이 나 자신에게 유리하고 훨씬 더 이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런 교인들을 보는 것은 아주 쉽다. 그렇지만 이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수준의 신앙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도 괜찮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체험했더니, 하나님과 관계하였더니, 하나님과 교제하여 봤더니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지... 그러나 지금 제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조건 없이 사랑하고요.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런 식으로 믿음수준을 점점 진보시키면서 신앙생활을 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귀다가 서로 삶을 섞으면 ‘서로의 인생을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라는 판단을 하게 될 때 결혼을 한다. 그렇게 살아보니까 조건 없는 인격적인 사랑으로 발전해서 어느 날, 한순간에 이러한 말을 하게 된다. “여보, 나는 당신을 그냥 좋아하게 됐어. 진심으로 기쁘기 때문이야. 밥을 안 해줘도 난 당신을 헌신적으로 대할 거야.”
이런 부부는 조건을 뛰어넘은 관계이지요. 한 인격체를 이루는 순수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하나님이 확인하는 경우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후에, 하루 종일 춤추고 노래하였을 때, 하나님은 3일 후에 마라우물을 지나가게 하셨다. 목마른 광야를 지날 때도 하나님께 홍해처럼 감사 찬송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신 것이다. “너희들, 오늘 마라란 쓴 우물 앞에서도 찬송할 수 있느냐? 이 목마름 중에도 찬양할 수 있니? 이 광야훈련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가?” 따라서 마라 우물은 확인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이 올 때 易地思之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이치를 알아차린 성도라면 이렇게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 저 이번 고난 중에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가 고난 앞에서 신앙인답게 반응한다면 고난환경도 감사로 바뀌게 된다. 고난은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고난시험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회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아멘.
자 그러면 다시 설교본문으로 돌아와서 솔로몬 왕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 잘하고 있다고 응답을 주실 때, 솔로몬 왕은 무엇을 하였고, 그 모습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는지 살펴보고, 그런 후에 내 교훈을 챙기자.
1) 처소(2) ערפל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정성껏 건축한 성전을 두고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고백한 말인데, 1절과 연결시켜서 생각하여 보면 ‘캄캄한 데’ 와 반대의미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ערפל 아라펠 thick cloud, darkness. 출19:9<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만날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던 그 사실을 알고 반영한 말임). 물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온 우주에 다 계시면서 통치하고 있지만 그럴지라도 ‘제발 이 성전에도 계시면서 만나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소원을 표현 말이었음). 이러한 만남의 소망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표현했을 때 우리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실 정도로 기뻐하신다는 것이니 이런 것을 챙겨서 활용할 줄 알아야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된다. 아멘!
미국의 중부 시골마을에서 마샤 에븐스라는 소녀가 13살 청소년기 때 수술후유증으로 입이 삐뚤어지게 되었단다. 삐뚤어진 입은 십대소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겠는가! 친구를 멀리하고, 학교도 겨우 가지만 혼자 있으려 하고, 집에서도 혼자 자기 방에만 있으려 하고, 심지어 엄마마저 대화를 끊고 홀로소녀가 되어갔다.
그런데 그 해 끝 무렵 소녀의 생일에,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되었는데, 익명으로 단지 한마디 “Masha! I love you so much.” 마샤가 그 치자 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엄마에게 말을 걸더란다. 몇 달 만에! “엄마, 이걸 누가 보냈을까? 도대체 누굴까?” “글쎄..... 누굴까? 아마 너를 좋아하는 남학생이겠지.” “에이 누가 나를 좋아해. 나 같은 사람을.” “그래도 너를 좋아하는 남학생은 있을 거야.” “그럼 이름을 쓰지.” “아마 수줍어서... 뜻밖에 수줍어하는 남자들도 많더라.” “그럴까?”
별난 것도 아닌 치자 꽃 한 송이 때문에 마샤는 대화를 시작했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생일에도 또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됐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마샤는 밝아졌고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괜찮은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 후에도 그 치자 꽃이 배달될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그 치자 꽃은 배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샤는 알았다. 그 꽃을 누가 보냈는지. 마샤가 시집간 직후에 불행하게도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치자 꽃이 마샤의 인생을 바꾼 게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 바꾼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주 하는 고백 가운데 이런 게 있다. ‘나는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라고, 죄인을 변화시킨 게 십자가란 나무 맞나요? 십자가라는 통나무가 아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사건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솔로몬 왕도 깊은 이해로 인간을 치유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싶어서 그 만남의 처소로 성전을 지었다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거의 전무후무할 정도로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다. 늘 생각나길 축복한다.
2) 송축(4)
성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을 때 솔로몬 왕은 즉시 성전이 처소임을 밝히고 이어서 이스라엘 회중을 축복하면서 송축했다는 것이다. 송축한 내용은 4절부터 11절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요즘 교인의 용어로 말하면 ‘간증’에 해당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체험적이고 목격적인 입장에서 밝히고 알린 것이다(‘이루셨도다’<4>, ‘인도하여’<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10>). 이게 중요한 점은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시 150:1-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십자가 기도).
독수리는 70년쯤 사는데 40년이 되면 발톱은 노화되고, 입부리도 길게 구부러지고, 깃털도 길어 무겁고 그래서 민첩한 사냥을 못하게 된단다. 그러면 솔개는 산 정상 바위틈으로 날아올라가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다 깨뜨리고, 다시 돋아난 새 부리로 발톱을 쪼아 뽑고 깃털까지 뽑으면, 반년 정도 지나 솔개는 새 부리와 새 발톱, 가벼운 깃털로 완전히 변신해 다시 힘찬 사냥꾼으로 30년을 더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예수교의 생명인 부활절을 지키고 있다. 부활절은 단순히 ‘예수님이 죽은 후 삼일 만에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바울은 부활장 31절에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 부활절은 현재의 나를 ‘말씀하신대로’에 정조준 하는 날이다. 낡은 부리와 발톱, 깃털을 뽑아버린 날이 부활절이다. 아멘.
3) 좋도다(8-9)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을 때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심을 밝혔는데, 건축을 사모하고 준비했던 다윗 왕과 실제로 건축한 솔로몬 자신을 똑같은 동참자로 봤다(‘좋도다’ התיבטה 하티보타 טוב의 히필형, 강조<act rightly, to do good, to make fair> = 요4:37-38. 겸손은 올바름과 순종을 포함함).
갓필드라는 고등학교는 주로 문제아들이 졸업장만을 따려고 모여들었단다. 이 학교에 수학 선생님으로 부임한 제이미 에스카란다 선생님은 “학생들은 선생님이 기대하는 만큼 성장한다.”는 마음으로 “햄버거만 먹고 사는 아이들”로 만들지 않겠다고 가르치자, 선생님의 뜻에 감동받아 아이들이 변해서 LA통합교육부 주최 수학시험에 첫 해 18명이 합격하고, 다음 해 29명, 3년째는 45명, 4년째에 73명 전교생이 합격하는 기적을 이루자, 제이미 에스카란다 선생님 왈 “나는 존귀하게 태어난 아이들을 존귀한 자리로 회복시킨 것 밖에 없다.” 오늘은 부활절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유도 지옥백성을 본래의 천국백성으로 회복시켜 놓기 위해서였다.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다’ 이다. 우리 모두 ‘좋도다’를 따라 살아가길 축복!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에 우리의 남은 일생을 맞추자. 성전 가득한 영광에 감사함! 처소마련으로! 간증으로! ‘좋도다’에 순종함.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