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7일 설교
“풍성함을 즐기자!” (대상 29:20-25 ‘축제되는 예배’) 18. 1. 7.
대학가에서 한 때 ‘CEO총장’으로 알려진 분이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이었단다. 이경숙 박사가 1994년 3월 숙명여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후 네 번이나 연임을 하였지만, 그가 숙명여대 총장으로 첫 취임을 했을 때, 친구들은 “당신 불쌍해서 어떡하지?”라고 말할 정도로 숙명여대는 위기를 당하고 있었는데, 그 핵심이유는 숙명여대는 본래 고종황제가 하사한 땅에 자리를 잡았지만 해방을 맞이한 후에 토지정리를 해 놓지 않아 국유지로 묶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고종이 하사한 땅문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대료 수억 원과 벌금까지 미납되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땅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몇 개월 동안 담당자들과 공무원들을 찾아가 만나봤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았고, 더 이상 심신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자 이경숙 총장은 찾아가는 곳을 기도실로 바꾸었단다. 기도실에서 기도하다가 애통터져서 부르짖었고 울면서 호소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음성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해보고 있었는데 “네가 언제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었느냐? 너 혼자 뛰어다니고 너 혼자 다 하지 않았느냐?”라는 감동하심에 사로잡혔고 이 총장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감동대로 사람을 만났어야 했는데, 순서를 바꿔서 했음’을 깨달았단다. 자신이 먼저 해 놓고 주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총장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즉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하나님, 능력도 체력도 부족해서 저는 이제 기권합니다. 보잘 것 없지만 제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숙대주인이 되어주십시오.” 그날 이후부터 숙대총장은 하나님이라고 믿고 자신은 심부름하는 청지기가 되기로 작정했고, 기도하지 않고 학교일을 시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항상 숙대총장 하나님께 기도부터 시작하였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더란다. “이 사람이 왜 와서 귀찮게 하느냐?”는 듯이 무시했던 담당공무원들이 이 총장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고, 결국 그해 연말에 땅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더란다. 그래서 제2의 창학을 선언하고 새로운 건물 11개를 완공하였고, 다시 4개의 건물을 더 지었는데, 이경숙 총장은 “건물을 지을 때마다 모자라지 않게 건축대금을 치르도록 주님의 선하신 손이 함께하셨다.”라고 고백하였단다. 그래서 건물을 준공할 때마다 헌당예배를 꼭 드렸다는 것이다. 이경숙 총장은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는 습관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설교본문도 어리고 미숙해서 은근히 불안하고 속상하던 일이 온전하게 뒤바꿔지게 되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24. ‘모든 방백과 용사와 다윗 왕의 여러 아들들이 솔로몬에게 복종하니’ 25절 ‘여호와께서... 심히 크게... 주사... 뛰어나게’ = 이제 하나님의 통치체제 중심에 들어섰다는 것임.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형통여건을 갖추게 된 것임! ≠ 1절). 사 43 :1-3에 이런 말씀이 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야곱 = 육의 사람, 이스라엘 = 육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신앙인. 교회는 다녀도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이든 변화된 사람이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불 속에 빠져도 안전한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임!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그렇게 되었음).
젊은 나이에 성공의 길로 들어선 영국인 변호사 한 분이 비중 있는 변호를 영국 의사당 앞에서 하기로 맡았단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맡아 놓고 어찌나 긴장과 부담감에 눌렸던지 그 스트레스로 그만 쓰러져버렸다. 그래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변호사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해 정신착란증에 시달려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는 자신을 자학하며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고, 10년 세월을 보내다 전도를 받아들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었다. 그러고 그는 십자가 사랑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 없이 크도다. 찬송가 258장이 바로 그가 간증한 찬송시이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 1731-1800)였는데 영국문학사에서 고전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이었단다. 그는 스가랴서 13장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라는 말씀을 읽다가 ‘씻는 샘’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임을 깨닫고 시를 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제대로 붙잡히면 정신착란증도, 어리고 미숙함도, 기권함도 다 형통으로 바뀐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형통함 길을 살펴보자. 설교본문에서 다윗 왕이 답을 가르쳐준다. 함께 찾아보자.
1) 절하고(20)
다윗 왕은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명했다(ברך 바라크 to bend the knee, bless, worship, praise, adore, greet). 그러자 회중들이 송축하고,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절하다 = שׁחיטה 쉬히타 to kill animals, ‘prostrated themselves before the Lord’ -NKJV-.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적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 -새번역-). 그만큼 존경하고 충성심을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어떤 도박꾼이 오랫동안 영성수련을 쌓은 노 수도사를 찾아가서 자기사정을 상담했단다. “어제 카드노름 중에 속임수를 쓰다가 들켜서 상대들에게 마구 밟히고 창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다리골절 부상을 당했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주십시오.” 노 수도사는 그 도박꾼의 얼굴을 정중히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만일에 자네라면 이제부터는 1층에서만 카드노름을 하겠네.” 그러자 도박꾼은 물론 제자들도 어리둥절해 했다. ‘다시는 도박질을 하지마라’ 이런 충고가 자명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도박질을 하라고 하셨을까? 황당해 하던 제자가 물어봤다. “선생님, ‘다시는 그 짓을 하지마라.’ 그러시지. 어째서 ‘앞으로는 1층에서만 하라’고 하셨습니까?” 노 수도사가 대답했다. “그 사람의 중심을 들여다보니 도박을 끊지 못할 사람이더라. 그러니 또다시 2층에서 내던져지면 그때는 죽지 않겠느냐? 그래서 1층에서만 하라고 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킨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성경의 올바른 읽기에 따라 힘써 하나님의 의로움에 순종하는 게 회개요 열심이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처럼 ‘손을 씻는다.’ ‘발을 끊었다.’ 이런 말이 회개인 것이다. 오랫동안 빗나가던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참 좋은 일이지만 쉽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는 틀림없는 축복통로이다. 다윗 왕의 회중처럼 할 수 있길 축복한다! 아멘.
2) 풍성한 제물(21)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그런데 본문에 ‘또’란 말씀이 있다. 그렇다면 수송아지 천 마리, 숫양 천 마리, 어린 양 천 마리는 번제물이었고 또 다시 풍성한 제물을 드렸다는 것이다(‘and other sacrifices in abundance for all Israel.’ -NIV-. ‘그곳에 모인 무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화목제물도 바쳤다.’ -현대어 성경-). 다윗 왕의 헌신지수(헌금뱃장, 믿음표현 규모)는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우리가 성군의 축복을 바란다면 이런 헌신지수도 눈여겨보고 배워야 한다.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라고 하는 유명한 독일신학자가 있다. ‘나와 너’(I and Thou)라고 하는 세계적인 명저를 쓴 분이다. 부버는 “인간의 존재란 나 외에 어떤 대상과 관계를 어떠한 모습으로 맺느냐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 인간관계는 두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인격적 관계(대화적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비인격적 관계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와 너’는 인격적인 상대라야 바람직한데, 잘못되면 ‘나와 그것’ 즉 물건과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너’의 관계가 인격적일 때 나 자신의 존재가 인격적인 품위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그것’의 관계로 있다면, 나라는 존재도 비인격화 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대화적 관계(상대를 알아듣고, 알아보고, 이해하며 대할 수 있을 때 인간다운 존재라고 볼 수 있지만, 대상을 수단(도구)로만 인정할 때, 들을 필요도 없고 들은 바로 이해하지도 않는 그런 관계라면 인간의 존재성립은 무너지고 만다고 하는 유명한 깨달음이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도 인격적인 대화의 관계라야 예배가 예배되고 기도나 찬송, 봉사가 상달되지 물건(IT)이 되면 하나님은 축복도구가 되고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만다. 저와 여러분의 헌신지수(헌금뱃장, 믿음표현 규모)가 인격적이길 축복한다. 아멘.
3) 먹으며(22)
‘여 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더라’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을 함께 나눠 먹으면서 교제를 했다는 것이다. 제사를 축제로 만든 것이다. 예배 후에 식사,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사실 올바른 예배는 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성도의 교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유정란과 무정란은 외모로 보기에는 똑같다. 그런데 유정란은 생명인자를 갖고 있는 산 달걀이다. 하지만 무정란은 생명인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죽은 달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미닭이 유정란을 품고 있을 때 병아리로 변한다. 무정란을 아무리 오래 품고 정성을 쏟아도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다. 그래서 죽은 달걀이라고 하는 것이다.
두 집사님이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두 분 다 똑같이 얼굴이 있고, 팔이 있고, 눈이 있다. 한 집사님은 웃고 울고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중보기도를 한다. 신앙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다른 집사님은 눈물도 웃음도 대화도 기도도 없다. 왜 그럴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때문이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바꿔주시는 체험을 하게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우리는 2018년 첫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 받은 내 말씀을 챙기자. 다윗 왕은 이~취임식을 축제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형통하게, 크게, 뛰어나게’ 해주셨다고 했다. 우리도 올해는 되게 하자(미숙, 근심, 불안, 불길징조가 축제예배로 형통함 되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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