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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송구영신예배 설교

“부르짖으리라!” (시 55:12-18 “송구영신”) 17. 12. 31. 11:30.

아일랜드의 한 교회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익사하는 비극을 당하였다. 그는 괴로움에 점점 빠져들어서 삶에 의욕을 잃어가자, 친구들과 가족들이 권유함으로 충격을 준 지역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단다. 그런데 그 청년은 캐나다에 정착도 하지 못했는데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중병으로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 세상의 우환들이 한꺼번에 토네이도 회오리바람처럼 자기에게로만 몰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청년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면서 부르짖었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소서. 응답해주시면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위주로 살겠습니다.”라고 울부짖었더니 순간적으로 평화로움이 가슴속에 가득 차고 기뻐지더란다. 그래서 그 체험을 시로 써서 편지와 함께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는 다시 어머니로부터 거짓말처럼 중병이 깨끗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 시가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시험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찬송가 369장)라는 찬송가가 되었다. 조셉 스크리븐(Joseph Medicott Scriven, 1819-1886)이 1855년에 썼다는 詩지요. 스크리븐이 울부짖고 간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기도가 어머니를 중병에서 건져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래서 스크리븐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오늘 설교본문도 다윗이 썼다고 밝혀놓았는데 스크리븐처럼 기막힌 처지를 당하자 기도를 선택하였다고 밝혔다(16. קרא 카라 to call out, shout, to cry for help, proclaim) ‘구원’(ישׁע 야솨 save, set free, safety, aid). 그렇다면 다윗은 자기혼자만으로는 역부족한 처지에 휘말려들었고, 그 고난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을 기도로 삼았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현실을 보자(12-15. ‘나를 보고 비웃는 자가 바로 원수였다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으리라. 나 보란 듯 잘난 체하며 뽐내는 자가 바로 내 대적이었다면 얼마든지 몸을 숨기기라도 하였을 것이라. 그런데 그가 다름 아닌 바로 너 아니었더냐? 내 동료, 가장 가깝고 믿음직스럽던 벗이 아니더냐? 우리가 다정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하지 않았더냐?’ -현대어-).

이러한 경우에 ‘배신자’라는 말을 쓰지요. 아니 ‘한이 맺힌다!’ ‘애간장이 녹는다!’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짐승만도 못한 이웃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지만, 참으로 괴로운 현실은 속마음을 다 터놓고 성전에서 함께 예배드렸던 사람들 중에 그 배신자가 생기곤 하더라는 것이다. 설교본문 12-15절이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어서 그 현장을 제대로 보게 하고 싶어서 제가 현대어 성경으로 읽어드린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심방을 갖다오는데, 가느다란 나무 가지가 두세 개 뿐인 수양버들나무가 도로변에서 가로수로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속이 다 썩어 없어져서 텅 비었고 겨우 둥그렇게 남아 있는 겉 부분만으로 생존하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목사님이 그 나무를 보고 “나무야, 너는 목회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속이 썩었느냐?” 하더란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학창시절일 때 독일 고학생들이 부자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면 집주인이 용돈을 주어서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단다. 물론 노래실력이 부족하거나 집주인의 성품이 사나우면 용돈 대신 무안을 주고 빈손으로 쫓기도 했단다. 어느 날 루터가 부잣집 창문 밑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시작하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보더니 2층에서 뛰어내려왔다. 루터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지 않아 그 아저씨가 주먹질이라도 하려고 오는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쫓기를 포기하지 많았다. 결국 루터는 붙잡혀서, 무서워 벌벌 떨고 서 있는데 그 아저씨가 돈 봉투를 내밀더란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장학금을 주는 선한 자선가였더란다.

그래서 루터는 그때를 자주 이렇게 회고하였단다. ‘내 목소리는 별로 좋지 않다.’라는 열등의식을 갖고 노래를 불렀고 그때 그 아저씨가 뛰어오는 것도 나를 해치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게 되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사실 그렇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게 맞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 인식이 다르고, 그 인식에 따라 삶이 바뀐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시장조사하라고 사원 두 명을 보냈단다. 그러자 한 사원은 “이 나라는 모든 사람이 맨발로 다니므로 판매 불가능”이라고 전문을 보냈고, 다른 사원은 “이 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성은 무진장 함”이라고 전문을 띄웠더란다. 회사는 누구를 아프리카 지사장으로 발령을 내겠는가?

능력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실력이다 그러나 가치관도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가치관에 따라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된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 삶에 다윗처럼 구원하심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1) 하나님 인식(18)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이 말씀은 체험을 통한 인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암기한 지식과 혼동하면 큰일이다. 그 큰일을 야고보는 이렇게 설명하여 놓았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예수님은 뭐라고 가르치셨는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2-23. 믿음의 내용 + 표현 + 의심거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게 경배하는도다.’(7:6-7). 산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많겠지만 하나님의 인식이 없거나 하나님이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일 때, 또 맞는 인식이지만 입술로만 할 때이다.

미국 알라스카의 스티브라는 청년이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날 목사님은 마태복음 17장 20절을 설교본문으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라는 내용을 설교했다. 그런데 스티브의 집은 겨울이면 뒷산에서 자주 눈사태가 나서 골칫거리인데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설교에 스티브의 생각은 고정되고 말았다. 스티브는 기도해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 소식이 목사님에게도 전해졌다. 목사님은 은근히 걱정되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라서 설교는 했지만 아직까지 산을 옮겼다는 응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스티브의 기도응답도 받지 못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티브가 낙심할까봐 걱정되어서 목사님도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스티브가 달이 바뀌어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산도 그대로 있었다. 목사님만 다급해졌다. 40일째 되던 날, 스티브가 벙글벙글한 표정으로 목사님 방으로 들어오더니 “목사님, 20세기는 하나님이 산을 번쩍 들어서 옮기는 게 아니라 차로 옮기시더군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새로 생긴 고속도로에 흙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트럭들이 와서 뒷산 흙을 계속 실어 날려서 산이 없어지고 있어요.”

기도한 내용과 하나님의 실력을 믿고, 의심을 거절하면서 지속하는 게 기적응답을 만든다는 것이다.

2) 하나님과 대화(16)

다윗은 애간장을 태우는 배신을 당하고 있음을 우리가 보았다. 그런데 그 배신을 해결하는 방법은 많다(① 타협하거나 수용 ② 혈기다툼 ③ 고소재판 ④ 자포자기 ⑤ 기도...). 다윗은 기도를 선택하였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의논하는 것, 하나님의 편을 따르고 하나님 편에 소망을 거는 것이다(16 ‘께’ ‘께서’ ‘구원하시리로다’ אקרא 에케레 I will shout. יושׁיעני요쉬에니 he will save me.). יושׁיעני

한 소년이 연을 날리면서 실을 있는 대로 다 풀어서 연을 높이 올렸다. 연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타래에 묶인 실이 팽팽한 것을 보고 연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며 소년에게 물었다.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데 너는 아니?”소년이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이 줄을 잡아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겠지요. 줄을 보면 틀림없지요.”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얼 수 있다. 우리의 믿음기도가, 기도응답이 ‘연줄’인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3) 탄식(17) שׂיח

‘근심’(המה 하마 sound of animals, coo, mourn, humming, ) ‘탄식’( שׂיח씨아흐 to speak, complain, lament, discourse. 울면서 설명, 강의). 다윗은 세 번씩(저녁, 아침, 정오) = 그만큼 괴롭고 짓누름!

그런데 다윗은 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밝혀 놓았다. 본 시에서 다윗에게 해당한 ‘네 짐’은 무엇일까? 다윗을 짓눌렀던 배신이지요. 그렇다면 다윗은 배신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16). 그리고 응답을 기다렸다(16下). 또 저녁 아침 정오에 탄식했다(17). 그러고 나서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이다(22). 하나님께 넘기도 해결조치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인 펠드리히를 포위했단다. 펠드리히 시는 비상의회를 소집하고 사태를 논의했다. 미리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한 사제가 일어나 말했다. “우리의 힘만 의지하면 패배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이니 예정대로 교회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러고 나머지문제는 모두 하나님께 맡깁시다.” 시의회 의원들은 사제의 말에 찬성하고, 우렁차게 종을 울린 후에 기쁘게 부활찬송을 불렀다. 그러자 프랑스군 본부는 오스트리아의 구원병이 펠드리히 시에 온 게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돌려 다른 곳으로 퇴각하였단다.

하나님의 실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의지함을 내보이고, 하나님께 맡기는 일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문제를 풀어 가신다는 것이다.

자 이제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이 말씀을 2018년 첫 시간부터 연줄처럼 잡고 다윗이 했던 대로 하나님 인식 때문에, 기도란 방법을 선택하고, 탄식하고 설명하고 불평도 하나님께 실토하고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간섭하여 문제를 풀어 가심을 체험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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