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설교
“성전 밖에서도 봉사를!” (대상 26:29-32 ‘성전 밖 봉사’) 17.11.12.
구약성경 왕하 2장을 펴보자. 숱한 기적을 행했던 선지자 엘리야와 그 제자 엘리사가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는데(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 임종에 임박한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에게 원하는 게 무어냐고 묻자 엘리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선생님보다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 그때 엘리야는 오만방자한 욕심이라고 제자를 꾸짖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보면 그 일이 네게서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10). 엘리야의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아야 네 소원이 이루어지는 법이기 때문에, 네가 너의 중심과 지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그려져 있는 미래를 보고 준비하면 그 미래가 네 삶 속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혼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것을 중요시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 5:13-14에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라고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악을 볼 수 있는 신앙인이 어른이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갈 수 있느니라.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원리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중심과 지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보고 있는가? 지금보다 훨씬 크고 높아 행복해질 그 자리에 서 있을 자신의 모습 말이다. 하나님의 상 때문에 입이 귀에 걸리는 그날을 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각으로 분별한 선에 동참한 삶은 반드시 천국의 상으로 받게 되어 있다. 저와 여러분은 현세의 의식주만 보고 기죽을 게 아니라 정말로 값진 꿈을 꾸게 하는 선함을 선택하는 신앙생활을 해내자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봉사일 수 있고, 믿음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주는 골방일 수도 있다. 신앙성숙을 발목 잡는 불평태도를 버리고, 바울처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하였던 그 순종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요. 절망이 아닌 산 소망의 꿈이 이루어지는 헌신의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오늘 설교본문을 고요한 마음으로 읽어보면 하나님의 심판대를 춤판으로 만드는 신앙생활을 기획하고 있는 다윗 왕을 볼 수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29). 지금 함께 읽어본 말씀은 신앙봉사를 ‘성전 밖에서’ 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관원과 재판관’이다. 좀 더 설명을 하면 ‘성전 밖’은 좁게는 예배당을 벗어난 장소와 시간을 뜻하고, 넓게는 지방 즉 세상과 엿새 동안을 의미한 것이다. 또 ‘관원’은 공무원처럼 행정관으로 봉사하는 것이며, ‘재판관’은 법으로 치안질서를 유지하는 사법일꾼으로 충성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본문은 말씀의 행동화, 믿음의 생활화, 아멘, 할렐루야의 씨뿌리기이다.
베트남에서 생긴 실화란다. 젊은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두고 전투병으로 참전했다가 제대를 하여 마을입구에서 아들과 손잡고 있는 부인을 발견하고 감격의 눈물로 재회했단다. 부부는 자기 가정을 지켜준 조상께 감사제사부터 드리기로 하고, 아내는 제물들을 마련하려고 시장으로 갔다. 남편은 다른 제사준비를 하면서 아들에게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했더니 아이가 설명했다. “아저씨는 제 아빠가 아니에요. 우리 아빠는 매일 밤이면 찾아와요. 엄마가 앉으면 아빠도 앉고요. 엄마가 누우면 아빠도 누웠어요. 엄마는 아빠에게 말하면서 울었어요.”
그 순간 아저씨의 가슴은 돌처럼 굳어졌다. 아내가 돌아왔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 제사를 드린 후에 아내는 절을 하지 못하게 했다. 부정한 아내라면 조상들 앞에 설 자격은 당연히 없다고 여겼다. 그는 곧장 집을 나가 술만 마시고 집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부인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장례식이 끝난 저녁에 남편이 석유등잔에 불을 붙였다. 그때 아들이 소리쳤다. “아빠가 왔어요.” 아들은 벽에 비친 아저씨의 그림자를 보더니 “아빠는 매일 밤에 이렇게 왔어요. 엄마는 저 아빠하고 말하고 울었어요. 엄마가 앉으면 아빠도 앉고요. 엄마가 누우면 아빠도 누웠어요.” 제가 엄마에게 “나는 왜 아빠가 없어요?”라고 물었더니 엄마는 밤에 벽에 나타난 사람을 가리키며 “이 분이 네 아빠란다.”하셨어요. “그만!”
아저씨는 진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역설적이지만 베트남에 이런 속담이 있단다. “다정하게 말하는 것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는 당신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소. 매일 밤 찾아온 사내와 대화하다가 함께 울고 함께 누웠다고 아들이 내게 일러바쳤소. 도대체 왜 그랬소?”라고 물어봤더라면... ‘내 판단이 네 견해’라고 속단하기 전에 易地思之를 좀 해봤더라면... 하지만 남편은 화난 자존심 때문에 부인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내도 남편과 똑같았다. 그동안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남편이 돌아와서 보여준 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았겠지만, 그래도 남편과 대화를 생략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 부부는 “왜 그랬냐?”라고 “왜 그러냐?”라고 물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생활도 오십보백보이다. ‘내 생각’, ‘내 판단’이 틀림없을 것 같지만 엉터리 고집일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를 따라가는 게 순종이고 충성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시지도 않는다(시 121:4).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라고 했고, 나다나엘을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라고 하시면서 성전 밖인데도 귀하게 보셨다.
자 그러면 ‘맏아들’처럼 불순종을 안타깝게 착각하지 않으려면 설교본문이 보여주는 다윗 왕을 주목하고 배우자.
1) 그나냐(29)
다윗 왕은 관원(행정)과 재판관(사법치안) 봉사자들로 ‘그나냐와 그의 아들들’을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나냐’는 이스할의 자손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스할은 그핫의 차남이었고(23:12), 그핫은 레위의 차남(23:6)이었는데, 모세 때는 성소 안에 있는 지성물을 책임전담 했었다(민4:15, 5, 7, 9, 11). 그리고 대상 15:22에 보면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인도하는 자요’(두 번째로 오벧에돔의 집에서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릴 때 찬양전문, 전공). 그런데 다윗 왕은 성전 밖(지방, 세상)에 봉사자로 임명했다는 것이니; 성찬봉사자나 찬양대원, 반주자, 지휘자를 차량봉사자로, 전도지배포자로 임명한 셈이다.
영국 런던의 테임즈 강변에 있는 재판소의 뜰에서 자란 포도나무 한 그루는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를 맺었단다. 그래서 식물학자들이 그 포도나무를 번식시켜 널리 보급시키려고 조사해보았더니 다른 포도나무와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여전히 포도 맛의 차이를 궁금해 하고 조사연구를 계속해봤더니 그 포도나무는 뿌리를 강 밑바닥에까지 뻗어나갔더란다. 그러니 어떤 가뭄에도 수분과 영양을 충분히 빨아올릴 수 있어서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열매를 맺고 있더라는 것이다. 시 92:13-14에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라고 노래했다.
저와 여러분도 철저한 임마누엘 신앙생활로 테임즈 강변의 포도나무처럼, 그나냐의 가족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순종충성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아멘.
2) 하사뱌(30)
‘용사 천 칠백 명은 요단 서쪽에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서쪽지방에서 행정봉사와 치안질서 봉사를 가리켰다. 역시 하사뱌도 지도자로 뽑힌 인물이었고, 당연히 성전봉사자로 적합했던 레위족이었다(27:7). 그런데도 용사 천 칠백 명이나 데리고 성전 밖 시골로 가서 봉사하는 것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좌천발령’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생활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했고, 그것도 믿음수준에 따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 부모님은 다니지 않고 두 형제만 교회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쓴 헌금봉투를 보고 목사님이 웃었단다. “하나님 감사해요. 우리 형제를 교회 다니게 해주시고 좋은 재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다른 봉투는 “하나님, 제 동생을 바보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썼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감사를 기뻐하셨을까? 물론 아이들이 드린 감사이니까 다 받으셨겠지만 제가 볼 때는 하나님께서는 비교해서 감사하는 것 보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면서 사실대로 인정하고 감사하는 동생의 감사헌금을 더욱 기쁘시게 받으셨을 것 같다. 비교하면 쉽게 불평불만에 빠진다. 하사뱌는 레위족 지도자였는데도 용사 천 칠백 명을 데리고 시골봉사자로 순종하는 게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3) 여리야(31)
‘여리야’는 이스라엘 동쪽 시골 봉사자 반장이었다. ‘이천 칠백 명이 다 용사요’ ‘다윗 왕이 그들로 루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주관’(32). 다윗 왕은 용사집단을 40년 통치 말년에 발견하고 즉시 봉사자로 발탁했다(31). 다윗 왕은 누구든 적합한 봉사자리를 마련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함께, 서로같이 한 지체되자는 신앙관이었다.
영국의 어느 교회가 선교헌금을 하였는데 5살 어린이가 1달러 헌금을 하면서 “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주세요.”라고 헌금 봉투에 썼더란다. 작은 돈이었지만, 어린아이의 중심과 믿음을 중하게 여기고 손바닥만 한 신약성경 한 권을 더 사서 그 어린이의 이름을 쓰고 인도로 보내는 성경들과 함께 보냈단다. 20년이 지난 후에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인도에 갔다가 어느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 곳에 복음이 전해진 사연을 듣게 되었다. 20년 전에 선교사님이 전해 주고 간 얇은 성경 한 권이 믿음의 불씨를 일으켰다고 하면서,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 성경을 보여주었다. 그 성경에는 자기교회의 어린아이 이름이 써져 있더란다. 목사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만약에 어린이의 정성을 무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요란한 빵빠레로만 시작되는 게 아니라 작은 정성으로도 크게 이루어진다. 광야 성전의 물두멍은 여인들이 드린 구리거울로 만들어졌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우리 한국사회와 교회는 큰 소리, 큰 인물을 광고하길 좋아해서 순수하지만 작은 정성, 작은 봉투, 작은 봉사는 쉽게 묻힌다. 작은 불꽃이 큰 불을 일으키듯, 과부의 두 렙돈 헌금처럼, 한 아이의 1달러가 수많은 영혼구원사역에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7).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우리 각자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 말씀을 챙기자. 오늘 설교본문은 다윗 왕이 성전 밖 일꾼을 지정하는 모습이다. 예루살렘성전 전공전문 찬양봉사자, 지도자, 용사 수천 명을 시골로 좌천배치 했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자녀 삶에 귀한 잣대로 사용되기를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