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9일 설교
“성전 문지기입니다!” (대상 26:1-12 ‘성전 문지기 봉사’) 17.10.29.
어느 날 밤중에 방정환 선생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복면강도가 불쑥 들어오더니 칼을 들고 위협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 선생이 대답하기를 “아니, 꼼짝도 않고 어떻게 손을 들 수 있겠소?” 강도가 주춤하며 다시 말했다. “그럼, 손만 들고 꼼짝 말아. 그리고 딴소리 말고 돈 있는 곳을 말해. 빨리 말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니까.” 방 선생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책상서랍에 390원이 있으니 가져가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그것이 전부요.”라고 하였단다. 그 당시 390원이면 큰돈이었다. 주인이 너무나 태연하게 돈을 내 놓으니까 오히려 도둑이 의심하다가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설 때 방 선생이 한 마디 했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지 그냥 가겠다는 거요?” 강도가 깜짝 놀라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그래 고맙다. 이 개새끼야!”
강도는 사라졌고 아침이 되었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그 강도와 순경이 서 있었는데, 순경이 말을 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놈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을 했다고 하기에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강도 맞지요?” 그러자 방 선생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 이 사람이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지요. 그런데 돈이 절박한 처지라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줬지요.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표정으로 “이 사람은 선생님 댁에서 그 돈을 훔쳤다고 분명히 자백했는데요?”하고 방 선생이 실토해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자 방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나 원,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가는 도둑놈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도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고 돌아갔다. 그때 강도는 방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려워지면 그럴 수도 있지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마시오.”하고 타일렀더니, 그 강도가 방 선생에게 간청하기를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평생 선생님 곁에서 시중들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충성했다고 한다.
칼 강도를 충신으로 살아가게 했다는 것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그 훌륭함과 보람됨에 전혀 손상을 주지 못할 일이다. 오늘 설교본문도 하찮은 일을 가지고 영광스런 축복으로 만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분이 다윗 왕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 오늘 설교본문 핵심은 ‘문지기봉사’이다. 그 당시 문지기 봉사자는 4,000명이었는데(23:5), 다윗 왕은 먼저 4,000명 중에서 24명을 뽑았고, 또 93명을 뽑아서, 24반 봉사체제로 문지기봉사를 편성하였다(24명 = 7명<3> + 7명<4 스마야는 빼고 대신 아들 6을 포함시킴 + 6명<7> + 4명<11>. 93명 = 62명<8> + 18명<9> + 13명<11>. 레위인이 믿음으로 책임을 지고 질서 있게 할 수 있는, 문지기봉사체제를 다윗 왕이 구상했던 것임!).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4,000여 명이 대표로 모인 가운데 “성경이 말씀되게 하자”라는 주제로 ‘세계 순회복음전도대회’가 열리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예배 시간에 특별찬송을 하려고 한 맹인 여가수가 안내를 받으며 무대중앙으로 올라섰다가 찬송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우리도 수없이 불렀던 찬송이지요.
4,000여 청중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그들의 마음속에 감사함이 가득 차오르게 되었단다. 다시 말하면 실감하는 감사함을 찬송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그 맹인가수가 6.25전쟁 때 두 눈을 잃고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성악공부를 한 한국인 킴. 스윜 양이었다. 사실은 찬송만 그런 게 아니지요. 모든 신앙표현이, 봉사가 실감나는 믿음반응이어야 한다. 다윗 왕은 바로 문지기봉사를 실감나는 믿음반응으로 하게 되기를 꿈꾸었다. 우리에게도 맹인 가수 킴. 스윜 양이 하였던 그런 감사반응 신앙생활을 할 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요, 그러한 감사감격을 표현하는 찬송을 드리는 예배가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엿새라는 삶에서 빛과 소금의 신앙삶인 것이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교회봉사들이 때마다 믿음반응이요 실감나는 감사감격의 표현이 되도록 하려면 무엇을 착안하면 되는지 설교본문을 좀 자세히 살펴보자.
1) 오벧에돔(5)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ברך 바라크 to bless, to bend knee, praise, greet. 사람이 무릎을 꿇고, 찬양을 하고, 절을 할 정도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렇게 하게 되던가? 얼마나 좋은 일이 생겼으면 무릎을 꿇고, 찬양을 하고, 절을 할 수 밖에 없냐는 것이다. 오벧에돔의 집에 그런 일을 하나님이 해 주셨다는 것이다. 지금 그 현장으로 가보자(삼하 6:6-11).
다윗 왕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러 갈 때 다윗 왕은 하나님의 궤에 대하여 무슨 생각으로 꽉 찼을까? ‘축복의 통로!’ 그러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다가 웃사가 사망하는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궤는 다윗 왕에게 무엇으로 보였을까? ‘저승사자!’(‘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그렇다면 웃사가 사망 당하자 당장 다윗 왕이 하나님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왔을 때 오벧에돔의 심정(감정, 기분)은 어떠했겠는가? 성경을 좀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오벧에돔의 심정(./입장, 처지, 불만)일 때 기적의 기회이고 축복실현이 이루어지고, 상황역전 되는 일이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다 불평거절조건!
김준호(1954~2002) 씨는 인하공대 건축과 2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가 군복무 19개월일 때 부대에서 크게 다쳐 전신마비 장애를 당했단다. 그럴 때 그는 절망적인 신체장애를 탓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오히려 감사하며 생활해 갔는데, 첫째는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게 된 사실을 무엇보다 감사했고, 둘째는 군대에서 다쳤기 때문에 치료비가 해결되자 하나님께 감사했으며, 셋째는 보훈병원에 입원 중일 때 병원의 실습생인 자신의 아내를 만나게 되어 감사했고, 넷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구필화가(부인내조로 엎드려 누운 자세로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림)가 된 것을 감사했단다.
그는 인당이라는 화명으로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다 1981년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전시회를 열고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해외전시에서도 큰 호평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단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욕창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는 삶을 살다 2002년(48세) 일생을 마감했다. 그런 삶에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다윗 왕이 구상한 문지기봉사는 김준호 화백처럼 불평, 혈기, 거절하기 쉬운 자리에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신앙생활이었다. 체험해 보길 축복한다. 아멘.
2) 능력(8)
‘능력이 있는’( חיל하일, strong, strength, army, integrity, virtue. 전체적으로 균형 잡아 조화되게 문지기봉사를 할 수 있는 실력자를 가리킴. ≠ 감정파, 자기 성깔대로! 혼자만, 한 쪽만. 오벧에돔 가문 62명 뽑힘).
6,25전쟁 중에 ‘노래하는 헌병’이란 별명을 가진 병사가 있었는데, 미해병 제5연대 F중대 하사 셜츠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수시로 찬송을 불렀단다. 노래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찬송을 듣던 동료병사들은 자주 감동을 받기도 했단다. 셜츠 하사가 야간보초경비를 하다가 적군이 기습하여 쏜 총을 맞고 개인참호에서 쓰러졌다. 갑자기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럴 때 요란한 총소리 사이로 찬송이 들려왔는데, 셜츠 하사가 죽어가면서도 부르는 찬송이었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이 찬송이 전투병들의 귀에 들려왔고, 미해병들은 그 찬송에 힘입어 용기백배로 싸웠는데, 찬송이 끝나고 나자 적군은 모두 도망치고 없더란다. 미해병 군목은 셜츠 하사를 이렇게 회상했단다. “셜츠 하사의 찬송은 정말 신비한 힘이 있었지요. 목청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그가 정성을 다해서 간절하게 찬송을 부르면 듣던 병사들이 용기와 위로를 받곤 했었답니다.”
그렇다. 우리가 어떠한 위험, 위기를 당해도 확신 넘치는 믿음을 행동할 때 위기가 물러가며 환경도 바뀐다. 행동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행동을 보시고 위대한 일을 해 주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치의 문지기봉사를 다윗 왕이 생각하고 능력( חיל하일, strength, integrity, virtue)을 갖춘 자를 뽑았던 것이다. 아멘.
3) 직임(12)
‘그 형제들처럼 직임을 얻어’; ‘그 형제들은’은 제사장들(24:3, 5)과 찬양대(25:1, 9)를 가리켰는데, 제비뽑은 결과를 보고 삐지거나 불평하지 말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이었다. 문지기봉사의 자리가 어디든 그냥 감사함으로 순종하고 충성하면 된다는 게 다윗 왕의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흑백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에,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이 싸우다가 백인이 흑인을 향해 칼을 던졌단다. 흑인은 칼에 찔려 죽든지 아니면 엄청난 상처를 당할 순간이었다. 마침 옆에서 말없이 싸움을 보고 있던 백인목사님이 손을 뻗어 칼을 막았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붉은 피가 마구 흘렀다. 싸움은 저절로 멈춰졌고 흑인은 목사님이 대신 다침으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흑인은 그 일로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심부름을 하며 돕고 살았는데, 그 흑인은 종종 싫증을 내고 불평도 하고 원망을 하곤 하더란다. 그때마다 목사님은 그 흑인에게 말없이 칼자국 난 손을 보여주었고,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자신의 잘못됨을 시인하곤 했단다.
그렇다면 우리도 불평과 원망생길 때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감사함으로 충성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 삶 자체를 저울질해 보자. 오늘 설교본문은 다윗 왕이 정해 놓은 문지기봉사이다. 문지기 봉사는 오벧에돔처럼 복을 받게, 조화되게,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저 섬기라는 것이다. 잘 활용시키는 가르침이 되길 축복한다. 아멘.